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5화
아주 어렸을 때, 그녀는 강아지 한 마리를 키웠다. 동글동글한 머리통과 통통한 몸집을 가진 강아지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곤 했다. 그녀는 그 강아지가 매우 좋았다. 강아지와 놀면 늘 정신을 차리지 못해 교육 시간을 놓치곤 했다.
그러나 나중에 부황은 그녀에게 칼을 한 자루 주며 직접 그 강아지를 죽이라고 했다.
그녀가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며 목을 꼿꼿이 세우고 부황과 대치하자 그는 말했다.
“큰일을 이루려면 무엇이든 필히 죽일 수 있어야 한단다. 오늘은 단지 개 한 마리지만, 언젠간 가까운 사람을 죽여야 할 수도 있다. 그건 이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아가, 권력의 최고봉에 올라서려면 평생 외롭게 살아가야 한단다. 만약 네가 남원의 여제가 되고 싶지 않다면 지금 포기해도 좋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으로 약한 남원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만큼, 여제가 되는 걸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칼을 강아지의 배에 찔러 넣었다. 그리곤 피로 물드는 손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 버릴 수 없는 존재 같은 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남류청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앉았다.
그때 탁려가 장막을 걷었다.
“덕마는?”
그러자 탁려는 말했다.
“마마께서 곧 일어나실 것 같다고 후궁 주방으로 갔습니다.”
“후궁 주방에는 뭐 하러 가? 이곳 어선방에 없는 게 뭐 있다고?”
“어제 마마께서 황금 떡이 맛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건 후궁 주방에서 만든 겁니다. 이곳에는 없어서 덕마가 가지러 갔습니다.”
남류청은 흠칫 놀랐다. 덕마는 정말 진실한 아이였다. 진심으로 그녀에게 마음을 쏟았다. 때때로 무심코 던진 말조차 어명인 것처럼 굴었다.
옷을 갈아입던 그녀는 구석에 있는 동루銅漏(구리로 만든 물시계)를 보고 약간 의아해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는데 왜 나를 깨우지 않았어?”
탁려가 말했다.
“폐하께서 나가실 때, 마마께서 어젯밤에 잠을 설쳤으니 더 자도록 깨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화아는?”
“유모가 데리고 계십니다. 전하께서 오늘 참 의젓하셨습니다. 폐하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셨는데, 폐하께서 아직 마마가 주무시니 떠들지 말라고 하자 전하께서는 알겠다고 순순히 대답하셨습니다.”
남류청은 그 장면을 상상하자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황제는 엄한 아버지였으나 곤청화에게는 제법 자애로운 편이었다.
그러나 곤청화는 그를 두려워했다. 황제가 무슨 말을 해도 항상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 앞에서는 늘 떼를 쓰곤 했다.
남류청이 세안을 끝내고 식사를 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덕마가 돌아오지 않자, 탁려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릴까요?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죠?”
옆에 있던 어린 시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궁궐에도 위아래라는 게 있잖아요. 덕마 언니가 마마께서 아끼시는 사람이라는 걸 모든 이들이 다 아는데 누가 감히 귀찮게 하겠습니까?”
그 말대로, 현재 후궁에서는 가끔 덕마가 지나가면 그녀를 둘러싸고 좋은 말을 늘어놓기 바빴다. 그녀를 통해 남류청의 눈에 들고 싶기 때문이었다.
남류청이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도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을지 모르니.”
그녀가 복도로 나가 막 곤청화에게 가 보려는데, 저편에서 어린 시종 한 명이 허둥지둥 달려와 소리쳤다.
“마마, 큰일 났습니다. 덕마 누님이 맞고 있습니다.”
그 말에 남류청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누가 감히 덕마를 때린단 말이냐?”
시종은 황급히 예를 취하곤 헐떡거리며 말했다.
“황후 마마이십니다.”
남류청은 어안이 벙벙했다.
“황후가 왜 덕마를 때린단 것이냐?”
“황후 마마께서 덕마 누님이 무례하게 굴었다며 은월 누님에게 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한데 덕마 누님이 은월 누님과 한바탕 싸움을 벌였지 뭡니까? 그래서 황후 마마께서는 잔뜩 화가 나셔서 덕마 누님을 끌어내서 마구 때리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남류청이 물었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아직도 맞고 있습니다.”
어린 시종은 울상을 지었다.
“소인이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마마께 아뢰러 왔습니다.”
후궁 전체에서 감히 그녀를 건드릴 수 있는 건 오직 황후뿐이었다.
남류청은 냉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 본궁을 따라 오거라!”
남류청은 사람들을 이끌고 기세등등하게 황후의 궁전으로 달려갔다.
큰 의자에 단정하게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던 황후는 그녀를 발견하곤 눈을 치켜떴다.
“오늘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귀비가 본궁의 궁전까지 발걸음을 하였는가? 폐하께서 아침 문안 인사는 면해 주시지 않았는가?”
남류청은 주위를 둘러봤지만 덕마는 보이지 않았다.
“여러 소리 하고 싶지 않습니다. 덕마는 어디 있습니까?”
황후는 느릿느릿 찻잔 뚜껑을 흔들며 대답했다.
“네 곁에 있는 아이가 너무 오만방자해서 본궁이 대신 혼내 주었을 뿐이네. 만약 매질을 견뎠다면 지금쯤 형방刑房에 누워 있겠지.”
