제1038화
묵용청양이 또다시 물었다.
“하면 큰 나리께선 계신가?”
“노야께서도 안 계십니다.”
“아직도 근무 중이란 말인가?”
“소인은 잘 모릅니다.”
문지기는 조금 의아했다.
“대체 도련님을 찾으시는 겁니까? 노야를 찾으시는 겁니까?”
“난 부인을 찾아왔네.”
“…….”
“부인께서도 안 계신가?”
“계시긴 한데…….”
문지기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께선 저희 부인을 아십니까?”
“당연하지.”
묵용청양이 말했다.
“내 예전에 영부에 얼마나 자주 왔는데. 우리 집보다 더 익숙했지.”
그녀가 마당의 포도 덩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저 포도 보이나? 내가 어릴 때 직접 심은 거라네.”
문지기는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진짜란 말인가, 거짓이란 말인가? 고개를 드니 도련님이 말을 타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문지기가 서둘러 앞으로 다가가 그를 맞이했다.
“도련님, 돌아오셨습니까? 어떤 아가씨께서 부인을 찾으십니다.”
말에서 내린 영안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래도 도련님께서 모르는 아가씨인 듯하자 문지기가 입을 떼려는데… 아가씨가 쏜살같이 발을 날려 도련님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
아가씨가 어찌 저리 사납단 말인가…….
영안은 얼굴이 파래질 만큼 화가 났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거든?”
묵용청양이 냉소를 터뜨렸다.
“이제 알겠네. 집 앞에서도 날 모른 척하시겠다? 모른 척할 거면 끝까지 모른 척하지, 왜 우리 오라버니 앞에서는 줏대 없이 비굴하게 구는 건데? 영안, 네 기개는 다 어디 갔어? 어릴 때 아버지한테 맞더라도 날 이기려 했던 그 기개는?”
문지기는 그녀의 말에 묵용청양이 어느 고관대작의 아가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도련님은 고관대작의 아가씨에게 허리를 숙일 만큼 비굴한 사람이 아니었다. 영안이 말했다.
“지금도 이길 수는 있지.”
이제 더는 뒷배도 없으니 이 나리가 얼마든 묵사발을 내줄 수 있고말고.
“덤벼.”
묵용청양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런 말은 이기고 난 뒤에나 하고.”
영안은 잠시 망설였다.
“여긴 안 돼. 나중에 장소를 정해서…….”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그의 뒤통수를 힘껏 때렸다.
“어릴 때도 싸워선 안 되었고, 지금은 더 안 돼! 너희 아버지가 아시면 퍽도 좋아하시겠다.”
기홍은 한바탕 아들을 혼낸 뒤 곧장 묵용청양을 붙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어서 이 고고에게 얼굴 좀 보여 주세요. 벌써 이렇게 성장하시다니… 정말 예뻐지셨습니다. 점점 더 부인과 닮아가는군요.”
묵용청양은 얼굴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기홍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이런 재주는 녹하 고고에게만 있는 줄 알았더니, 기홍 고고마저 이리 능숙하다니! 그녀가 기홍을 보며 투덜댔다.
“고고, 영안이 절 업신여겨요.”
기홍이 아들에게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나중에 저 애 아버지한테 혼을 내 주라고 하겠습니다.”
묵용청양은 영안을 향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은 뒤, 기홍을 끌어당기며 신나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영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표정으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줄곧 궁금했던 문지기가 참지 못해 물었다.
“도련님, 저 아가씨는 누구십니까?”
영안이 대꾸했다.
“귀신도 무서워하는 사람.”
말을 마친 영안이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서 일어난 작지 않은 소동에 다른 하인들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다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자 문지기의 궁금증은 더욱더 증폭되었다. 그가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이보게 형제, 저 아가씨는 대체 누구인가?”
붙잡힌 하인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문지기가 손가락을 따라 위를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석양이 지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건드릴 수 없는 분이란 뜻이지.”
“설마.”
문지기가 웃으며 말했다.
“황가의 사람도 아니고, 우리 영부도…….”
문지기는 순간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똑같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정말로…….”
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자리를 떴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문지기 또한 귀신도 무서워한다는 공주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공주를 이렇게 갑자기 만날 줄이야.
게다가 자신이 공주의 앞을 가로막았다니! 그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도련님마저 이기지 못하는 그 무서운 공주를 자신이…….
한편, 자신이 영부 하인의 마음속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묵용청양은 기홍에게 끊임없이 간식 목록을 읊어 댔다.
“고고, 반죽을 얇게 말아서 만든 찐빵이랑 팥 과자, 팥빵, 참깨 빵, 부추 전병으로 먹을래요. 그리고 올방개 열매 떡, 완두떡, 호두과자, 찹쌀 전병, 계화 전병도 먹고 싶고…….”
“…….”
기홍의 얼떨떨한 표정에 묵용청양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뭐든 있는 대로 먹을게요.”
기홍은 그제야 그녀가 자신을 놀렸다는 걸 깨닫고 눈을 흘기며 나무랐다.
“깜짝 놀랐습니다. 한 번에 그리 많은 걸 말씀하시다니요. 그리 많은 음식을 한 번에 만들기엔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 고고가 미리 오시는 걸 알고 몇 가지 준비해 뒀으니 다행이지… 안 그랬음 간식이 하나도 없을 뻔했습니다.”
묵용청양이 물었다.
“고고, 그럼 지금은 간식을 안 만드는 거예요? 영안은 간식 안 먹어요?”
