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4화
“날 왜 몰라?”
그녀가 영안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다시 자세히 봐.”
영안은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몰라.”
옆에 있던 이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이보시오, 꾸물대지 말고 얼른 관청이나 데려가시오.”
묵용청양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영안, 나야. 나 청양이.”
“성이 청씨야?”
영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성이 청씨인 친구가 없는데.”
“청씨가 아니라 내 성은…….”
묵용청양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묵용씨는 오직 황실 가문에서만 쓰는 성이라 여기서 그녀의 신분을 폭로할 수 없었다.
“말해 보거라.”
점원이 성을 내며 재촉했다.
“성이 뭔데?”
묵용청양이 말을 하지 못하자 점원은 자신의 추측에 더욱더 확신을 가졌다.
“자신의 성도 말하지 못하는 걸 보니 분명 문제가 있군. 다들 길 좀 터 주시오. 관청으로 데려가야겠으니.”
묵용청양은 점원에게 끌려가면서도 팔짱을 낀 채 지켜보기만 하는 영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깊어지는 미소를 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이 자식이 그녀를 알아보고도 일부러 모른 채 한 것이다. 일! 부! 러! 친한 벗을 만났다는 기쁨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해 버렸다. 그녀가 발버둥을 치며 영안에게 악을 썼다.
“영안, 너 두고 봐!”
묵용청양이 멀어지자 영안이 옆에 있던 수하에게 말했다.
“저 여인을 뒤쫓아.”
수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안 형, 저 여인은 도둑이 아닙니까? 왜 쫓으란 거예요?”
영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둑보다 더 무서운 여인이야. 미리 대비해야 해. 임안 경계에서 사고가 나면 우리 둘 다 목이 날아갈 거라고.”
수하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그렇게 대단하다고요? 대체 누구인데요?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요. 아직 어린 여인인데요.”
영안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
그의 어린 시절 악몽이었던 그녀의 이름을 듣고 싶진 않았다. 냉철한 성격의 영안은 늘 무표정을 유지했다. 한데 수하는 자신들의 부문주副門主가 이 일로 다양한 표정을 짓자 이상하게 여겼다.
“안 형, 혹 저 여인과… 원한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영안이 코웃음을 쳤다.
“원한이 엄청나지.”
“부문주께 두고 보자고 하던데요.”
영안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어디 두고 봐야지”
그의 어린 시절엔 늘 묵용청양이 함께였다. 심지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두 사람은 서로 싸우기 바빴다. 철들기 전부터 철이 들 때까지 늘 싸웠다.
철들기 전엔 매번 그가 묵용청양을 이겼지만, 이긴 뒤에는 늘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이 나야 했다. 철이 든 뒤로는 아버지 때문에 저 계집애에게 눌려 얻어맞아야 했다. 그러면 아버지에게 혼이 나진 않았지만 몹시 굴욕적이었다. 차라리 신나게 이겨 버리고 아버지에게 맞는 게 더 나았다.
어쨌든 그는 크고 난 뒤로 어린 시절을 좀처럼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기억에 묵용청양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피눈물로 얼룩진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훨씬 나았다. 이제 그는 묵용청양의 괴롭힘에 반항하지 못하는 소년이 아니었다. 사 년이란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만, 많은 걸 바꾸기에 충분했다.
예전엔 그와 묵용청양의 키가 비슷했는데, 사 년 동안 그는 마디가 뽑히듯 껑충 자랐다. 조금 전 묵용청양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땐 그의 어깨 높이밖에 오지 않았다. 방금 그녀를 내려다볼 때는 왠지 모를 성취감마저 느껴졌다.
묵용청양의 뒤엔 뒷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뒷배는 머나먼 강남에 있지 않은가? 아무리 딸을 아낀다 한들 강남에선 도울 수 없었다. 영안은 이미 환경문幻鏡門의 부문주로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지금의 황상 또한 묵용청양을 아끼지만, 태상황 정도까진 아니니 이유를 불문하고 마냥 감싸 주려 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나이가 어려도 장래를 인정받아 부친과 조정에서 관직을 지냈다. 부친도 이제 더는 어릴 때처럼 그를 때리거나 혼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계산하던 영안의 입꼬리가 점점 더 높이 올라갔다. 어찌나 신나는지 눈가에 웃음까지 번진 상태였다. 묵용청양,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보자!
* * *
묵용청양은 그들에게 끌려 관청으로 향했다. 문턱을 넘는데 누군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방금 그녀에게 누명을 씌운 그 도둑이었다. 그녀는 화가 나서 앞으로 걸어가 그를 발로 찼다.
“이런 뻔뻔한 놈, 왜 날 모함한 거야?”
부지사 대인은 수년간 관직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안중에 두지 않는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자신이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함부로 사람을 발로 차다니. 유심히 살펴보니 얼굴도 어여쁜 아가씨였다.
그의 불쾌함이 무의식중에 절반은 날아가 버렸다. 게다가 영 대인이 분부도 내렸겠다…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묵용청양의 무례는 무시한 채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다들 조용히 하게. 사건의 자초지종은 본관이 이미 명확히 파악하였다. 도둑은 이미 이 아가씨와 한패가 아니라고 자백했다. 이 아가씨에게 돈주머니를 넘겨 뒤를 쫓아오는 무리를 막고 그 틈에 도망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아가씨는 무고하다.”
