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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33)화 (1,033/1,192)

제1033화

묵용감과 백천범은 그녀를 대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묵용청양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말에 오른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떠났다.

그녀는 예전부터 강호를 떠돌 땐 시종을 한 명도 데리고 다니지 않고 혼자 말을 타고 떠날 거라고 얘기해 왔다. 그래야 협녀답지 않겠는가. 시녀와 하인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건 세상을 유람하는 할 일 없는 자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녀는 나약한 여인이 아니었기에 자기 자신은 얼마든 혼자 지킬 수 있었다.

동쪽 성문을 나온 그녀는 줄곧 북쪽으로 말을 달렸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녀는 한 마을에 멈춰 객잔을 찾았다. 말을 묶고 천천히 걷던 그녀는 길가의 객잔을 둘러보는 척 곁눈으로 뒤쪽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역시 미행을 당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미행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전혀 의식도 하지 못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런 것에 익숙했다. 사실 아버지가 그녀에게 암위를 붙일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절대 동의할 순 없었다. 세상으로 나가 직접 부딪혀 보라고 했으면서 지켜 줄 사람을 뒤에 붙여 두다니, 그게 대체 뭐란 말인가! 그녀는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도성까지 갈 것이다. 암위 따위는 필요 없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괜스레 저들에게 경계심을 키우느니 따라오게 내버려 두었다가 난강瀾江을 건널 때 손을 쓰고 싶었다.

그녀는 가벼운 차림새였다. 허리춤에 패검을 찬 게 제법 강호의 협녀 같기도 했다. 여자 혼자 다녔지만 가까이 와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묵용청양은 적당한 식당을 찾아 자리에 앉고 음식 몇 가지와 술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자 그녀는 술을 곁들여 태연하게 밥을 먹었다. 주위에 있던 이들이 자꾸만 그녀를 곁눈질했다. 분명 아직 어린 소녀인데 세상 물정에 훤한 사람처럼 허세를 부리다니, 그들의 눈엔 우습기 짝이 없었다.

영십구는 맞은편 가게의 복도 기둥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술을 마시는 건 걱정되지 않았다. 태상황이 공주의 주량을 늘려 주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취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젠 취해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따금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장정 몇 명이 취해 바닥을 나뒹굴 때도 그녀는 그저 얼굴만 붉힐 뿐 꼿꼿이 자리를 지켰다.

동월은 지금 태평성세인 나날이 이어졌기에 먼 길을 떠나는 것도 그리 위험하지 않았다. 공주가 무사히 황상을 만날 때까지 뒤따르면 그들도 성공적으로 임무도 완수할 수 있었다. 다만 공주를 암암리에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만약 공주에게 발각된다면 참혹한 말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며칠간 평온한 날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난강에 도착했다. 묵용청양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널 예정이었다. 난강항은 매우 번화한 곳이었다. 여객용 배보다는 화물용이 훨씬 더 많았다. 남북을 오가는 화물은 전부 이 수로를 지나야 했다. 몇몇 상인은 아예 이곳에서 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점점 교역이 이루어지는 항구로 변하기 시작했고 장사꾼들도 이곳으로 몰려와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차와 간식, 수박, 복숭아, 부채, 우산, 보자기, 연지, 분첩, 지팡이, 방수포 등등… 없는 게 없었다. 여기저기서 호객꾼들이 목청을 높여 소리치는 바람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여객용 배는 일렬로 죽 늘어서 있었다. 사공들을 대부분 무공이 뛰어난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선수에 서서 큰소리로 손님들을 끌어모았다. 끊임없는 호객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묵용청양은 부두를 배회했다. 어느 배를 타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영십구는 조용히 묵용청양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그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배를 고르면 그때 다시 뒤를 밟을 생각이었다.

얼마 뒤, 어느 배 한 척에 승객이 가득 찼다. 사공은 더 탈 사람이 없는지 몇 차례 소리를 지른 뒤, 동료들과 노를 저어 배를 부두에서 멀찍이 떨어뜨렸다. 묵용청양은 점점 더 넓어지는 물길을 빤히 바라보다 별안간 몸을 날려 배에 가뿐히 착지했다. 배에 뛰어들자마자 그녀는 숨 가쁘게 사공에게 소리쳤다.

“사공 오라버니, 어서 가요. 나쁜 사람이 절 잡으러 와요.”

사공은 예쁘고 어린 여인의 말에 곧장 노를 힘껏 젓기 시작했다. 몇 번의 노질 만에 배는 부두에서 제법 멀리 떨어졌다.

영십구는 그제야 자신이 진작에 묵용청양에게 발각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묵용청양을 잡아야만 임무를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두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몸을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가까스로 물가에 다다랐지만 배는 이미 멀찍이 떨어진 뒤였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기에 필사적으로 수영을 하면 분명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배에 타고 있던 묵용청양이 황급히 소리쳤다.

“어서 저자를 막아요. 아주 나쁜 사람이에요. 절 잡아서 환갑이 넘은 자한테 첩으로 보내려 한다고요!”

잔꾀 많은 묵용청양은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그 말에 배에 타고 있던 이들은 곧장 영십구에게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다. 사공들은 장대를 휘두르며 그가 헤엄쳐 오지 못하게 뭍으로 내쫓았다.

