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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31)화 (1,031/1,192)

제1031화

열여섯이 된 묵용린은 어려서부터 부단히 단련한 끝에 무슨 일이 생겨도 담담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구가 전한 선위서를 받아 들었을 때도 안색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그는 잠시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부황과 모후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적잖이 불안했다. 모후의 얼굴을 어찌 봐야 할지 몰랐다. 한데 이렇게 큰 강산을 그에게 맡기고 유유자적한 삶을 위해 떠나겠다니.

물론 일찌감치 태자 홀로 나랏일을 돌보긴 했지만, 그건 황제가 위에서 그를 이끌어 주었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그의 든든한 기둥이었다. 황제가 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안심이 됐고 두려울 게 없었다. 그랬던 황제가 임안을 떠나겠다니, 만약……. 그가 영구에게 물었다.

“혹 내가 남원에 갔던 일 때문에…….”

영구가 고개를 저었다.

“전하, 그리 고민하실 것 없습니다. 선위서는 폐하께서 떠나기 전에 신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 북쪽 국경에 위험이 사라졌으니 폐하께서도 편안히 물러나시려는 것이겠지요. 양승해 대학사가 전하의 즉위식을 주관할 것입니다.”

줄곧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묵용청양과 묵용성은 긴장한 얼굴로 그 대화에 집중했다. 그러다 갑자기 묵용청양이 묵용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매, 황형께 감축 인사드립니다. 경하드립니다, 황형!”

묵용린이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일어나거라.”

묵용청양이 손을 뻗었다.

“이렇게 기쁜 일에 황형께서 응당 동생에게 용돈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속 보이는 묵용청양의 말에 묵용성이 혀를 차더니 조용히 묵용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제, 황형께 감축 인사드립니다. 경하드립니다, 황형! 신제는 용돈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묵용청양이 자신의 아우를 흘겨보며 말했다.

“왜 훼방을 놓고 난리야? 용돈 받으면 한 푼도 안 줄 줄 알아.”

“필요 없어. 황형이 즉위하는 건 만백성의 복이니까. 황형, 전 일 년 치 용돈을 기부해서 사원에 향불을 올리고 싶어요. 황형이 역사에 길이 남을 좋은 황제가 될 수 있게 해 달라고요.”

“네 기도 따위 없어도 황형은 역사에 길이 남을 좋은 황제가 될 거야.”

묵용린은 동생들까지 싸우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가 한 손에 한 명씩 들어 올리며 말했다.

“되었다. 다들 나가거라. 이 황형은 영 대인과 상의해야 할 일이 있으니.”

퍼뜩 정신을 차린 묵용청양이 영구에게 물었다.

“영 대인, 어머니 아버지가 저더러 같이 가자는 말씀은 없으셨어요?”

“말씀하셨습니다. 청양 공주와 성 전하께서 함께 가고 싶으시거든, 신에게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강제는 아니니 두 전하께서 결정하시면 됩니다.”

묵용청양이 기뻐하며 깡충거렸다.

“갈래요, 갈래요. 당연히 가야죠. 어머니 아버지께서 강남으로 가신다고요? 전 아직 강남에 가 본 적 없는걸요. 월규 고고 말로는 풍경도 아름답고 맛있는 것도 많대요. 영 대인, 그럼 언제 떠나요?”

영구는 그런 묵용청양의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당연히 빠를수록 좋지만, 서둘러 떠날 필요는 없습니다. 공주께서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시니 신이 날짜를 정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영구가 고개를 돌려 묵용성을 바라보았다.

“성 전하께서도 가실 겁니까?”

묵용성은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부황과 모후께서 강남에 정착하시면 황족이라는 신분은 숨기는 것이죠?”

“물론이지요.”

“만약 누군가 두 분을 업신여기면 어찌해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신이 폐하와 마마, 전하들을 지킬 자들을 파견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제 신분을 모른다면 절 존경하지도 않겠죠?”

“그건…….”

묵용청양이 끼어들었다.

“모후께서 말씀하셨잖아. 신분으로 남을 억압할 생각 말고 품성으로 존경받으라고 말이야.”

묵용성이 눈을 희번덕이고는 다시 영구에게 물었다.

“부황과 모후께서 사실 집은 큰가요?”

영구가 말했다.

“신이 알기로는 그리 크진 않고, 삼중 정원이 있는 저택으로 알고 있습니다.”

묵용성이 입을 들썩거리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작다고요? 영 대인의 집보다도 더 작네요!”

영구가 소리 없이 웃었다.

“폐하 덕분에 신은 도성에서 제법 큰 저택에서 살고 있지요.”

묵용청양은 갈팡질팡 고민하는 동생을 보니 짜증 나서 눈을 부릅떴다.

“갈 거야 말 거야. 딱 정해. 그렇게 우유부단해서 앞으로 어쩔 거야!”

묵용성이 수줍은 얼굴로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황형이 즉위하면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이 아우가 어찌 모르는 체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이 아우는 여기에 남아서…….”

묵용청양이 눈을 희번덕였다.

“핑계 대지 마. 넌 그냥 부귀영화를 탐하는 거야. 됐어. 네가 안 가면 더 좋지. 어머니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은 이제 다 내 거라고!”

묵용성은 모후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묵용청양은 바쁘게 밖으로 나갔다.

“난 짐을 챙기러 가 볼게요. 영안한테 작별 인사도 해야 하고요.”

* * *

영안은 멍한 얼굴로 묵용청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위아래로 부딪히는 모습만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묵용청양은 많은 말들을 했지만 정작 그는 한 문장밖에 듣지 못했다.

“영안, 난 강남에 갈 거야. 돌아온다고 해도 아마 아주 먼 얘기겠지…….”

