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7화
황후는 말도 안 되는 수법을 쓰는 남류청 때문에 심신이 모두 녹초가 되었다. 도무지 남류청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다른 것은 두렵지 않았다. 심지어 황후의 지위를 폐위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태자는 그녀에게 있어 최후의 선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나중에 남들에게 허리를 굽히는 건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황후는 방 안에 있던 남류청의 시종들에게 모두 나가라고 손짓했지만 시종들은 전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후가 남류청에게 말했다.
“다들 나가 있으라고 하게. 본궁이 긴히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남류청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탁려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다들 나가 있어.”
두 사람만 남아 있는데도 황후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자 남류청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 말이 있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다 나갔으니 말씀하시지요.”
황후가 잠시 망설이자 남류청은 비웃는 듯 말했다.
“혹시 무릎이라도 꿇고 빌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
황후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지만 심호흡을 한 후에 입을 열었다.
“덕마의 복수를 하려는 거라면 자네는 상대를 잘못 알고 있네. 본궁은 덕마의 목숨을 거둘 생각이 없었네. 정말 덕마의 죽음을 원한 건…….”
황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마디를 토해냈다.
“폐하이시네.”
* * *
남류청은 자신이 어떻게 전정으로 돌아왔는지 모를 정도로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황후의 말은 매우 뜻밖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녀 역시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았다. 아직 가을이었는데도 그녀는 심장에서부터 한겨울 같은 한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한기는 그녀의 가슴에서 사지로, 백골로 뻗어 나갔다. 눈앞엔 온통 황무지가 펼쳐진 것 같았다.
남류청은 알고 있었다. 처음에 황후는 자신의 지위가 위협 받는다는 이유로 그녀를 죽이려 했었다. 특히 그녀가 임신했을 때 황후의 불안은 극에 달했었는데, 다행히 전정에서 머물렀던 덕에 그녀는 무사히 황자를 낳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사히 나하을 수 있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으리라.
황제는 남류청의 아이를 파격적으로 친왕에 봉했다. 이는 그에게 남류청의 아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 아이는 황위에 오를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몽달의 황실 규율에 따르면 왕으로 봉해진 황자는 황위 상속권을 잃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후로 황후는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리라. 한 사람은 후궁에, 한 사람은 전정에. 우물이 강물을 침범하지 않듯이 둘은 평화롭게 지냈다. 그렇기에 황후는 덕마를 죽여 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그렇다면 황제는 왜 덕마를 죽였을까? 남류청은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덕마가 석벽에 표식을 남겼다는 것을 그가 눈치챈 듯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덕마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무슨 일이든 도와줄 수 있다고 호기롭게 말하던 덕마에게 그녀는 차마 사실대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남류청은 덕마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생각은 틀렸다. 과거에 어리숙했던 여동생을 살리지 못한 것처럼, 그녀는 덕마를 지키지 못했다.
이제 보니, 황제는 지금까지 그녀에 대한 경계를 늦춘 적도, 그녀를 믿은 적도 없었던 것이다.
남류청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천자의 사랑은 작은 충격도 견디지 못하고 쉽게 부서진다는 걸. 아름다운 세월이란 사실 모두 거울 속의 꽃이며, 수면에 비친 달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긴 시간 동안 저도 모르게 현혹되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가 지어 보였던 웃음,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손길, 침상에 누워 바라보던 그의 뜨거운 눈빛… 그들이 모두 진짜라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굴욕감이 드는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이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임을 깨달았다.
남류청은 더 이상 황후를 괴롭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태자를 폐위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단지 울적해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황제에게는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
* * *
높은 하늘이 유난히도 푸르렀다. 어린 황자, 곤청화는 하늘을 가리키며 쫑알거렸다.
“어마마마, 새.”
남류청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니, 그녀의 작은 새가 허공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곁눈으로 보니, 저 멀리 양기도 계단에 서서 그 새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녀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휘파람을 불자 그 새는 그녀의 팔에 앉았다. 어린 황자는 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마마마, 저번에 본, 그 새 맞아요?”
그녀는 새의 깃털을 가볍게 어루만지면서 재빨리 발에 묶여 있던 작은 대나무 통을 숨기곤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이건 덕마가 변한 거야.”
어린 황자가 곧 흥미를 보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마마마, 덕마가 안 보여요. 변했어요? 이 새로?”
“그래, 앞으로 널 보러 자주 올 거야.”
“그럼, 덕마라고 불러요.”
“그래, 덕마라고 부르자.”
어린 황자가 통통한 손으로 작은 새를 쓰다듬었다.
“덕마, 덕마, 덕마.”
남류청은 코끝이 시큰거려 하늘을 올려다봤다.
* * *
양기는 어서방으로 들어섰다.
“폐하.”
