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5화
이야기를 마친 묵용청양이 밖으로 향하자 그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부황께서 네게 보내신다던 서신은?”
“아.”
묵용청양이 자신의 머리를 때리며 말했다.
“제일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네요.”
그녀는 품에서 서신을 꺼내 묵용린에게 건넸다.
“자, 여기요.”
묵용린이 황제가 된 지도 사 년이 흘렀다. 묵용성도 그 앞에서는 군신의 예를 다하는데, 묵용청양이 돌아오니 어째 영 모양이 나지 않았다. 꼭 다시 동궁의 황태자가 된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할 일을 마친 묵용청양은 가뿐하게 문을 나섰다. 몇 걸음 걷자마자 기둥 옆에 서 있는 월규를 발견했다. 그녀의 눈은 삽시간에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월규에게 와락 달려가 안겼다.
“월규 고고,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
황제와 공주가 모처럼 만에 이야기를 나누니 월규는 바깥에서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묵용청양이 품에 안기자 월규는 코가 시큰거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월규가 묵용청양을 어루만지며 거리를 조금 벌렸다.
“이 고고한테 얼굴 좀 보여 주세요. 세상에, 여인은 자라면서 열댓 번도 더 바뀐다더니! 아직 열여덟도 안 되었는데 이렇게 예뻐지셨습니까? 몇 년 더 지나면 얼마나 더 예뻐지시려고요?”
묵용청양이 입을 헤벌쭉 벌리고 바보처럼 웃더니 겸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떨지 않고 말했다.
“그땐 저희 어머니랑 비슷하겠죠.”
월규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릴 때와 달라진 것 없이 여전히 낯가죽이 두꺼웠다.
“공주께서 오신다는 말에 제가 공주의 궁전을 미리 정리해 두었습니다. 가서 보시지요. 부족한 게 있거든 이 고고가 곧장 채워 두라 이르겠습니다.”
“고고가 정리해 줬으니 분명 완벽할 거예요.”
그녀가 월규를 위아래로 훑으며 웃었다.
“고고, 옷차림을 보니 또 승진했네요?”
월규가 민망한 듯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펴며 말했다.
“황상의 은혜를 받아 일급 올랐습니다. 지금은 정3품 여관이지요. 집에 돌아갈 때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전부 절 부처님 보듯 공경한다니까요. 정말 민망해 죽겠습니다.”
묵용청양이 감격한 듯 말했다.
“고고, 정말 출세했네요.”
월규가 부끄러운 듯 묵용청양을 치며 웃더니 이내 질문을 건넸다.
“노야와 부인께서는 잘 지내시지요? 대총관께서 강남으로 내려가실 때 소인도 같이 가고 싶었는데 부인께서 막으셨잖습니까. 황상 곁을 잘 지켜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황상께서 대혼을 하시면 이제 중궁에 황후 마마께서 계실 테니, 소인도 관직을 내려놓고 강남으로 가서 부인을 모시고 싶습니다.”
묵용청양이 말했다.
“고고, 거긴 걱정하지 말고 고고는 여기서 잘 지내요. 아버지가 곁에 계시는데 어머니가 편치 않을 날이 있기나 하겠어요?”
“…….”
무슨 말이든 거침없이 내뱉는 것도 어릴 때와 똑같구나.
* * *
묵용린은 등불 아래에서 태상황의 서신을 읽고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미간이 점점 구겨지더니 마지막엔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열여섯부터 정사를 돌보았기 때문에 열여덟이면 응당 대혼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황후 책립은 너무 중요한 일이라 조급하게 처리하지 않고 제대로 고르고 싶었다.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심한 그는 마침내 마음에 드는 신붓감을 골랐다. 좌승상 허장우許長佑의 적장녀 허설령許雪伶이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용모에 성격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단아하고 고상하고, 글재주도 뛰어나서 이 나라의 어머니가 될 만한 기질이 다분했다.
묵용린이 허설령을 황후로 고른 것은 물론 좌승상 허장우 때문이었다. 허장우는 재능이 많고 슬기로워 조정에서도 제법 위엄을 가진 인물이었다. 묵용린이 황제가 된 이후에도 그는 많은 공적을 쌓으며 황제의 신임을 받는 중요한 대신이 되었다.
묵용린은 좌승상에게 가장 좋은 포상은 허설렁을 황후로 세워 허씨 가문에 무한한 영광을 안겨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 허장우가 변함없이 조정을 위해 힘쓸 것이 아니던가.
우승상 송회宋繪 또한 박대할 수 없었기에 그의 적장녀도 대혼 때 함께 궁으로 들여 귀비에 봉할 생각이었다. 우승상 송회는 허장우만큼 능력이 뛰어나진 않지만, 충심만큼은 허장우보다 뛰어났다. 두 승상이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견제도 하는 셈이었다.
두 승상의 세력이 비슷하여 서로 충돌할 것을 대비해 묵용린은 그의 은사인 양승해 대학사를 내각에 앉혔다. 삼자가 서로 대립하는 국면을 만든 것이다. 양승해는 욕심이 없는 인물이라 무슨 일이든 조정과 백성 모두에게 이로운 방향인지 판별했고, 어느 한쪽 편만 들지 않았다. 그 때문에 두 승상도 조정에서 큰 풍랑을 일으키지 못했다.
태상황이 황제로 있을 땐 혼인 관계로 신하들과 협력을 맺지 않았다. 하지만 묵용린이 따져 보니 역대 조정과 동월 주변 국가들을 통틀어 혼인으로 자신의 기강을 굳히지 않은 황제가 없었다. 수백 년간 이러한 제도가 이어져 왔기에 태상황의 상황은 매우 희귀한 경우가 아닐 수 없었다.
