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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36)화 (1,036/1,192)

제1036화

진왕에겐 방법이 있었다. 진왕은 천성적으로 여인에게 다정다감한 성격인 데다가 정과 욕구의 결합을 중시했다. 그는 묵용린에게 자신이 마음에 드는 여인과 합방을 하면 문제가 해결될지도 모른다고 알려 주었다. 바로 이 때문에 묵용린이 대혼을 계속 뒤로 미룬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묵용린은 허설령과 사적으로 몇 차례 만나 보았다. 신체적인 접촉은 없었지만 마음만은 퍽 잘 맞았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그녀와 함께라면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대혼 후, 삼 년 뒤에 수녀를 선발하니 분명 정상으로 회복되기까진 시간이 충분할 터. 수녀들이 입궁하면 그는 정상적인 제왕처럼 사랑을 고루 나눠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태상황이 별안간 사봉봉을 끼워 넣으면서 그의 계획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낯선 여인에게도 병이 도지는데 그가 싫어하는 사봉봉에게는 분명 더 심한 증세를 보일 게 불 보듯 뻔했다. 다른 건 상관없었지만 자신의 비밀을 지키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사봉봉 때문에 체면을 잃을 생각을 하니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묵용린은 깊은 밤까지 서재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는 모든 일들의 장단점을 비교해 보았는데 이리저리 고민해 보아도 태상황의 말이 맞았다. 그의 웅대한 계획과 위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사봉봉과 혼인을 올려야 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절대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 절대! 절대!

* * *

이튿날, 묵용성이 묵용청양을 찾아왔다. 분명 영안만큼 크진 않았지만,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더는 어릴 때처럼 그의 머리를 내리칠 수도 없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내들은 여인들보다 더 빨리 큰다니까. 무슨 거름을 퍼붓듯이 갑자기 커 버렸네.”

줄곧 기세등등했던 묵용성은 그녀의 말에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

어릴 때부터 늘 다투며 커 왔지만 몇 년 만에 만난 사이인지라 조금은 서먹했다. 어색하게 인사치레를 하며 예를 갖췄고, 그러다 보니 묵용성도 예전처럼 그녀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각자의 삶을 얘기하면서 나름대로 남매간의 우애를 나누었다. 묵용청양은 거리에서 사 온 자질구레한 것들을 가져와 동생에게 건넸다.

“이거 봐, 다 너 주려고 사 온 거야. 어릴 때 이런 거 좋아했잖아.”

묵용성은 싸구려 장난감들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난 어릴 때도 그런 거 안 좋아했어. 일반 백성 집안 아이들이나 좋아했지.”

묵용청양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네가 황자라고 이런 것들 무시하진 마. 네가 이 세상의 좋은 것들만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

묵용성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난 동월의 유일한 황자인데 못 가질 게 뭐가 있어?”

묵용청양은 생각도 하지 않고 불쑥 내뱉었다.

“네가 봉봉이를 좋아한다고, 그 애를 가질 수 있어?”

그녀가 묵용성의 가슴에 비수를 꽂자 방금까지 나누던 남매간의 우애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묵용성이 귀까지 빨개진 얼굴로 묵용청양에게 소리쳤다.

“누가 귀신도 무서워하는 공주 아니랄까 봐. 그게 무슨 막말이야?”

“네가 감히 날 욕해?”

묵용청양은 곧장 주먹을 휘둘러 그를 때렸다. 하지만 이미 그는 그녀보다 키가 더 커 있었다. 키뿐만 아니라 무술 실력도 제법 늘었는지 두세 수를 썼는데도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다. 그녀는 좌절감이 밀려왔다.

처음엔 묵용성도 자신이 없었지만 막상 맞서고 보니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묵용린에게 등이 떠밀려 억지로 무술을 배웠는데 제법 쓸모가 있었다.

공주와 황자가 치고받고 싸우자 궁녀와 태감들은 다들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몇 년 전만 해도 빈번하게 일어난 일이었다. 다들 말리지 못하고 묵용린에게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안 그래도 마음이 번잡스럽던 묵용린은 묵용청양과 묵용성이 싸운다는 말에 더 머리가 아파 왔다. 그는 얼굴을 굳힌 채 요대궁으로 향했다.

묵용성은 드디어 자신의 기를 펼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누이의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싸움에 임하는 자세는 판이하게 달랐다. 한 사람은 피동적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주동적이니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바닥에 엎어졌고, 묵용청양은 어릴 때처럼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엉덩이로 깔아뭉갰다. 어릴 땐 그렇다 쳐도, 다 큰 남매가 이런 모습을 보이니 궁인들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묵용성은 힘껏 발버둥을 치며 욕을 마구 퍼부었다.

“누가 귀신도 무서워하는 공주 아니랄까 봐! 이 귀신같은 게…….”

그가 욕을 하자 묵용청양은 더 힘껏 그를 깔아뭉갰다. 묵용성은 순간 목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내상을 입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문턱을 넘은 묵용린은 두 사람의 모습에 곧장 큰소리로 호통쳤다.

“일어나거라. 바닥에서 그게 뭣들 하는 짓이냐?”

묵용청양은 겁낼 게 없는 사람이지만, 황형은 조금 두려웠다. 묵용린이 얼굴을 굳히자 묵용청양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묵용성은 억울하다는 듯 고자질했다.

“황형, 청양이 먼저 절 괴롭…….”

묵용린은 아직도 묵용청양에게 얻어맞는 묵용성의 모습에 화가 났다.

“그간 배운 무술은? 키도 더 큰 놈이 어찌 청양이를 이기지도 못한단 말이냐?”

