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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29)화 (1,029/1,192)

제1029화

오늘 밤은 유난히 어두운 것 같았다. 그녀는 곤청리의 처소로 숨어들었다.

방 안에서 애타게 서성거리던 곤청리는 문이 열리자 흥분해서 떠들었다.

“이제 가도 됩니까? 그 시종은 죽여서 우물에 버렸습니다.”

남류청은 쉬 하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말하지 마세요. 내 환술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니 얼른 가야 해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밖으로 나섰다.

곤청리는 그녀를 따라가면서도 계속 불안해했다.

“이렇게 그냥 가도 됩니까? 밖에 누가 지키고 있습니다.”

“괜찮아요. 깨어나면 전혀 기억하지 못해요.”

입구에는 보초가 서 있었지만, 곤청리와 남류청이 지나가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곤청리는 마음을 놓았다.

곤청리를 침전으로 데려온 그녀는 황제의 침의를 가리키며 말했다.

“얼른 이걸 입고 당신 옷은 그에게 입히세요.”

곤청리는 그녀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황제는 보이지 않았다.

“황형이 어디 있다는 겁니까?”

남류청이 침상 위를 가리키자, 곤청리는 이불을 들추어 보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둘이서 방금…….”

그러자 남류청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나는 그의 귀비예요.”

그는 왠지 좀 억울했다.

“하지만… 당신은 황형을 미워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무분별한 불평에 남류청은 불편함을 드러내며 그를 계속 노려봤다.

“기분 나쁘면 지금이라도 있던 곳으로 돌아가요. 지금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었던 일이 될 거예요.”

곤청리는 차마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남류청을 조금 무서워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노려보기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당황스러웠다. 그는 군소리 없이 황제의 침의를 입은 뒤, 자신의 옷을 황제에게 입혔다. 그는 침상 옆에 앉아 황제가 계속 미간을 찌푸리는 걸 잠시 지켜보다가 말했다.

“제 생각에는 모두 부질없는 짓 같습니다. 황형을 제가 있던 곳으로 데려간다 하더라도, 그 또한 입이 있으니 모든 걸 다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남류청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곤청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죽입시다. 죽인 뒤 폐우물에 버립시다.”

그 말에 남류청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도 황제를 죽이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곤청리를 밀치고 품에서 작은 도자기 병을 꺼냈다. 그리곤 병에 들어 있던 가루약을 모조리 황제의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는 이제 말도, 걷는 것도 하지 못하고 당신이 있던 작은 처소에서 천천히 죽어갈 거예요.”

그녀는 곤청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전에 당신이 미리 죽일 거예요?”

곤청리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황형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똑같이 해 줄 겁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구태여 죽일 필요는 없죠.”

그러더니 그는 뭔가를 숨기려는 듯 대뜸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만일 황형이 당신의 독을 해독하면 어떡합니까?”

남류청은 도자기 병을 다시 소매 속으로 숨기며 말했다.

“나의 독은 아무도 풀 수 없어요.”

자신만만한 그녀의 모습에 곤청리는 안도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그를 제가 있던 곳까지 데려갈 수 있겠습니까?”

남류청은 깊이 숨을 내쉬며 가만히 황제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자신이 떠나기만 하면 곤청리가 반드시 황제를 죽일 거라고 확신했다. 황제가 살아있는 한 곤청리는 결코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속에 갈등이 일었다. 이 남자한테 그렇게 오랫동안 시달렸는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까 쉽게 돌아설 수 없었다. 그가 설사 진전을 죽이고, 덕마를 죽였더라도 차마 그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요.”

“뭘 기다립니까?”

“그가 깨어나길 기다려요.”

곤청리는 화들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다니. 그, 그건…….”

남류청은 짜증이 가득한 시선으로 곤청리를 노려보았다.

“이미 못쓰게 되었는데 뭐가 그렇게 무서워요? 그 정도 담력으로 황제가 될 수 있겠어요?”

그녀가 비웃자 얼굴이 붉어진 곤청리는 애써 침착한 척 말했다.

“무섭지 않습니다.”

남류청은 침상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그가 곧 깨어날 거예요.”

그 말에 곤청리가 쏜살같이 그녀의 등뒤로 몸을 숨기자 남류청은 귀찮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황형은 몽달 최고의 파도입니다. 그는…….”

그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는 의외로 담담한 표정으로 곤청리를 잠시 쳐다보곤, 남류청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남류청은 그 눈빛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증오도, 슬픔도, 분노도 아니었다. 황제는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리가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히 힘쓸 필요 없어요. 그냥 누워 있어요.”

남류청이 말했다.

“누워서 내 말을 끝까지 들어요.”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 황제는 가만히 누운 채 입을 열었다.

“짐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가 말을 할 줄 알자 곤청리는 겁에 질려 투덜거렸다.

