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8화
서안 앞에 앉은 그녀는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 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 사람을 시켜 찻물을 끓여 놓지 않나요?”
곤청리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
“늘 냉수만 마셔서 이게 편합니다.”
남류청이 물었다.
“폐하께서는 왜 당신을 아예 죽여 없애지 않았죠?”
곤청리의 얼굴에 웃음기가 더욱더 짙어지더니 급기야 조소를 띠었다.
“누가 알겠습니까?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주려고 하는지도 모르지요. 전 살아 있는 시체일 뿐입니다.”
“형제의 정을 차마 끊을 수 없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당신들은 동복형제잖아요.”
“아뇨. 황형에게 전 그저 흉조일 뿐입니다. 그에게 누를 끼치는 괴물이나 마찬가지죠.”
곤청리는 말을 이었다.
“황형은 절 진작 죽였어야 합니다. 황형이 오래 살수록 제가 갇혀 있는 삶도 길어집니다. 계속 이렇게 지내느니 차라리 빨리 죽고 싶습니다.”
황실 비화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이 없는 그녀 입장에선, 그저 곤청리가 황제를 미워하기만 하면 됐다.
“내가 지난번에 말한 것은 다 정확하게 준비했나요?”
“다 되었습니다.”
곤청리는 엄숙한 얼굴로 곤청롱의 말투를 따라했다.
“애비, 짐의 눈을 보거라. 짐은 너를 많이 사랑한다.”
남류청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다정한 말을 할 때 그렇게 정색하지 않아요.”
곤청리는 의아해했다.
“그렇습니까? 저는 황형이 누구에게나 그런 얼굴을 하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당신에게는 다른 얼굴을 보여 주나 봅니다.”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 앞에서는 누구도 정색할 수 없겠죠.”
“게다가 폐하께선 그런 말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주의하세요.”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기대감을 표했다.
“그래도 안심하십시오. 제가 황형으로 가장하는 건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언제 움직입니까?”
“며칠 더 기다려야 해요.”
곤청리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하는군요.”
“충분히 파악해야 움직일 수 있어요. 만약 사소한 것으로 일을 그르친다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이에요.”
“죽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난 죽고 싶지 않아요.”
그 말에 곤청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당신이 죽는 건 원치 않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저는 전적으로 당신의 말에 따를 겁니다.”
잠시 후, 그가 또다시 물었다.
“절 구출하고 나면 황형은요? 황형은 어떻게 할 겁니까?”
남류청이 말했다.
“당신들의 신분을 맞바꿀 거예요. 그를 이곳에 가두는 건 어때요?”
곤청리는 눈을 반짝이며 흥분했다.
“그게 정말 가능합니까?”
남류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변만 없으면 그렇게 될 거예요.”
“당신이 정말 해낸다면 원하는 건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습니다.”
“난 돌아가기만 하면 돼요.”
남류청은 힘을 주어 덧붙였다.
“사람을 붙여서 날 남원까지 데려다 주기만 하면 돼요.”
그러자 곤청리의 눈빛이 순간 사그라들었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애처롭게 물었다.
“꼭 돌아가야 합니까? 몽달이 마음에 안 듭니까? 만약 제가 황제가 된다면 당신이 나의 황후가 되어 주면 안 됩니까?”
남류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도 황제답지 못한 곤청리가 제대로 계획을 이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말할 때, 그렇게 불쌍한 사람처럼 하지 말아요. 군왕의 기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건 저도 압니다. 남들 앞에서는 그렇게 할 겁니다. 하지만 당신 앞에서는 그럴 필요 없지 않습니까.”
남류청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마치 집착하는 어린아이 같았고, 어투도 여전히 너무 부드러웠다. 그러나 계획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기에 그녀는 이제 물러설 곳이 없었다. 게다가 남원암이 벌써 패륜이에 도착했기에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나는 반드시 가야 해요. 이것이 나의 유일한 조건이에요. 만약 당신이 이걸 약속하지 않으면 계획을 전부 취소하겠어요.”
곤청리는 갈등에 휩싸여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결국 마음을 정했다.
“알았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며칠간은 정신을 바싹 차리세요. 내가 언제든지 당신을 데리고 나갈 거예요. 그리고 당신 시종은…….”
그녀는 소매에서 작은 도자기 병을 꺼냈다.
“이건 미향이에요. 이걸 맡으면 그 시종은 곧바로 쓰러질 거예요. 나머지 일은 당신이 직접 해야 해요.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있어요?”
그 말에 곤청리는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죽여야 합니까?”
“안 그러면요?”
남류청이 그를 째려봤다.
“만약 그가 도망이라도 가면 우리 계획은 끝장이에요.”
곤청리는 그녀가 ‘우리’라고 지칭한 것이 기뻤다. 그는 이를 악물고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남류청은 또다시 몇 가지 세부적인 사항을 알려 준 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황제가 궁중에 있기에 그녀는 오래 머물 수 없었다.
