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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37)화 (1,037/1,192)

제1037화

묵용청양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옆에서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소인,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그에게 시선을 돌린 묵용청양은 곧장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사금언, 너구나!”

어릴 때 사금언은 가소타와 함께 그녀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던 아이였다. 사금언은 조금 부끄러운지 머리를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예, 접니다.”

“여기서 날 기다렸던 거야?”

사금언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돌아오셨다기에 소인 근, 근무를 마치고…….”

묵용청양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궁에서 일을 한다고?”

“예, 시위영에서 이등 시위로 일하고 있습니다.”

“훌륭한데.”

묵용청양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하나둘씩 다들 출세하고 말이야.”

너무 오랜만에 만난 공주라 사금언은 어색했지만, 공주의 친숙한 행동을 보고 곧장 헤벌쭉 웃음이 나왔다.

“전하, 어딜 가십니까?”

“너희 집에 가던 참이었어. 잘됐다. 같이 가자.”

사금언은 속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저희 집엔 뭐 하러 가십니까? 제가 환영의 의미로 식사를 대접할 테니 식당으로 가시지요.”

묵용청양이 대답했다.

“봉봉을 만나러 가려는 거야. 식사는 다음에 하자.”

사금언은 괜한 착각에 민망해하며 성큼성큼 앞으로 향했다.

“그, 그럼 어서 가시지요.”

사봉봉은 이제 겨우 열일곱이었지만, 임안성에서 그녀의 명성은 어머니인 사앵앵 못지않았다. 사가 상호의 어린 주인장 얘기만 나오면 다들 엄지를 치켜세웠고 훗날 어머니인 사앵앵을 넘어설 거라고 청출어람이라며 칭찬했다.

하지만 사앵앵은 이미 동월 최고의 갑부인데 어미를 넘어서면 어디까지 간단 말인가? 사금언은 자신의 누이를 칭찬하면서도 겸손하게 말했다.

“그저 이웃들이 허풍을 떠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이미 동월의 최고 갑부인데, 누이가 어머니를 넘어선다면 어디까지 올라가야 한단 말입니까?”

묵용청양이 말했다.

“난 너희 누이가 어디까지 오를지 아는데?”

최고 갑부든 황후든… 한 여인에게 있어서 전무후무의 최고봉일 것이다. 사금언이 물었다.

“전하께선 아신다고요? 뭔데요?”

묵용청양은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 들어서니 사봉봉은 장부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높게 쌓인 장부 사이로 주판을 탁탁 튕기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공주의 모습을 발견한 사봉봉은 기뻐하며 그녀를 맞이했다.

“공주 전하,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어서 이리 앉으세요.”

이내 계집종을 불러 차를 내어오라고 분부했다. 묵용청양은 사봉봉을 위아래로 훑었다. 맑고 깨끗한 얼굴의 사봉봉은 보면 볼수록 예쁜 얼굴에 남을 편안하게 해 주는 친절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여인을 황형은 왜 마음에 안 들어 한단 말인가?

어릴 적 묵용청양은 거들먹거리며 다니는 걸 좋아해서 한 살 많은 영안도 그녀의 뒤를 따르게 했고, 그녀보다 어린 사금언과 가소타도 제 뒤에 세웠다.

사봉봉을 처음 봤을 때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결국 포기했다. 어리긴 했지만 사봉봉은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 다시 만나니 그런 느낌이 더 강해졌다. 어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엔 내성적이고 온화해 보이지만, 절로 심복하게 하는 기질을 가졌다. 그녀의 황형도 그런 부류였고 사봉봉도 그러했다. 아버지의 안목은 보통이 아니니, 이 두 사람이 함께한다면 정말 최고의 조합일 것이다.

사봉봉과 묵용청양은 화기애애하게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사금언은 개미가 집을 옮기듯 끊임없이 방을 들락날락하며 음식을 내왔다. 탁자가 이미 가득 찬 탓에 접시 위에 접시를 겹쳐 둘 정도였다. 묵용청양이 웃으며 말했다.

“간식으로 연회를 열 셈이야?”

사금언이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전부 다 이번에 새로 나온 간식이니 맛 좀 보시지요.”

묵용청양이 감탄하며 말했다.

“상점을 내니 정말 좋네요. 원하는 건 뭐든 다 가질 수 있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고. 차라리 나도 장사나 해 볼까 봐요.”

사봉봉이 웃으며 말했다.

“전하께선 부족할 게 없으시잖습니까? 저희 장사꾼들의 밥그릇을 빼앗으려 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도 봉봉의 밥그릇은 못 뺏죠.”

묵용청양이 손을 내저었다.

“봉봉이 사가 상점의 작은 주인인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때, 사앵앵과 사장풍이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사앵앵이 묵용청양을 훑어보며 말했다.

“세상에, 전하 언제 이렇게 많이 크셨습니까? 아가씨가 다 되셨습니다.”

사장풍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 딸이 다 컸으니, 남의 딸도 당연히 컸지.”

사앵앵이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

“전하께서 남의 딸이란 말이에요?”

사장풍은 그제야 자신이 실언을 한 걸 알아차리고 멋쩍게 웃었다. 묵용청양은 그녀의 어머니처럼 사소한 규율은 신경 쓰지 않았다. 몇 년 만에 만나는 것이긴 해도 사씨 가족들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묵용청양은 어릴 때 사봉봉 남매와 자주 놀았기에 사장풍 부부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한참 동안 함께 수다를 떨다가 묵용청양이 목청을 가다듬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 제가 여기 온 건 축하할 일이 있어서예요.”