“그가 말을 하다니, 어찌 된 겁니까!”

남류청은 곤청리를 힐끗 쳐다봤다.

“조금 더 지나면 말도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래도 소리는 지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가 소리라도 지르면, 나는…….”

남류청은 그를 무시하곤 다시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독을 썼으니 앞으로 걸을 수 없을 거예요. 조금 더 있으면 말도 할 수 없어요. 날 탓하지 말아요. 당신이 날 몰아붙인 거예요. 난 떠나고 싶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그래서 저놈을 데려왔나? 나를 대신하려고?”

황제는 냉소를 지었다.

“저 쓸모없는 놈은 이틀도 안 되어서 발각될 것이다.”

그 말에 곤청리는 화가 나서 침상으로 두 발짝 다가갔다.

“난 무능한 사람이 아니야! 그간 서책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건 나도 할 수 있다고!”

황제는 그와 말조차 섞을 생각이 없는 듯 남류청만 바라봤다.

“짐이 걷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더라도 글은 쓸 수 있다. 또한 짐에게는 아직 충직한 노신들이 많으니, 그들은 저 녀석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몽달의 군왕이 말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남류청은 계속 이어서 말했다.

“동월은 말할 것도 없고, 북진 같은 나라까지 당장 몽달로 쳐들어올지도 몰라요. 이건 외환外患이고, 당연히 내우內憂도 있겠죠? 황실 자제들 말이에요. 당신 사촌들이 당신을 용상에 계속 앉혀둘 것 같아요?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남류청은 곤청리를 가리켰다.

“당신은 오랜 세월 동안 그를 숨겨 왔죠. 몇 명의 측근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의 신분을 알지 못해요. 설마 만천하에 알릴 생각인가요? 몽달의 황제가 사실 쌍…….”

“그만!”

황제는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최근 몇 년 동안 온순한 척하더니 뒤에선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군. 그렇지?”

남류청이 대답했다.

“그래요.”

“왜 하필 지금 움직인 것이냐?”

남류청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그에게 손목을 보였다. 맥이 뛰는 언저리에 검푸른 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 언뜻언뜻 보였다.

“나는 심문이 열리길 기다렸어요. 남현속이 당신에게 준 서신에는 아마 적혀 있지 않을 거예요. 나는 남원 궁정에서 독을 다루는 고수였어요. 만약 남현속이 심문을 닫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었다면 나는 벌써 이곳을 떠났을 거예요.”

황제가 말했다.

“당신이 그리 쉽지 않은 사람일 줄은 알고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멀리 보내지 않았을 테니.”

남류청은 벽 모퉁이에 있는 동루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내가 할 말은 다 했어요. 당신은 곤청리가 살던 처소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 거예요.”

말을 마친 남류청이 돌아서자 황제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날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냐?”

남류청은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그녀는 이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꿈에서 황제가 했던 질문이었다. 꿈속에서는 그 물음에 가슴을 움켜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흐느끼기만 했었지만, 꿈은 꿈일 뿐이다. 지금 그녀는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전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녀는 황제의 눈빛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걸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는 한없이 깊은 슬픔에 빠져 빛을 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그녀도 마음이 황무지처럼 갈라졌지만, 그 지독한 통증을 애써 외면하며 곤청리에게 말했다.

“사적나에게 오라고 하세요.”

곤청리는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걸어 나갔다. 그때,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당신은 황제라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그러자 곤청리가 멈칫하더니 뒷짐을 지고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가 나간 뒤, 남류청은 황제에게 말했다.

“당신 곁에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 곤청리가 살던 처소에 있지 말고 날이 저물면 기회를 틈타 도망가요. 곤청리는 당신을 살려 두지 않을 거예요. 지금이라면 도망갈 기회가 있어요. 앞으로 한 시진이 지나면 말을 하지 못할 거예요.”

“뭐 하러 위선을 떠느냐?”

황제는 냉소를 지었다.

“설마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냐?”

남류청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죽이고 싶었다면, 방금 독살했을 거예요.”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도망치기만 하면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잖아요. 그리고 당신도 이곳을 나가 봐야 반드시 돌아와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 될 거예요. 당신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다시 여기로 돌아오겠죠. 내가 이렇게 해서라도 남원으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우리는 똑같은 사람이에요. 누구도 누구를 가두어 둘 수 없어요.”

“그래서 나의 퇴로까지 생각해 둔 것이냐?”

황제가 덧붙였다.

“내가 도망갈지언정, 쌍둥이라는 비밀은 지키려고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군.”

“난 당신을 이해해요. 당신이 나를 이해하듯이.”

“아니, 난 널 이해할 수 없다.”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널 만나지 않았어야 했는데.”

그때 곤청리가 사적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사적나는 침상에 누워 있는 황제를 보고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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