* * *
황제가 깨어났을 때, 주위는 온통 칠흑 같이 어두웠다. 그는 순간 자신이 어디 있는지 헷갈려서 어리둥절했지만, 곧 곁에 누군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윽한 향기에 기쁜 마음으로 여인을 끌어안으려고 하다가 순간 멈칫했다. 이건 남류청의 향기가 아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함께 자고 있던 여인이 일어나 등불을 밝히고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황제는 그녀를 보자 문득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고민하다가 용비에게 와서 술로 근심을 없애려고 했다. 그런데 결국에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처에서 자신의 옷을 찾았다. 그런데 용비는 침의를 입고 있었다. 상황을 살피던 그녀는 침상에서 내려와 그의 시중을 들었다.
“폐하, 돌아가려고 하십니까?”
“그래, 짐이 아직 할 일이 좀 남았소.”
용비는 그가 변명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아는 척하는 대신 조용히 당부했다.
“공무는 늘 끝도 없이 많은 법이지요. 폐하, 몸조심하십시오.”
황제는 짧게 대꾸하며 그녀의 손을 피해 자신이 직접 목 밑에 있는 단추를 채웠다. 침소를 나서던 황제는 머뭇거리더니 용비에게 말했다.
“오늘밤 일은 기록에 남기지 않고, 상도 내리지 않을 것이오.”
용비는 그를 올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신첩 또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황제는 그것이 불공평한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었지만, 하늘 아래에 그가 저버리지 않고 싶은 여인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이번 일은 비록 무심코 저지른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잘못이 분명했다.
전정으로 돌아온 그는 침전 입구에서 한참이나 서성거렸지만 결국 들어가지 못했다. 안 그래도 최근 들어 남류청의 기분이 좋지 않은데 그녀가 뭔가를 더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차마 뒷일을 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날 그는 서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날이 밝기 전 조용히 침전으로 가 장막을 들추어 보자, 희미한 어둠 속에서 남류청이 돌아누워 편안한 표정으로 단잠에 빠져 있었다.
* * *
이날 저녁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황제는 배가 좀 더부룩하다고 느꼈다. 소화를 시키기 위해 밖에 나가서 산책을 하는데 남류청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그녀의 안색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를 대하는 태도도 많이 나아졌다. 황제는 그녀가 풍루를 걸치고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이렇게 추운 날 무슨 일로 밖에 나왔느냐?”
“폐하와 함께 산책을 하려고 나왔습니다.”
황제의 마음은 따뜻해졌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반대였다.
“쓸데없기는. 어서 들어가거라. 감기라도 걸리면 그게 더 걱정이다.”
그러나 남류청이 그곳에 서서 움직이지 않자 황제의 마음은 누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풍루를 들춰서 여인을 품었다. 남류청은 웬일로 얌전히 작은 새처럼 그의 품에 안겼다. 황제는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얼굴을 그녀에게 파묻었다. 풍루가 가림막이 되어준 덕에 그는 그녀의 입가에 입을 맞출 수 있었다.
남류청이 고개를 살짝 들어 화답하자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입맞춤을 즐겼다.
한참 후, 남류청은 말했다.
“폐하를 모시고 산책을 하고 싶어요.”
황제는 알겠다고 대꾸하고는 풍루에 감싸인 그녀를 끌어안고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어린 시종이 들고 있는 등롱불이 두 사람을 비추었다.
그들이 이렇게 다정하게 함께 걷지 못한 지 너무 오래되었다. 황제는 기쁨으로 가득 차올라 하늘 끝까지 이렇게 함께 걷고 싶었다. 그녀가 조용히 곁에 있는 게 무엇보다 좋았고, 예전처럼 다시 고요한 세월을 보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느낌이 바로 행복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 그녀가 이렇게 다시 걸어 나올 줄 알았다. 그녀는 자신을 어떤 정서에 오래 가두어 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자에 들어서자 황제는 또다시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 그가 그녀를 풍루에서 빼낸 뒤 오랫동안 격렬하게 입맞춤을 하자, 남류청은 눈을 감은 채 순순히 그를 받아들이며 그의 허리를 꽉 감싸 안았다.
황제는 남류청이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이 되어서 궁전 주위를 한 바퀴 빙 돌고 얼른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그녀의 손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투덜거렸다.
“밖에 조금만 있어도 손이 이렇게 차가워진다니… 앞으로는 손난로가 없으면 외출하지 말거라.”
남류청은 웃으며 말했다.
“신첩의 손난로는 폐하가 아닙니까?”
마침내 그녀가 그와 웃으며 이야기하자 황제의 마음에 있던 근심 걱정은 깨끗이 사라졌다.
이날 밤, 황제는 그녀를 기쁘게 해 주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고, 남류청도 흥이 나서 눈을 빛내며 교태를 부렸다. 그 모습에 미친 듯이 빠져든 황제는 정말이지 요물 같은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한바탕 격렬했던 비바람이 지나가고 모든 것은 서서히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남류청은 잠시 숨을 고르고 황제를 올려다봤다.
“폐하, 폐하?”
그러나 황제는 깊이 잠든 듯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황제의 얼굴에 손을 뻗고 토닥거렸다.
“폐하, 일어나 보세요.”
황제의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여전히 의식이 전혀 없었다. 남류청은 순식간에 옷을 입고 살그머니 밖으로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