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2화
양자는 아픈 귀를 만지작거리더니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며 투덜거렸다.
“그저 잠깐 가지고 놀려고 했던 거라고. 나도 돌려주려고 했어.”
묵용청양이 냉소를 지었다.
“내가 널 찾아오지 않았다면 넌 아마 돌려주는 것도 잊어버렸을걸.”
양자는 멋쩍은 표정으로 몇 차례 눈동자를 굴리더니 묵용청양에게 아부를 떨었다.
“청양 누이, 며칠 못 본 사이에 손에 힘이 더 좋아졌다. 귀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어.”
묵용청양이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 누이가 그간 허투루 훈련한 게 아니거든. 며칠 전에 우리 아버지가 또 새로운 초식을 알려 주셨는데, 위력이 엄청나. 기회가 되면 내가 가르쳐…….”
양자가 입꼬리를 움찔거리며 더 빠르게 걸어갔다.
“얼른 가자. 보나 마나 세교 그 계집애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을걸.”
묵용청양은 양자와 무술 연습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양자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가자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접고 그 뒤를 따랐다.
세교네 집에 도착하니 역시나 세교는 울고 있었다. 양자는 조금 언짢은 기색으로 돌멩이를 탁자에 던지며 말했다.
“자, 주면 되잖아. 계집애들은 왜 그렇게 맨날 우냐, 귀찮게…….”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묵용청양이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말을 해도 참, 다시 해!”
양자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세교야, 울지 마. 이거 돌려줄게.”
묵용청양이 말했다.
“사과.”
양자가 묵용청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묵용청양이 말했다.
“사과를 누구한테 하는 거야?”
양자가 세교를 향해 허리를 살짝 굽히며 말했다.
“미안해.”
세교는 코를 훌쩍이며 양자를 향해 눈을 희번덕이며 돌멩이를 유심히 살폈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살핀 뒤에야 세교가 코웃음을 쳤다.
“청양 언니가 아니었으면 돌려주지도 않았겠지.”
이내 고개를 들어 묵용청양에게 말했다.
“청양 언니, 고마워.”
“고맙긴. 이런 일은 언니한테 말만 해. 언니가 다 해결해 줄게. 그런데.”
묵용청양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주머니는 안 계셔?”
“어머니는 이모 댁에 가셨는데. 무슨 일 있어?”
“아냐.”
묵용청양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지난번에 아주머니가 주신 무절임이 맛있다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만드는 건지 여쭤보려고 했지.”
세교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부인 입맛에 맞으시다니 너무 잘됐다. 언니, 잠시만 기다려.”
그녀는 부엌으로 달려가 큰 단지에서 무절임을 한 그릇 담아 와서는 묵용청양에게 건넸다.
“이거 가져가서 부인께 드려. 부족하면 또 오고. 부인께서 좋아하시는 걸 아시면 어머니도 분명 기뻐하실 거야.”
묵용청양도 사양하지 않고 웃으며 그릇을 받았다.
“고마워.”
세교가 말했다.
“부인과 노야께서 우리 집에 은혜를 베푸셨는데… 겨우 이런 게 뭐라고.”
묵용청양은 그릇을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양자가 그녀 곁을 따라오더니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청양 누이, 난 누이가 의로운 마음으로 세교를 돕는 줄 알았는데, 그냥 무절임 때문이었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묵용청양이 양자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이 누이는 당연히 의로운 마음에서 도운 거지. 무절임은 그냥 간 김에 받아 온 거고.”
양자가 엉덩이를 두드리며 작게 투덜거렸다.
“걸핏하면 발로 찬다니까. 그래 가지고 어떻게 시집갈래?”
두 사람은 골목 끝에서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대문 앞에 서서 거리를 둘러보던 학평관은 묵용청양의 모습을 보곤 곧장 앞으로 다가갔다.
“세상에,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소인이 십구를 보내 막 찾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저를 왜 찾아요?”
묵용청양이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드실래요?”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르자 학평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바깥 음식은 아무거나 드시면 안 됩니다. 누가 준 것입니까?”
“세교네 집에서 가져온 거예요. 어머니가 아주 좋아하시거든요.”
묵용청양이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학 어르신, 전 왜 찾으신 거예요?”
“소인이 아니라 노야께서 찾으십니다.”
아버지가 찾는다는 말에 묵용청양은 발걸음 가볍게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녀가 발을 걷고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가자 문발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그녀가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던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다 큰 애가 어찌 그리 고양이처럼 뛰어다니는 거니. 아가씨다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네.”
묵용청양이 백천범의 비위를 맞추며 그릇을 내밀었다.
“어머니, 이것 좀 드세요.”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딸이 어찌 아가씨답지 않단 말이오. 보시오, 당신에게 주려고 음식을 가져오지 않았소. 딸은 마음에 쏙 드는 솜옷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군.”
묵용청양이 무절임 한 조각을 들고 묵용감의 입에 넣어 주었다.
“아버지도 드세요.”
“…….”
시큼한 맛이 입안에 퍼졌지만, 딸의 효심이 담긴 것이기에 그는 뱉지도 않고 삼켰다.
“아, 아버지. 학 어르신 말이 아버지께서 절 찾으셨다면서요?”
“그래, 일단 앉거라.”
묵용감이 말했다.
“네게 맡길 일이 있다.”
묵용청양은 탁자 앞에 앉아 절인 무를 먹으며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네 오라비가 벌써 스물이 되었으니 혼인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네 오라비 말로는 자기가 알아서 신붓감을 골랐다는데… 이 아비는 마음에 차지 않는구나. 해서 서신을 보내려 한다. 네가 그 서신을 가져가서 꼼꼼히 잘 읽어보라고 하거라. 그 애는 이 서신을 보면 아비의 뜻을 이해할 거라고 믿는다.