그 뒤로 이어진 말은 전혀 듣지 못했다.

“…나중에 짬이 나거든 나 보러 강남에 놀러 와. 우리 같이 배 타고 연방 따자. 거기선 누에고치도 키울 수 있어. 강남은 미꾸라지도 엄청 많대. 네가 오면 우리 같이 잡으러 가자. 난 네가 보고 싶을 거야. 너도 내가 보고 싶겠지?”

묵용청양은 자신이 한 말에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시울을 붉혔다. 영안이 아무 말 없이 바보처럼 서 있자 그 역시 몹시 슬프다고 생각한 묵용청양이 어깨를 토닥였다.

“속상해하지 마. 몇 년 후엔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영안은 그녀의 토닥임에 정신을 차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제발 돌아올 생각하지 마. 앞으로 백 년 안에 내가 널 보고 싶어 할 일은 없으니까.’

그는 속마음을 꾹 삼키고 물었다.

“언제 가는데? 바래다줄게.”

이 역신疫神이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지 않으면 마음이 놓일 것 같지 않았다. 묵용청양은 크게 감동했다.

“너희 아버지한테 물어봐. 영 대인이 날 데려다준다고 했거든. 내가 가는 게 슬프면 너도 강남에 와서 잠깐 놀다 가.”

영안이 입꼬리를 움찔거리다 대답했다.

“그리 신경 써 주시는 건 고맙지만… 어머니 혼자 집에 계시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성 밖까지만 바래다줄게. 멀리는 못 가.”

“그래. 넌 항상 효심이 깊지.”

묵용청양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겠어. 성 밖까지만 바래다줘.”

* * *

묵용청양이 떠나는 날은 날씨가 흐리고 바람도 거셌다. 뿌연 날씨 탓에 유독 슬픈 분위기를 자아냈다. 기홍은 영구에게 청양공주를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했다. 백천범을 생각하니 기홍은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졌고, 영구는 조용히 그녀를 위로했다.

가동 부부와 사장풍 부부도 아이들을 데려와 청양공주를 배웅했다. 그들은 묵용청양을 에워싸고 한참이나 조잘거리며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중에서도 사금언이 가장 아쉬워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는 묵용청양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청양 누이, 좀 더 크면 꼭 누이를 보러 갈게요.”

사봉봉이 묵용청양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착한 우리 청양 동생, 보고 싶을 거예요.”

가난청은 어리지만, 어른스러웠다.

“청양 누이, 태상황과 태후 말씀 잘 듣고, 두 분께 효를 다하셔야 합니다.”

가소타 역시 말을 보탰다.

“청양 언니, 나도 무술 열심히 연습해서 나중에 언니처럼 대단한 사람이 될 거예요.”

가소타는 또래들을 모두 이기는 청양공주처럼 되는 게 목표였다. 묵용성이 코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청양…….”

묵용청양이 눈을 부릅뜨자 그가 곧장 말을 고쳤다.

“황저, 앞으로 사고 좀 그만 쳐. 가 대인이 안 계시니 수습해 줄 사람도 없으니까.”

묵용청양이 코웃음을 쳤다.

“시끄러워. 잔소리는.”

그가 영안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동무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 괴로웠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결연한 척 영안에게 공수를 했다.

“이만 가 볼게. 다음에 또 보자!”

영안이 평소와 다름없는 안색으로 대답했다.

“응, 몸조심해.”

영안은 묵용청양이 떠나는 것이 더없이 좋았지만, 날씨 때문인지 다른 이들의 아쉬움에 옮은 건지 자꾸만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마차가 멀어지자 날씨는 더 어두워졌다. 묵용청양을 배웅하던 이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가만히 산비탈만 바라보았다. 영안은 얼굴이 간지러운 기분에 손을 들어 볼을 훔쳤다. 손등에 축축한 느낌이 닿자 그는 힘껏 얼굴을 문지르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전혀 괴롭지 않았다. 정말이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 * *

춘삼월의 강남은 붉은 꽃과 푸른 잎이 어우러져 생기가 넘쳐흘렀다. 굵직한 나무 아래에서 노란 치마를 입은 소녀가 무성한 나무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이 나쁜 놈, 얼른 내려와!”

나무 위엔 아무도 안 보였지만,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걸 보니 누군가 있는 모양이었다.

“안 내려오시겠다?”

소녀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못된 놈, 너 거기서 딱 기다려.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곧 알게 될 테니까.”

소녀가 나무에 손을 대자마자 위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청양 누이, 오, 오지 마. 내려갈게. 내가 내려가면 되잖아!”

묵용청양은 코웃음을 치고는 아무 말 없이 뒤로 두 발짝 물러났다. 금세 나무 위에 있던 이가 내려왔다. 아직 어린 채양蔡揚이라는 소년이었다.

아명은 양자揚仔고, 나이는 대략 열두세 살쯤이었다. 둥근 얼굴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져 건장해 보였지만, 묵용청양 앞에서는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겁에 질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양자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여, 여기.”

그의 손바닥에는 예쁜 꽃무늬가 조각된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세교細嬌가 강가에서 주운 것인데 양자가 마음에 든다며 빼앗은 것이었다. 양자는 이 골목의 어린 패왕이었는데, 묵용청양이 나타난 뒤로 패왕으로서의 위엄을 완전히 잃었다. 묵용청양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손을 뻗어 그의 귀를 낚아챘다.

“네가 직접 세교한테 갖다 줘.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양자는 그녀의 공격에 이를 악물고 용서를 구했다.

“아파, 아파, 청양 누이, 손 좀 놔줘. 너무 아프단 말이야…….”

묵용청양은 내친김에 그를 앞으로 밀친 뒤 손을 놓았다.

“어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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