“어릴 땐 저 애도 간식을 즐겨 먹었지만, 크더니 잘 안 먹습니다. 여인들이나 먹는 거라나, 뭐라나. 저 애 아버지도 안 먹으니 저 혼자 먹어야 하는데 제가 얼마나 먹겠어요? 평소엔 조금씩만 만들어서 소타에게 가져다줍니다.”
묵용청양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제가 돌아왔잖아요. 이젠 먹을 사람 없다고 걱정할 필요 없어요, 고고.”
기홍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네, 전하께서 돌아오셨으니 이 고고의 간식 가게도 다시 문을 활짝 열어야겠네요.”
묵용청양은 별안간 조금 전 일이 떠올랐다.
“고고, 영안이 시위를 하는 게 아니라면서요? 그럼 무슨 일을 해요?”
“황상께서 환경문이라는 곳을 신설하셨는데 저 애에게 부문주를 맡기셨어요. 사건을 조사하는 일을 하는 중이에요.”
기홍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실 저는 시위가 더 나은 것 같아요. 시위는 매일 궁에서 지내다 근무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식구들이 마음을 졸일 필요 없지요.”
묵용청양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사건을 조사하는 게 위험한 일이에요?”
“저 애가 조사하는 건 주로 큰 사건이라 흉악범이나 도망자들과 접촉해야 하거든요. 작년 여름에는 저 애가 다른 이의 매복에 걸려들어서 배에 칼을 맞았어요.”
기홍이 손짓을 하며 설명했다.
“세상에, 배를 붙잡고 집에 돌아와서는 문 앞에 그대로 쓰러졌지 뭐예요? 그땐 너무 놀라서 저도 거의 목숨을 잃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보름을 침대에 누워 있으니까 조금씩 나아지더라고요. 하지만 아직도 배에 흉터가 남아 있어요.”
기홍은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지 여전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묵용청양은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눈을 반짝였다. 기홍은 자신도 모르게 걱정부터 앞섰다.
“전하, 설마…….”
“고고, 방금 뭐라고 했죠? 환경문이라고요?”
기홍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녀는 묵용청양을 너무 잘 알았다.
“세상에, 거긴 절대 가시면 안 됩니다. 여인들이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묵용청양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고고, 영안이 부문주라면서요. 제가 문주를 하는 건 어때요? 제가 거기 있으면 영안도 별일 없을 거예요.”
“…….”
* * *
묵용청양은 영부에서 저녁을 먹고 가기로 했다. 이번에도 그녀는 기홍에게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며 조잘댔다.
“고고! 팔보 오리랑 뱅어 요리, 통닭구이, 오징어 볶음, 새우살 요리, 갈비, 완자, 생선구이, 닭똥집 볶음, 조개탕…….”
영안이 안으로 들어와 냉소를 지었다.
“배가 터져 죽고 싶은 건가?”
기홍이 그를 찰싹 때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전하께선 지금 나랑 장난치시는 거야!”
묵용청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왜 나를 반기지 않지?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게 있어?”
영안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잘못한 게 차고 넘쳐 다 셀 수도 없는 것을. 기홍이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전하, 이 애를 잘 아시잖습니까. 어릴 때부터 늘 이 모양이었습니다. 누구에게든 웃는 낯을 보이는 법이 없지요.”
묵용청양이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요. 철이 없던 시절에도 그러더니, 어찌 다 큰 뒤에도 똑같대요?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가지고!”
“…….”
영안은 한숨을 쉬었다. 밥을 먹어야 하는 것만 아니면 그는 정말인지 묵용청양의 꼴도 보기 싫었다. 밥을 다 차렸는데도 영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묵용청양이 물었다.
“영 대인은 식사하러 안 오세요?”
기홍이 말했다.
“사람을 보내 미리 소식을 전하더군요. 제독 대인이 술을 마시자고 해서 오늘은 밖에서 식사를 한다고요.”
묵용청양이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영 대인이 이제 그런 사교 모임까지 갖는단 말이에요?”
그녀의 기억 속 영구의 모습은 얼음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곁을 지키는 것 외에는 집밖에 알지 못했고 조정의 관리들과 어울리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런 그가 몇 년 못 본 사이에 술자리까지 갖다니.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요. 나리와 부인께서 황상을 그이에게 맡기셨으니 최대한 열심히 도와야지요. 그 일 중엔 다른 이들과 교제하는 일도 있답니다. 조금씩 하다가 보니 그래도 많이 나아졌습니다.”
묵용감과 백천범을 언급하니 기홍은 조금 속상했다.
“안 그래도 이 애 아버지랑 이미 얘기해 두었습니다. 몇 년 뒤에 영안이 혼인을 시키면 우린 관직에서 물러나 강남에서 태상황과 태후와 함께 지낼 생각이에요.”
묵용청양이 웃음을 터뜨렸다.
“월규 고고도 똑같은 말을 하던걸요. 황형이 황후를 맞으면 관직에서 물러나 강남으로 가겠다고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영안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들었지? 넌 이제 곧 부인을 맞아야 해.”
영안은 민망해서 귀까지 붉게 물들었지만, 자신의 젓가락 끝만 빤히 바라보며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굴었다. 묵용청양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아이고, 부끄러운가 보네.”
그녀가 기홍에게 물었다.
“고고, 골라 둔 신붓감이라도 있어요? 눈여겨본 아가씨가 있거든 황형한테 혼사를 정해 달라고 할게요.”
영안이 참지 못하고 눈을 번득였다.
“쓸데없는 일에 참견은.”
묵용청양이 말했다.
“이게 어떻게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 거야. 넌 내 소꿉친구잖아. 그 정이 얼마나 깊은데… 네 혼사는 내가 책임질게.”
“…….”
기홍이 듣기엔 어쩐지 조금 이상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