황제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똑같은 새 한 마리가 또 날아왔습니다. 어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황제는 붓을 내려놓고 창가로 걸어갔다. 허리를 굽힌 남류청의 팔뚝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곤청화는 계속 작은 새를 만지며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건넸다. 그녀가 저렇게 대놓고 새를 드러내는 걸 보면, 어쩌면 그가 괜히 신경 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양기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만일…….”
황제는 손을 내저었다.
“요즘 귀비의 기분이 좋지 않다. 새를 데리고 놀게 두어라. 만에 하나 문제가 있다고 해도 황궁으로 쳐들어와서 그녀를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너와 네 수하들은 밥만 축내는 사람이더냐?”
“…네, 소신, 잘 알겠습니다.”
양기는 공수하고 물러났다.
황제는 뒷짐을 진 채 그녀와 아이를 바라보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그녀는 점점 더 침묵을 지키며 그에게 성질을 부렸고 그와의 대화도 꺼렸다. 마치 황후에 대한 원한이 모두 그에게로 전이된 것 같았다.
남류청은 방으로 들어와 종이쪽지를 확인했다. 한참 뒤, 그녀는 종이쪽지를 태워 놋난로에 던져 재로 변하는 것까지 확인했다.
그날 밤, 황제는 탐색하듯이 손을 뻗어 그녀를 껴안았지만 남류청은 짜증을 내며 그를 뿌리쳤다. 그러자 며칠 동안 계속 참을성 있게 인내하던 황제는 결국 터져 버리고 말았다.
“알고 있는 것이냐? 지금 네가 한 짓으로도 짐은 네 목을 베라고 명할 수 있다.”
남류청은 고개를 들고 차갑게 그를 바라봤다.
“폐하께서 미련이 없으시겠거든 얼마든지 베십시오.”
황제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그녀를 죽이면 당연히 미련이 남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녀를 아끼기에 그녀는 이리 오만방자해졌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남자라는 그의 자부심이 누군가에게 양보하고 져 주는 걸 더는 허락하지 않았다.
불을 뿜을 듯한 눈빛으로 그는 그녀를 덮쳤고 밑도 끝도 없는 입맞춤을 강행했다. 남류청은 태풍처럼 몰아치는 입맞춤에 저항하며 매섭게 발길질을 했다. 그러자 황제가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그녀의 몸에서 내려왔다. 그는 굳은 얼굴로 빠르게 손을 치켜들었다.
그에 맞서 남류청은 조금도 무섭지 않다는 듯 그를 똑바로 쳐다봤고, 그가 뺨을 내려치길 기다렸다. 그걸로 그간의 정을 모조리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그녀가 기다리는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고, 그가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황제는 침상에서 내려가 옷을 입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듣던 남류청은 힘겹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탈한 한숨에서 형용할 수 없는 피로가 가득 느껴졌다.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화를 품은 황제는 사람을 물린 채 홀로 어두운 황궁을 걸었다. 밤바람이 꽤 차가웠지만, 속에서 부글거리는 화를 도저히 삭일 수 없었다. 문득 그는 자신이 한 궁전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빛에 비친 현판의 글씨를 읽으니 용비容妃의 궁전이었다.
용비는 한때 그의 총애를 듬뿍 받았던 여인이었으나, 그는 오랫동안 그녀를 잊고 있었다. 용비는 다정하고 배려심이 많았으며 상대의 속마음을 잘 읽었다. 그리고 다른 여인들과 달리 말수도 적었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 경쟁하지도 않았다. 그것 때문인지 그녀에 대한 인상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그는 문 앞에 서서 한참 분개하며 생각했다. 감히 그를 원하지 않다니? 여기에 있는 수많은 여인들은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나길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사실 남류청은 일부러 황제를 쫓아낸 것이었다. 황제의 성격상 분명 오늘 밤에는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몰래 침실을 빠져나갔다.
밖은 매우 추웠다. 밤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며 우수수 소리를 내는 덕분에 그녀는 발걸음 소리를 숨길 수 있었다. 비록 딱 한 번 가 봤었지만, 그 비밀스러운 곳의 주변 경치는 이미 익숙했다. 또한 어떻게 해야 금군의 눈을 피할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오늘 밤은 달빛이 구름에 가리지 않아, 그녀가 가는 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긴 복도에 도달하니 사방이 청명한 달빛으로 덮여 있었다.
붉은 기둥 주변으로 곤청리는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추우니, 아마 방에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곤청리의 방을 찾아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돌아보기도 전에, 기뻐하는 곤청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오셨군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자 서안 앞에 앉아 있는 곤청리가 보였다. 그는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일 기다렸어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게 조금 언짢았지만, 그와 함께 계획을 실행해야 하기에 남류청은 별로 따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