그의 말에 묵용청양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백성들은 무지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리들은 무지하지 않아 그녀의 결백을 알아 주었다. 그녀는 황형을 만나면 이곳 관리들 칭찬을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지사의 말에 묵용청양을 끌고 왔던 이들은 다들 민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이 얼굴을 붉히고 사과하자 화통한 묵용청양은 이대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녀의 마음속엔 오직 다른 이의 빚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황형을 만나면 반드시 일러바칠 것이다.
* * *
불쾌한 소동 덕에 묵용청양은 의로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당장 황궁으로 날아가 황형에게 이 일을 고자질하고 싶을 뿐이었다.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린 끝에 그녀는 다음 날 석양이 질 때쯤 성문에 들어섰고, 한달음에 입궁했다.
황매를 만났으니 묵용린도 크게 기뻐했다. 늘씬한 묵용청양의 모습을 본 그는 여동생이 잘 자라 주었다는 생각에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어릴 땐 명성이 그리 좋진 않았지만, 지금 보니 제법 요조숙녀인 것이 동월의 장공주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방 안에 수십 마리의 꾀꼬리가 날아든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목소리는 예뻤지만,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재잘댔다. 그가 몇 번이나 끼어들려 했으니 그녀의 다급한 말에 끼어들 수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입을 열지 않으면 제법 존귀한 장공주답더니… 입을 여니 여전히 귀신도 무서워하는 묵용청양이었다. 다행히 영안이 찾아와 그를 구해 주었다.
묵용청양은 이곳에 오면서 있었던 일들을 끝까지 읊어 준 다음, 영안의 죄목을 고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영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묵용청양은 영안을 보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영안, 너 마침 잘 왔다. 내가…….”
영안은 당황하지 않고 그녀에게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정말 장공주 전하이셨군요. 영안이 몰라뵈었습니다. 용서해 주시지요, 공주.”
묵용청양은 멍한 얼굴로 바라보다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가 지금 잘못을 인정했다고 내가…….”
“신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영안이 꽤 진지한 모습으로 사죄했다.
“장공주 전하께서 이렇게 아름다워지시다니… 신은 다른 이가 나쁜 마음을 먹고 전하 행세를 하려는 줄 알았습니다. 신이 무능하여 감히 전하라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
예쁘다는 칭찬을 들으면 누구든 기분 좋기 마련이었다. 특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안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으니 묵용청양은 꽤 즐거웠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예뻐져서 영안이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
게다가 어릴 때 그렇게나 친했던 영안이 설마 그녀인 걸 알고도 도와주지 않았을 리 있겠는가? 그녀는 영안을 유심히 관찰했다. 영안이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뒤가 켕기진 않아 보였다. 그녀는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역시 영안은 어릴 때랑 똑같이 올곧구나!
“됐어, 내가 너무 변해서 순간 못 알아본 거니까. 더는 문제 삼지 않을게.”
묵용린은 싸늘한 시선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추측하건대 영안이 묵용청양을 만나고도 모르는 척한 듯했다. 사실 묵용청양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어릴 때부터 영안이 가엾다고 생각했다.
묵용청양이 영안과 노는 걸 좋아해서 졸지에 계집애와 싸우는 상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내들은 사내들끼리 서로 싸우며 자라는데 영안만 계집애와 싸우며 자랐다. 늠름한 사내가 된 그에게 옛일은 잊고 싶은 과거가 되었다.
묵용린도 속으로 영안을 연민했다. 설령 두 사람 사이에 작은 갈등이 있었다고 한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묵용청양의 성격상 억울한 일이 생겼다고 한들 그리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영안도 분수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영안이 떠나자 묵용청양이 하품을 했다.
“황형, 계속 뛰어왔더니 조금 졸리네요. 전 궁전에 돌아가서 좀 쉴 테니 어선을 차리면 그때 불러 주세요.”
그러다 별안간 묵용성이 떠올랐다.
“성이는요? 누이가 왔는데 왜 마중도 안 나오는 거예요?”
묵용린이 말했다.
“성이는 네가 오는 걸 모른다. 지금은 별원에 있어서 짐이 인편으로 서신을 보냈다. 아마 내일쯤 올 거다.”
묵용청양이 물었다.
“성이도 키 많이 컸죠?”
“그래, 좀 컸다.”
묵용청양이 영안의 키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영안만큼 커요?”
“그 정도는 아니다.”
묵용청양은 마음을 놓았다. 묵용성 앞에서는 자신의 권위가 그리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방금 영안 앞에 섰을 땐 왠지 모르게 위압감이 느껴졌다. 영안의 키가 너무 커서 고개를 들고 얘기해야 하니 적응이 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그녀는 황제 앞으로 다가가 자신과 키를 비교했다.
“황형도 키가 많이 컸네요. 예전엔 내가 황형 귀까지 왔었는데 이젠 겨우 어깨에 닿아요.”
그녀가 그의 팔을 툭툭 치며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많이 컸네요.”
“…….”
이 계집은 자신이 황제가 됐다는 걸 까먹기라도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