네 식구는 일제히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앵앵이 웃으며 말했다.

“전하, 축하할 일이라니요?”

“봉봉이가 곧 황후로 책립될 거예요. 어때요, 기쁜 일이죠?”

말을 마친 묵용청양은 사봉봉을 바라보았다. 사봉봉은 안색이 급변했다. 역시 그녀의 추측대로였다. 사봉봉은 황후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항상 차분하고 냉정한 사봉봉에게도 이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식이었다. 사앵앵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전하, 그런 말씀은 그리 함부로 하시면 아니 됩니다.”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이에요. 며칠 뒤면 조서가 내려질 거예요. 그 전에 미리 찾아와서 알려 드리는 거예요.”

묵용청양이 뻔뻔스럽게 말했다.

“미리 알려 드리지 않았다가 너무 놀라서 기절이라도 하실까 봐요.”

사씨 집안 네 식구는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기쁘기는커녕 너무 놀라 당혹스럽고 질겁한 얼굴이었다. 묵용청양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엉덩이를 뗐다.

“영부寧府에도 가 봐야 해서… 전 이만 가 볼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잽싸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사실 사금언이 배웅을 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고개를 돌려 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오며 탄식했다.

“다들 너무 놀란 것 같네.”

한편, 묵용청양이 떠난 곳의 분위기는 삭막했다. 사봉봉보다 사앵앵의 반응이 더 심상치 않았다. 그녀가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울부짖었다.

“대체 황제께서는 무슨 생각이시랍니까? 분명 우리 봉봉이를 마음에 안 들어 하셨는데… 어째서 봉봉이를 궁에 들이시려고…….”

사장풍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제발, 조용히 좀 얘기하시오.”

사앵앵이 그의 손을 뿌리치며 사봉봉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봉봉아. 이 어미가 네가 궁에 들어가는 건 막아 주마. 황후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우린 아쉬울 거 없어.”

사금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황상께서 어머니 말씀을 들어 주시겠어요?”

사앵앵이 말했다.

“황상께서 내 말은 안 들어주셔도, 황상의 부모님 말씀은 들어주실 것 아니냐? 내가 직접 강남으로 가 태상황과 태우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청해야했다.”

사장풍이 말했다.

“가도 소용없을 거요. 아직도 모르겠소? 봉봉이를 황후로 삼는 건 황상의 뜻이 아니라 태상황의 뜻이요.”

사앵앵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그걸 당신이 어찌 알아요?”

“내 비록 조정에 자주 가는 건 아니지만, 알 만한 건 알고 있소. 황상이 마음에 들어 하는 여인은 좌승상 댁 규수요. 듣자니 좌승상 댁 부인이 이미 혼수도 다 준비했다던데.”

“하면 좌승상 댁 딸과 혼인하면 되지, 어째서 우리 봉봉이를 넘보는 거예요?”

“청양 공주가 소식을 전한 거 보면 모르겠소? 보나 마나 태상황의 뜻이요.”

“태상황께서 대체 왜 그리 결정하신 건데요?”

사장풍이 한숨을 내쉬었다.

“태상황께서 당신에게 황상皇商의 지위를 주셨을 때, 어쩐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걱정스러웠소. 지금 보니 그때의 걱정이 현실이 된 듯하오.”

사앵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이런 늙은 여우! 내가 그 늙은 여우랑 연을 끊든가 해야지!”

그녀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늙은 여우가 그래도 천범이 말은 들으니 천범이를 찾아가 말해야겠어요.”

“이렇게 큰일을 태후께서 모르실 리가 있겠소? 알면서도 반대하지 않으신 건 태후께서도 동의하셨단 뜻이지.”

사앵앵은 잿빛이 된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이제 어떡해요…….”

사봉봉은 아직 농담할 여유는 있었다.

“다른 집이었다면 온 집안 사람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텐데… 우리 집에선 하늘이 무너진 것 같네요.”

사앵앵이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

“봉봉아, 넌 황후가 되고 싶으니?”

사봉봉이 고개를 저었다. 어린 시절 묵용린 때문에 어두운 방에 갇혔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덜컥 겁이 났다. 그런 그에게 시집을 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평생 다시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래, 네 뜻은 잘 알겠다. 그 누구도 네게 강요할 순 없다.”

사앵앵이 사장풍에게 말했다.

“지금 입궁해서 어린 황제께 말씀드리세요. 우리 봉봉이는 황후가 되고 싶지 않다고요. 뭐든 미리 얘기해야 상의하기가 쉬우니까요. 성지를 내린 뒤에 거부했다간 황상께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테니 체면이 말이 아닐 거예요.”

사금언은 바보를 본 것 같은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황상의 체면을 깎아내리면 앞으로 우리 집안이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으세요?”

“…….”

* * *

묵용청양은 영부를 찾아왔다. 영부의 문지기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문 앞을 막아섰다.

“아가씨,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작은 나리께선 집에 계시는가?”

“도련님은 아직 관청에 계십니다. 돌아오시려면 좀 더 기다리셔야 합니다.”

“관청?”

묵용청양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궁에서 시위로 있는 게 아니라?”

문지기는 곧장 경계심을 가졌다. 도련님이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감히 집까지 찾아오다니. 요즘 아가씨들은 너무 자유분방했다.

“저희 도련님은 시위가 아니십니다.”

“그래? 그럼 무얼 하는데?”

도련님이 냉랭하긴 했지만 빼어난 외모 덕분에 어린 소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런 일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기에 문지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소인은 잘 모릅니다. 다음에 저희 도련님께 직접 여쭤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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