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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30)화 (1,030/1,192)

제1030화

곤청리는 황제를 꽤 그럴듯하게 흉내 냈다. 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저놈이 어떻게 이곳까지 뛰쳐나왔는지 모르겠구나. 귀비가 많이 놀랐다. 짐이 그의 혈을 짚어 두어 지금은 움직이지 못하니, 빨리 처소로 돌려보내거라.”

사적나가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인, 얼른 가서 양 통령을 데려오겠습니다.”

곤청리는 사적나가 황급히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황제가 입을 열지 않자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그는 남류청에게 감탄한 나머지 오체투지를 할 지경이었다.

곧바로 양기가 찾아왔는데 그는 속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혼자 왔다. 양기는 황제를 등에 업고 황급히 궁전 문을 나섰고, 그 뒤를 사적나가 따라가며 아무도 황제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모자를 끌어당겼다.

그때, 황제는 양기를 불렀다.

“양기.”

양기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적나도 의심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황제는 계속 말했다.

“멈추지 마라. 그냥 짐의 말을 들으면 된다. 내가 곤청롱이다. 남류청이 독을 써서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잠시 후에는 말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사적나는 황후에게 가서 태자를 데려와라. 서쪽 폐우물에서 우리와 합류해 밀도로 빠져나갈 것이다.”

사적나는 당황한 나머지 눈을 깜박거렸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조금 전에는 당황해서 폐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양기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서며 말했다.

“소신이 가서 그 요물을 죽이고 오겠습니다.”

“다 쓸모없는 짓이다. 그녀는 이미 짐의 퇴로를 끊었다. 짐은 도망갈 수밖에 없다.”

황제는 양기의 등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목숨만 부지하면 뒷일은 걱정할 필요 없다 하지 않느냐. 짐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 * *

여기까지 이야기한 곤청롱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백천범은 자기 손으로 그의 손등을 덮었다.

“아버지, 지나간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요. 우리 이제는 앞만 바라보며 살아요.”

곤청롱은 남류청의 위패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보니 지난 일은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단지, 이 아비는 그때 이미 그녀의 배 속에 네가 있었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단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때 그녀는 기분도 들쑥날쑥했고 입맛도 없어서 잘 먹지도 못했다. 다 덕마의 죽음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생겼기 때문이었구나.”

“아버지께서는 누군가 그녀를 마중 나왔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그녀는 혼자 동월로 가서 저를 낳았을까요? 오라버니도 저와 함께 있지 않았어요.”

곤청롱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이 아비가 추측하기로는 곤청리 때문에 그랬을 것 같구나. 그는 질투심이 강해서 내 것은 무엇이든 다 가지고 싶어 했지. 분명 그녀를 그리 쉽게 보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 당시 그녀는 화아와 따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곤청리가 사람을 보내서 길을 막고 뒤쫓으니 동월로 도망갔을 것이다. 그러나 배가 불러 와서 힘들었을 터이니 숨어서 아이를 낳고 다시 길을 떠나려 했겠지. 그 여인은 어딜 가더라도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이 아니냐?”

* * *

사흘 후, 묵용감과 백천범은 다시 동월로 향했다. 곤청롱과 곤청유는 성 밖까지만 마중을 나갈 생각이었지만 아쉬운 마음을 접지 못해 초원까지 함께 따라왔다.

이별은 늘 서글프고 속상한 일이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천범은 곤청롱이 괴로워할까 봐 애써 눈물을 참으며 그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장난꾸러기 묵용청양과 깜찍한 묵용성의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마지막까지 묵용린은 언급하지 않았다.

또 묵용감이 묵용청양에겐 사랑을 듬뿍 주는 반면, 묵용성에겐 늘 엄한 아버지인지라 성아가 숨도 크게 못 쉰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곤청롱은 이런 부분에선 묵용감과 비슷한 점이 있었기에 웃으며 말했다.

“딸은 오직 총애를 받기 위해 존재하지. 한데 넌 이 아비 곁에서 자라지 못해 애석하기만 하구나. 이렇게 어미가 된 뒤에야 만났으니 아비가 아쉬운 마음이 크다. 이제 너의 딸 청양이 있으니 그 아이에게 총애를 듬뿍 주고 싶어. 아비는 청양을 하루라도 빨리 만나 보고 싶구나.”

백천범이 놀라 소리쳤다.

“아버지, 청양은 이미 하늘에 오를 기세로 예쁨받고 있어요. 여기서 더 예뻐해 주시겠다고요?”

“뭐, 어떠하냐.”

곤청롱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 세상에 그 애보다 더 존귀한 공주가 어디 있다고? 다른 데는 몰라도 동월과 몽달에서만큼은 우리 청양이 제멋대로 굴어도 괜찮다.”

백천범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버지, 다들 청양더러 귀신도 무서워하는 공주래요. 게다가…….”

옆에 있던 묵용감이 말을 보탰다.

“청양이 조금 짓궂긴 해도 성품은 올곧지 않소. 우리가 무어라 하지 않아도 삐뚤어질 일은 없으니 걱정할 것 없소.”

“아무렴. 네 자식인데 그럴 리가 있겠느냐?”

곤청롱이 맞장구를 쳤다. 백천범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평소에는 이야기도 나누지 않더니만, 딸 이야기를 할 땐 장인과 사위가 서로 죽이 잘 맞았다.

천 리를 배웅해도 이별은 오는 법. 곤청롱은 소리강蘇里江에 다다라서야 마침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부녀는 서로를 마주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차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점점 멀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곤청롱은 심장 한 조각을 도려낸 것처럼 괴로워했다. 그는 넓은 소리강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겼다. 그의 시야에서 백천범이 탄 마차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곤청유가 다가와 그를 타일렀다.