서신을 전한 뒤엔 급히 돌아올 것 없다. 린아와 성아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같이 놀며 시간을 보내거라. 네 오라비가 대혼을 올리거든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오고, 돌아오고 싶지 않으면 도성에 남거라. 이 아비와 어미는 걱정할 것 없다.”
묵용감이 자애로운 손길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도 이제 컸으니 세상 구경 좀 해야지.”
묵용청양은 너무 기쁜 나머지 하마터면 깡충깡충 뛰어오를 뻔했다. 역시 세상에서 그녀를 가장 잘 이해하는 건 아버지뿐이었다. 오라버니와 아우를 만나는 것도 좋지만, 그녀가 가장 기다렸던 건 직접 나가 세상과 부딪치는 것이었다! 이제 나도! 강호를! 떠돌 수 있다!
묵용청양은 존귀한 공주지만 정작 자신의 신분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강호를 떠돌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공주라는 사실을 잊을 때도 많았다. 고귀한 공주가 아닌 의협심 강한 여자 협객으로 명성을 날리고 싶었다!
작년부터 그녀는 줄곧 강호를 떠돌고 싶다고 말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녀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그 요구를 묵살했다.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 그녀는 한동안 시무룩하게 지내야 했다. 그런데 마침내 두 분이 떠나도 좋다고 허락한 것이다. 그녀에게는 어마어마한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무사히 오라버니한테 전해 줄게요.”
“그래.”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길에 몰래 서신을 뜯어 봐선 안 된다.”
그녀는 파도가 치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대답했다.
“안 봐요. 절대 안 봐요.”
“노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서신을 늦게 전해 주는 것도 안 된다. 네 오라버니의 혼사 전에 일찌감치 전해 주거라.”
이번엔 꼭 모이를 쪼아 먹는 병아리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절대 늦지 않을게요. 아버지, 전 언제 출발하면 돼요?”
“언제 떠나고 싶으냐?”
“빠를수록 좋죠. 지금 당장 짐부터 챙길까요?”
묵용감은 잔뜩 흥분한 딸의 모습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이대로 떠나면 다신 돌아오려 하지 않겠지? 그는 조금 후회가 되었다.
“조급하게 굴 것 없다. 며칠 뒤에 떠나거라.”
“그러다 오라버니가 혼인을 올리겠어요.”
묵용청양이 말했다.
“아버지, 제가 늦으면 아버지 맘에 안 차는 며느리를 들일 수도 있잖아요. 그럼 어떡해요? 동월의 황후가 될 사람인데… 절대 소홀히 해선 안 되죠.”
묵용감은 후회막심했다. 분명 이 계집은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이니 어쩌겠는가? 지금은 황제가 아니지만,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황 노야인 것을. 백천범이 어찌 그의 마음을 모를까. 그러나 이번 일은 늦어지면 안 되는 일이었기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늦는 것보단 일찍 가는 게 나으니 빨리 출발하는 게 좋겠어요. 린아의 혼사가 더 중요하니까요.”
그녀가 묵용청양에게 말했다.
“가서 짐부터 싸렴.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걸로 하고.”
“네!”
묵용청양은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곤 밖으로 재빨리 달려나갔다. 묵용감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 떠난다는 말에 부모도 다 잊었나 보오.”
백천범이 놀리듯 물었다.
“아이고, 이제 컸으니 세상 구경 좀 하라고 한 게 누군데요. 왜요, 아쉬워요?”
묵용감은 조금 민망했다.
“어쩐지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오.”
“그럴 리가요. 당신 딸이니 당신도 잘 알잖아요.”
백천범이 위로를 건넸다.
“밖에서 고생 좀 하다 보면 집이 얼마나 좋았는지 깨달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구려.”
“이제 이런 거에 익숙해져야 해요. 언젠가 청양이도 시집을 갈 텐데… 설마 데릴사위를 들일 셈이에요?”
“그렇소. 안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오. 성아는 도성을 떠나려 하지 않으니 우리 곁에 남은 자식은 청양밖에 없소. 그러니 데릴사위를 들이면 얼마나 좋소?”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린아의 혼사는 당신이 정했으니 청양이와 성아의 혼사라도 그 애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둬요.”
* * *
다음 날 아침, 묵용청양은 아침밥을 야무지게 먹고선 짐을 챙겼다. 그녀는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백천범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밖에 있을 땐 항상 자신을 잘 돌보렴. 매번 남을 걷어차는 습관도 좀 고치고. 안 그럼 네가 더 고생할 거야.”
묵용청양이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그건 유전이래요. 아버지가 남들 가슴팍을 걷어차는 것처럼 저도 그런 거라고요!”
묵용감은 가슴 저 밑에서 끓는 슬픔을 열심히 억눌렀다.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걱정이 되고 애가 타 정말 괴로웠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백천범 말처럼 묵용청양은 어릴 때부터 자아도취에 빠져 두려움을 모르며 컸다. 이번 기회에 세상살이가 얼마나 각박한지 알려 주는 게 청양에게도 좋을 것이다.
묵용감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몇 마디 당부를 하려 했다. 하지만 입을 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지는 바람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는 결국 눈물이라도 보일까 봐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그만 떠나라는 인사를 했다. 묵용감과 편히 지내는 묵용청양은 배시시 웃으며 그의 팔을 안았다.
“아이참, 아버지. 제가 다신 안 오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러세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좋은 술을 사다 드릴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