가엾은 영십구는 사공들의 대나무 장대에 몇 대 얻어맞고는 영 힘을 쓰지 못했다. 얻어맞는 것쯤이야 상관없었지만 점점 멀어지는 묵용청양의 모습에 화가 잔뜩 나기 시작했다. 그가 수면 위에 주먹을 내리치자 큰 물보라가 일었다. 그의 얼굴에 물보라가 끼얹어졌다.

* * *

난강을 건너 위수강까지 무사히 건너온 묵용청양은 앞으로 자신의 여정이 순조롭지만은 않길 바랐다. 순탄하면 영십구가 또다시 자신을 쫓아온 셈일 테니 말이다. 영십구가 따라붙으면 그녀에게 해코지를 하는 나쁜 놈들을 암암리에 해결하니 그녀가 할 일이 없었다.

이제 곧 임안 경계에 다다를 테다. 한데 이 기나긴 일정이 그녀에겐 몹시 따분했다. 그녀가 힘을 쓸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수강을 넘으니 몇 년 만에 부드러운 강남 말씨가 아닌 투박한 고향의 말씨가 들려왔다. 묵용청양은 친근한 마음이 들었다. 강남에서 지내는 동안 그 지역의 부드러운 어조까지 배우진 못했다. 어머니는 늘 그녀의 말투가 너무 호탕하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자고로 협녀란 성격이 호탕한 법이니 말투도 호탕해야 더 잘 어울릴 터.

도성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서둘러 길을 재촉하고 싶지도 않았다. 도성에 도착하기 전에 재미있는 일이라도 마주쳐서 그녀 힘으로 의롭게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걷고 있는데 별안간 뒤에서 분주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터벅터벅 걷고 있었는데 누군가 그녀의 팔을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소리쳤다.

“어서 도망쳐, 저들에게 잡히면 안 돼!”

묵용청양은 영문도 모른 채 그와 함께 달려가며 물었다.

“넌 누구야? 우리 아는 사이야? 누구한테 잡히면 안 되는데?”

그는 손을 놓더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혼자 앞으로 달려갔다. 묵용청양은 자리에 멈춰서 그자의 뒤통수에 대고 중얼거렸다.

“왜 저래.”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한쪽으로 물러나려 했지만 뒤따라오던 이가 그녀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얘야. 둘이 한패거든.”

묵용청양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점원 차림을 한 사내였다. 한 손으로는 그녀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허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뒤에선 키가 작고 뚱뚱한 사내가 나와 그녀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내 돈주머니!”

백성들은 하나둘 주변으로 모여들며 쑥덕댔다.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가 도둑이라니!”

“얼굴이 예쁠수록 더 얕보면 안 된다니까.”

“나이도 많지 않은 거 같은데 능구렁이로구나. 너한테 주머니를 넘기면 숨길 수 있을 것 같더냐?”

“어서 말해, 네 패거리는?”

묵용청양은 난생처음 겪는 난처한 일이었다. 의롭게 남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자신이 도둑으로 몰리다니? 고개를 숙이니 아니나 다를까 허리춤에 돈주머니가 묶여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주머니를 풀러 키 작은 뚱보에게 건넸다.

“전 도둑 아니에요. 저자가 제 허리에 걸어둔 거라고요.”

점원이 말했다.

“그놈이 어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허리에 걸어 둔단 말이야? 너희가 한패니까 그런 거지.”

“전 도둑 아니거든요?’

그녀가 해명을 늘어놓았다.

“전 정말 아니에요. 못 믿겠으면 그자를 잡아 와서 대질이라도 해 보시든가요.”

“이미 도망쳤는데, 뭘. 아가씨만 남겨 두면 우리가 포기할 줄 알았나 보지? 가자, 관청에 가서 따져야겠으니.”

묵용청양은 관청만은 가고 싶지 않았다. 관청에서 그녀의 소지품을 조사하다 보면 신분이 바로 드러날 테다. 그녀는 이 일이 아버지 어머니 귀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도둑으로 몰려 관청에 끌려가다니… 도무지 면이 서지 않았다. 그녀가 중재를 시도했다.

“돈주머니도 돌려 줬는데 그냥 이쯤에서 끝내죠. 관용을 베풀 수 있을 땐 너그럽게 용서해 줘야지요.”

“하, 도둑이 말솜씨 하나는 고상하구나. 안 돼. 꼭 관청에 가야 한다. 이번에 놓아 주면 다음에 또 훔쳐 갈 테니까.”

“맞아. 도둑이 도둑질을 그만한다는 말은 내 들어 본 적이 없어.”

묵용청양도 이들이 본 것만 믿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차라리 도망치는 게 나을 것 같았지만 주변을 보니 백성들이 너무도 많았다. 울타리처럼 많은 이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녀는 사리에 밝은 사람을 찾아 이야기를 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누군가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녀가 아는 얼굴이었다. 마침 그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늘한 눈매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그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냉랭한 분위기를 풍길 뿐만 아니라 다른 기질마저도 매우 닮은 자였다.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그녀는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녀의 소꿉동무, 영안이었다. 그녀가 기뻐하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영안, 나야. 나 돌아왔어.”

하지만 영안은 담담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난 네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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