황후는 군소리 없이 나가 버린 남류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형방은 후궁이 말을 듣지 않는 종을 혼낼 때 쓰는 곳이었다. 그곳에선 채찍질, 몽둥이질, 대나무 집게로 집기, 얼음물 끼얹기, 그리고 매달기 같은 형벌들을 내릴 수 있었다. 수법이 다양하지는 않았지만, 아랫사람들에겐 소문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지금껏 많은 이들이 이곳에 들어갔으나 살아서 나오는 이는 몇 명 되지 않았다.
남류청이 다급하게 형방으로 뛰어 들어가니, 두 명의 어린 시종이 바닥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바닥에는 희미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를 발견하자 어린 시종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얼른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본궁의 사람은?”
남류청이 차갑게 묻자 한 시종이 담벼락 한쪽을 가리켰다.
“덕마 아가씨는 매,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탁려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좁다란 나무 판 위로 누군가 흰 천이 덮인 채 눕혀 있었다.
탁려는 황망함을 금치 못하고 허둥지둥 달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흰 천을 들췄다. 천 아래로, 이미 뻣뻣하게 굳은 얼굴이 드러났다.
“덕마야!”
와락 울음을 터뜨린 그녀는 망연자실하여 남류청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남류청은 심장이 순식간에 깊은 나락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다리가 풀렸고 목소리 또한 심하게 떨렸다.
“덕마가 어떻다는 것이냐?”
그러나 탁려는 울기만 할 뿐, 목이 메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뒤따라온 시종들도 덕마의 죽음을 확인하더니 콧김을 내뿜으며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마, 덕마 누님은 이미 죽었습니다.”
역시… 남류청이 비틀거리자 곁에 있던 시녀가 급히 붙들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새파랗게 굳은 덕마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도대체 어떻게 때렸길래 덕마의 얼굴이 이리 피범벅이 된 것이란 말인가?
덕마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흐리멍덩했다. 분명 다르게 생긴 두 얼굴인데,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여동생과 겹쳐졌다.
그녀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누가 매질을 했는지 알아보고 그 자를 잡아오너라.”
얼마 지나지 않아 매질을 한 사람이 불려왔다.
그는 전문적으로 형을 집행하는 시종으로, 삭만索萬이라고 불렸다. 기골이 장대했고 머리카락은 굵게 땋아 머리 위로 말아 올려져 있었다. 그는 남 귀비가 자신을 문제 삼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허나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것은 황후였고, 황후는 분명 그의 목숨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남류청은 들어오자마자 무릎 꿇은 그를 걷어차곤 좌우로 명령을 내렸다.
“본궁의 명이다. 매질을 해라. 죽을 때까지 때리거라.”
그녀는 한쪽 의자에 앉아, 그가 형벌을 받는 걸 감시했다.
그녀가 데리고 온 시종 중 덩치 큰 두 사람이 각각 몽둥이를 들고 마주 선 채 삭만을 내리쳤다. 퍽퍽 소리가 나는 게, 얼마나 세게 내리치는지 알 수 있었다.
삭만은 몸부림치면서 그녀에게 용서를 빌었다.
“귀비 마마, 소인은 덕마 아가씨와 전혀 원한이 없습니다. 단지 소인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
남류청은 손을 내저었다.
“그를 형틀에 묶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매우 쳐라!”
또 두 명의 시종이 다가와서 삭만을 붙잡고 형틀에 묶으니, 이제는 매질을 피할 수 없었다.
그 광경에 누구는 두려워했고, 누구는 황망해했고, 누구는 분노했고, 누구는 슬퍼했지만, 모두들 조용히 삭만이 두들겨 맞는 것을 직시했다.
그때 황후가 황급히 달려왔다.
“멈추거라! 어서 그만두거라!”
순간 두 시종이 몽둥이질을 멈추곤 남류청을 바라보자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고함을 질렀다.
“본궁은 멈추라고 하지 않았거늘 누가 감히 멈추는 것이냐! 다시 매우 쳐라!”
황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남 귀비, 이게 무슨 짓인가?”
“보고도 모르시겠습니까?”
남류청은 턱을 치켜들었다.
“감히 본궁의 시녀를 때려죽인 놈에게 그 죗값을 받아내는 중입니다.”
“그는 형을 집행했을 뿐, 명령한 것은 본궁이네. 자네는 본궁까지 때릴 심산인가?”
남류청이 말했다.
“누구든 직접 때린 사람에게 죗값을 물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죗값은…….”
그녀는 황후를 냉랭하게 노려봤다.
“그건 나중에 두고 보죠.”
“본궁은 자네가 사사로이 형벌을 남용하도록 허락하지 않겠다.”
“웃기는 소리!”
남류청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황후는 사사로이 형벌을 남용할 수 있고, 귀비는 안 된다? 당신은 단지 황후라는 직함을 맡은 것뿐이지요! 이리 오랜 시간 동안 폐하께서 당신을 똑바로 바라본 적이 있기나 합니까? 본궁이 그 자리를 원한다면, 앞으로 당신이 중궁의 자리에 얼마나 더 앉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황후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던 것을 남류청이 지적하자,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얼굴이 시뻘게졌다. 최근 몇 년간 황후는 정말 조마조마한 삶을 살았다. 중요한 일이 없으면 황제는 거의 후궁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모든 사람의 눈에 남 귀비의 위신과 권위가 황후보다 더 높았다. 예전에 남류청을 싫어했던 후비들도 이젠 남류청에게 아부를 서슴지 않았다.
“무엄하다!”
황후는 고함을 쳤다.
“누가 감히 본궁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이냐!”
남류청도 지지 않고 황후를 노려봤다.
“어서 매우 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