순간 묵용청양은 기분이 나빴다.

“황형, 꼭 제가 졌으면 좋겠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묵용린도 그제야 자신이 뱉은 말이 옳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화가 나서 순간 분별이 되지 않은 듯했다. 그는 여전히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짐이 말할 땐 끼어들지 말거라. 너희 둘은 여섯 살이 아니라 열여섯이다. 한데 어찌 만나기만 하면 아직도 그리 싸우는 것이냐? 오랜 시간 만나서 남매간의 우애를 나누지도 못할망정… 너희들은 우애가 조금도 없는 것이냐?”

묵용청양이 말했다.

“저는 많아요. 오는 길에 성이한테 줄 물건도 잔뜩 사 왔거든요. 한데 제가 선물을 주니 얘가 싫어하잖아요.”

묵용린은 바닥에 어질러진 장난감을 바라보며 그들이 왜 싸웠는지 대충 이해했다. 그가 묵용성을 꾸짖었다.

“이번엔 네가 잘못한 것이다. 널 생각해서 멀리서 선물을 사 온 게 아니더냐. 가벼운 선물이라도 그 마음은 중하다 하였다. 청양이도 네가 보고 싶으니 이리 선물을 사 온 것이겠지.”

묵용성이 아직도 성이 난 얼굴로 투덜거렸다.

“이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또 무슨 일 때문에 싸웠는데?”

묵용성은 말을 하지 않았다. 묵용린은 묵용청양을 바라보았다. 묵용청양도 대답을 하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금 의아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황형을 속이려 하는 것이냐?”

묵용성이 사봉봉을 좋아하는 건 딱히 비밀이 아니었다. 어릴 때 함께 놀았던 아이들은 대부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봉봉은 그를 동생처럼 여기는 것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묵용성은 지금까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적 없었다. 거절당하면 그의 체면이 영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 이 이야길 입 밖으로 꺼내는 것도 싫어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묵용청양이 화제를 돌렸다.

“황형, 아버지께서 황형이 고른 신붓감을 반대하시던데… 다른 여인으로 골라 주신 거예요?”

이런 일은 속일 수 없었기에 묵용린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사 장군의 장녀를 골라 주셨다.”

순간 묵용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부황께서 봉봉을 고르셨다고요?”

묵용린은 그의 말뜻을 오해했다.

“너도 그 여인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구나?”

묵용성은 암담한 눈망울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뇨, 봉봉은 좋은 여인입니다.”

묵용청양은 연민의 눈빛으로 아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께선 어찌 봉봉을 고르셨답니까. 그런 낌새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묵용린이 묵용청양에게 물었다.

“네 생각엔 사봉봉이 황후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누군가 반대하기만 하면 그는 다시 고려해 볼 생각이었다. 묵용청양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서 확신은 없지만, 어릴 때 모습 그대로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안목이 좋으시잖아요. 이 세상에서 황형에게 어울리는 여인은 아마 봉봉이 뿐일 거예요.”

묵용린이 물었다.

“어째서?”

“두 사람 다 강하니까요. 황형은 문무에 강하고 지혜로운 군주고, 봉봉은 똑 부러지는 성격에 어마어마한 상업 왕국을 이끄는 사람이니까요.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강자와 강자가 손을 잡는 셈이죠. 하지만.”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봉봉이 황후가 되려고 할지 잘 모르겠네요.”

묵용린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어째서 원치 않는단 말이냐? 짐이 조서를 내리기만 하면 사씨 집안의 모든 이들이 기뻐 어쩔 줄 모를 것이다.’

묵용청양이 고개를 저었다.

“황형, 그건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 이렇게 해 보죠. 제가 봉봉을 찾아가서 한번 떠볼게요.”

그녀가 묵용성에게 말했다.

“나랑 같이 갈래?”

묵용성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청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충격받은 묵용성의 모습에 묵용청양은 서둘러 그를 끌고 나왔다. 밖으로 나온 묵용청양은 묵용성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됐어. 봉봉이는 이제 그만 잊어. 이제 네 형수가 될 사람이라고.”

묵용성이 두 눈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황형은 봉봉을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혼인하지 않을지도 몰라.”

묵용청양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께서 황형의 일에 간섭하는 일이 극히 드물지만, 저렇게까지 말씀하실 땐 황형도 분명 아버지의 말씀을 따를 거야.”

묵용성이 말했다.

“봉봉은 분명 원치 않을 거야.”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어. 감히 성지를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녀가 다시 한번 아우의 등을 토닥였다.

“그렇게 풀 죽을 거 없어. 어차피 봉봉이가 널 좋아했던 것도 아닌데. 네가 이 혼사를 막는다고 해도 봉봉이가 너한테 시집올 것도 아니잖아. 괜히 봉봉이의 좋은 앞날을 방해하지 말고.”

묵용성이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

“아직도 나랑 더 싸우고 싶은 거야?”

“싸워도 소용없어. 어차피 이기지도 못하면서.”

묵용성은 고개를 홱 돌리며 더는 그녀와 말하려 하지 않았다.

“안 갈 거면 나 혼자 간다.”

묵용청양은 다시 그의 어깨를 힘껏 때렸다.

“괜히 사서 걱정하지 마!”

그 말을 남겨 둔 채 그녀는 곧장 자리를 떴다. 묵용성은 몇 차례 깊은 심호흡을 내쉰 뒤에야 겨우 멀어지는 그녀의 뒤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화가 나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이 황형에게 시집을 간다니……. 그는 앞으로 어찌 살아간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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