“부황, 황매가 떠났으니 그만 돌아가시지요.”

곤청롱이 눈을 힘껏 감았다 뜨며 말했다.

“유아, 서둘러 대혼을 준비하거라. 네게 태자비가 생기거든 짐은 퇴위하고 네 황매를 찾아 동월로 갈 것이다.”

* * *

몽달에 올 때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왔지만, 돌아갈 땐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지나가는 성마다 공손히 문을 열어 주며 그들을 보내 주었다. 수천 정예병의 보필하에 묵용감과 백천범은 당당히 백성으로 돌아왔다.

허대륜은 전범이라는 자가 황후라는 사실을 알고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황후와 나무 타기 시합을 했던 걸 떠올리면 얼굴이 아직도 화끈거렸다. 그는 차마 백천범을 올려다보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호탕하던 허 장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얼굴만 붉힌 채였다.

백천범도 당연히 그가 어떤 기분일지 잘 알았기에 자신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허 장군님, 그간 무탈하셨어요?”

허대륜은 풀썩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황후 마마 덕분에 무탈하였습니다!”

“일어나세요. 처음 백성에 왔을 때, 허 장군의 보살핌 덕분에…….”

허대륜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마마, 그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신,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묵용감이 끼어들었다.

“짐이 모르는 게 있는 모양인데?”

허대륜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는 차마 숨도 크게 내쉬지 못했다. 백천범이 묵용감을 끌고 갔다.

“별일 아니에요. 허 장군이 절 잘 챙겨 주었거든요.”

백성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묵용감은 백천범을 데리고 다시 길을 떠났다. 도원곡에 처자식을 데리러 간 영십일을 제외하고, 올 때와 같이 돌아갈 때도 함께였기에 다들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금세 동월 경내에 들어섰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깬 백천범은 뒤따라오던 부대는 보이지 않고 몇몇 정예병과 시위들만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가 묵용감에게 물었다.

“조 장군은 우리와 임안성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어요?”

묵용감은 등을 기댄 채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임안으로 돌아가지 않는 건 바로 우리요.”

백천범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어디 가는데요?”

“실은 짐이 말해 주지 않은 게 하나 있소.”

묵용감이 코끝을 쓸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짐이 이미 선위를 하였소. 지금 동월의 황제는 린아요.”

백천범이 화들짝 놀랐다.

“언제부터요? 왜 저는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출정할 때부터 이미 세운 계획이었소. 선위서는 영구에게 있고 몇몇 권세 높은 노신들도 알고 있소. 짐이 말하지 않은 이유는, 몽달과 관련된 일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린아를 황위에 올려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소. 하지만, 몽달과 동월의 사이가 서로 좋아졌으니 린아가 정권을 잡는 것도 좋을 듯하오. 이제 짐은 손을 놓을 때가 되었소.”

묵용감은 백천범을 품에 안고 그녀의 이마에 턱을 괴었다.

“범아, 그대가 궁에서 십여 년간 짐의 곁을 지켜 주었으니 이제는 짐이 그대를 지켜 주겠소. 강남으로 갑시다. 당신이 좋아하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합시다.”

백천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흐느끼며 말했다.

“저 때문에 황위도 내팽개치는 거예요?”

“바보 같긴.”

묵용감이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본래 그대 때문에 다투게 된 천하였소. 당연히 그대가 황위보다 더 중요하지. 황제의 자리는 쉬운 게 아니오. 황후 역시 고생스럽긴 마찬가지이고. 그러니 우리는 평범한 삶을 삽시다. 복잡한 예법도 잊고 우리 둘이서만……. 어떻소?”

백천범이 그에게 꼭 의지하며 활짝 웃었다.

“좋아요. 당신 말대로 할게요.”

그러다 별안간 아이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청양과 성아는 어찌하고요?”

“짐은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할 것이오. 만약 강남에 오고 싶다면 영구가 데려올 것이고, 황궁에 더 있고 싶다면 분명 린아가 잘 보살펴 줄 거요.”

백천범이 코를 훌쩍였다.

“청양이는 분명 온다고 할 거예요. 그런데 성아는… 잘 모르겠네요.”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로 그녀의 눈물을 조심히 닦아 주었다.

“내 생각도 그렇소.”

백천범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사실 당신은 린아가 남원에 갈 걸 진작에 알고 있었죠?”

“남원에서 막 돌아온 린아는 그리 정상적이지 못했소. 남원에서 겪었던 일이 그 애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듯하오. 당신에게 지금껏 말하지 못한 일이 있는데, 실은 린아가 늘 악몽에 시달리고 있소.

마음속 응어리에서 비롯된 것일 테지. 그 응어리를 풀지 않으면 악몽은 평생 린아를 괴롭힐 것이오. 어찌 해결하든 그 애의 일이니 참견하지 않는 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오.”

묵용감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을 임안으로 데려가지 않는 건 당신과 린아, 두 모자 사이가 서로 어색해지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오. 당신은 괜찮을지 몰라도 린아는 당신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가질 것이오. 그러니 린아에게 잠시 시간을 줍시다.”

백천범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 괜찮아요.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린아도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묵용감이 말했다.

“당신이 소성蘇城을 좋아한다는 걸 알지만 우리 신분이 특수하니 우리를 잘 모르는 곳에서 시작하는 게 좋겠소. 해서 금릉으로 가기로 했소. 그리 크진 않지만, 우리가 살기에 충분한 저택을 준비해 두었으니 그곳에서 분명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 것이오.”

백천범이 고개를 들고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제게 가장 큰 행운은 당신을 만난 거예요. 다음 생에도 당신의 부인이 될래요.”

묵용감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좋소, 약속한 것이오. 우린 다음 생에도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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