애당초 태상황이 천하를 다툰 것도 태후를 위해서였고, 훗날 선위한 것도 태후를 위해서였다. 태상황은 한평생 한 여인만 위해 사는 사람이었고 강산이나 사직 따위는 뜬구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역사에 길이 남는 좋은 황제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는 후궁을 만개한 꽃밭처럼 가득 채워야 했고 이를 통해 보이지 않는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했다. 그렇게 복잡한 선을 전부 다 손에 쥐고 있으면 쉽게 대세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황후와 귀비를 함께 궁에 들인 뒤, 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수녀 선발을 통해 천천히 후궁을 채워 갈 생각이었다. 그는 후궁에 골고루 은혜를 베풀어 묵용씨 성을 가진 후손들을 많이 낳아 동월 강산을 대대손손 굳건히 지킬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이 강성해지는 근본이 되리라 믿었다.
성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가 아무리 존귀한 황제라 해도 오랜 관습을 따라 부모의 명을 존중해야 했다. 비둘기 전서로 그의 뜻을 적어 태상황에게 보낸 뒤, 만수절만 지나면 대혼을 치를 생각으로 준비 중이었는데 태상황이 반대의 뜻을 밝힐 줄 누가 알았겠는가.
태상황은 곧장 전서구로 자신의 반대를 표명한 뒤, 여러 장에 걸친 긴 서신을 써서 묵용청양 편에 보내 왔다.
그는 어릴 때부터 늘 태상황의 말을 잘 들었다. 자신이 직접 정사를 돌봤지만 간혹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땐 태상황의 의견을 구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태상황이 그를 난처하게 했다. 승상의 딸은 반대하고 일개 장사꾼의 딸을 맞으라니. 그것도 그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사봉봉을.
묵용린의 기억 속에 사봉봉은 간사하고 교활했다. 온몸에는 역한 돈 냄새가 밴 게 황후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여인이 어찌 한 나라의 어머니가 되고 동월의 황후가 된단 말인가?
어째서 사봉봉을 고른 것인지 태상황은 서신에 상세하게 적어 두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씨 집안이 동월에서 제일가는 부자라는 것이다. 사봉봉을 황후로 들이면 곁에 화수분을 두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국고가 빌 때 사봉봉이 황후의 자리에 있다면 좌시하시만은 않을 거란 이유였다.
또 태상황은 처음 사가史家를 황상皇商으로 명할 때부터 이 계획을 염두하고 있다고 했다. 제 논에 물 대기라고, 사가의 장사가 커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묵용씨의 손에 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묵용린은 이 대목을 읽을 때 진심으로 그의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역시 아버지는 먼 곳을 내다보고 일찌감치 수를 둔 것이다. 사앵앵이 당시 황상皇商이 되었을 땐 아마 자신이 황제의 손아귀에 걸려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난처했던 건 태상황이 그가 속으로만 앓고 있던 고민을 알아맞혔기 때문이다. 그는 돈이 부족했다. 국고는 지금껏 풍족했던 적이 없었다. 지금의 동월은 국태민안하며 그 어느 때보다 번화하고 풍족해 보였지만, 사실 그는 대대적으로 세수를 개혁하여 잡다하고 과중한 세금을 면했고 대부분의 세금을 백성에게 사용했다.
여기에 지난 몇 년간 동월에 크고 작은 재난이 발생하여 구호금을 물 쓰듯 사용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국경 지역의 군수품과 급료도 필요했다. 동월의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들어가는 돈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가 황위에 오른 뒤에도 여전히 머나먼 황무지를 개간하여 대대적으로 수리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이를 통해 동월의 영토를 더 넓게 확장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업을 위해서 그는 돈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돈이 있어야 그가 꿈꾸던 태평성세의 강대국을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돈이 필요하고, 공교롭게도 사봉봉은 돈이 많았다. 태상황의 말은 그에게 돈을 봐서라도 사봉봉과 혼인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사봉봉과 동침을 한다는 생각만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고 구역질이 나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가 사봉봉을 싫어해서만은 아니었고… 말 못 할 그만의 사정이 있었다. 그는 줄곧 말 못할 병을 앓아 왔다. 어릴 땐 악몽을 꾸는 것이었는데 어렵게 버티다 남원으로 찾아가 여제를 화나 죽게 하니 악몽은 곧장 사라졌다.
그런데 여전히 병이 남아 있었다. 여인과 너무 가까워지지 못하는 것이 그의 또 다른 병이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곧장 속이 울렁거리고 구토를 할 것 같았다.
그가 남원에서 막 돌아왔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곁에 계시지 않아 진왕이 그의 황숙으로서 규방에서의 일을 가르치는 책임을 맡았다. 대혼 전에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새 신부에게도 비웃음을 사지 않는 법이었다.
진왕은 특별히 아주 예쁜 궁녀를 골라 묵용린의 침전으로 보냈다. 사내라면 필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니 묵용린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궁녀의 몸이 그에게 닿는 순간, 그는 속이 한바탕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고 결국 타구唾具(가래나 침을 뱉는 그릇) 옆에 쪼그려 앉아 왈카닥 구토를 했다. 놀란 진왕은 황급히 태의를 불렀다. 하지만 태의가 온 뒤로 그는 아무런 증세도 보이지 않았다.
진왕은 그의 증세가 방사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는 그 뒤로 두 차례 더 궁녀를 보냈는데,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더 이상 태의를 부르진 않았다. 이런 일이 알려지면 황제의 위엄이 실추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진왕은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일에는 조예가 깊었다. 반복되는 상황을 통해 그는 묵용린이 어떤 상태인지 결론을 내렸다. 분명 묵용린은 정상적이고 매우 건강한 사내가 틀림없었다. 여인과 살이 닿지 않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 세상에서 마누라를 가장 많이 얻어야 할 사내가 여인과 닿아선 안 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