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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24)화 (1,024/1,192)

제1024화

황제는 붓을 놓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양기가 걸어 들어오자 그는 사적나를 힐끗 쳐다봤다. 사적나는 황제의 뜻을 곧 알아차리고 얼른 입구로 걸어갔다.

양기는 탁자로 다가와 예를 취했다.

“폐하.”

“그래.”

황제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조금 이상한 새가 있습니다…….”

황제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라?”

양기는 곤란한 듯 멋쩍게 웃었다.

“소신, 귀비 마마께서 황자를 데리고 밖을 돌아다니시는 걸 자주 보았는데, 종종 어떤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함께 놀곤 합니다.”

“네 말은…….”

“어쩌면 소신이 괜한 생각을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모양의 새였느냐?”

“청색 깃털이 아주 예쁜 새였지만, 소신도 그게 정확히 무슨 새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침음했다.

“다음에 보거든 화살로 쏴 죽이거라.”

“네, 알겠습니다. 폐하.”

황제는 잠시 궁리하더니 한 마디 덧붙였다.

“귀비가 보는 앞에서는 쏘지 말거라.”

“소신도 알고 있습니다.”

양기가 예를 취하고 돌아서려는데, 황제가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양기, 이제 진전이 없으니 짐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다.”

양기는 얼른 무릎을 꿇었다.

“폐하! 송구하오나 소신, 진전이 아니옵니다. 소신, 어찌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황제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만 가 보거라. 잘 지켜보고.”

* * *

남류청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의아한 마음에 휘파람을 불었지만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덕마 또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이 새가 도대체 어디로 갔죠? 평소에는 항상 여기에 있었는데… 소인이 일부러 새한테 주려고 해바라기 씨까지 가져왔는데 보이지 않네요.”

곤청화는 덕마의 손바닥을 보더니 까치발을 하고선 해바라기 씨 하나를 입에 넣었다.

그러자 덕마는 대경실색하여 황급히 해바라기 씨를 빼앗았다.

“아이고, 세상에, 이건 드시면 안 됩니다. 목구멍에 걸립니다.”

그러자 황자는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돌아서서 남류청의 다리를 껴안으며 옹알거렸다.

“어머, 마마…….”

남류청은 먼 곳을 바라보다가 금군 통령인 양기가 계단 위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마치 이곳을 감시하는 듯했다.

진전의 수하였던 그에게 황제는 금군 통령 자리를 맡겼다. 진전과 막역한 사이였다고 들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양기는 그녀에게 남들보다 더 냉랭한 태도를 보였다. 웃는 얼굴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황자를 안고 궁전으로 향하자 덕마가 얼른 따라왔다.

“마마, 소인이 안겠습니다.”

“아니야.”

자기 거처로 돌아온 남류청은 서랍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오늘도 영험한 가루를 발라야 하니 넌 오후에 출궁해서 백도탑 앞 석벽에 다시 한번 칠하고 와. 이번에는 막대를 두 개 칠해야 해.”

덕마는 상자를 품에 안고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마마, 소인이 잘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갈 때 다과를 두 통 가지고 가. 누가 물으면 집에 가 보려고 한다고 하고.”

“알겠습니다.

덕마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속삭였다.

“마마, 소인은 총명하지 않지만 간단한 심부름이라면 뭐든 할 수 있으니 분부만 하십시오. 소인도 분별할 줄 압니다.”

그러자 남류청이 물었다.

“네가 무엇을 분별할 줄 안다는 거야?”

“소인도 마마의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덕마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 하고 싶으신 것이 무엇이든, 소인은 도울 것입니다.”

남류청은 싱긋 웃으며 그녀의 뺨을 꼬집었다.

“난 그냥 네가 가서 화아의 복을 기원하길 바랄 뿐이란다. 다른 건 묻지 말거라. 알아 봤자 네게 좋을 것이 없다.”

덕마는 끄덕이며 출궁할 준비를 했다. 덕마가 다과 두 통을 들고 밖으로 향하자 탁려는 그녀를 놀렸다.

“덕마 아가씨, 또 집 생각이 나셨습니까?”

“응, 오랫동안 가 보지 못했잖아. 마마께서 다과를 두 통이나 하사하셨어. 이것도 함께 가져가려고.”

“마마께서는 너한테 정말 잘 대해 주시는구나.”

“설마, 너한테는 잘 대해 주시지 않는다는 거니?”

덕마는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너는 패륜이가 고향이 아니잖아. 만약 너도 집이 가까웠다면 종종 집에 갈 수 있었을 거야.”

농담을 나누던 덕마는 이내 출궁했다.

* * *

한 시진 후, 양기가 황제의 서재로 들어가자 사적나는 곧바로 눈치껏 문가로 갔다.

“폐하, 귀비 마마의 곁에 있던 덕마가 출궁했습니다. 다과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인데, 가던 도중 백도탑 앞에 있는 석벽에 두 개의 가로줄을 그었습니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두 줄을 긋는 게 무슨 뜻이냐?”

양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덕마에게 물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황제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명령했다.

“오늘은 궁에 들여보내지 말고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거라.”

양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소신이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그가 막 뒤돌아서는데, 황제가 다시 말을 바꿨다.

“되었다. 오늘은 그냥 돌려보내고 하루나 이틀 뒤에 물어보거라.”

양기는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돌아섰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폐하께서는 귀비 마마의 일이라면 단호하게 처리하지 못한다는 걸 양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 *

덕마가 환궁할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그녀는 나무 상자를 남류청에게 돌려주며 그녀의 두 눈을 자세히 살폈다.

“마마,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남류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니.”

“혹 마마께서 곤란한 일이 있으시다면 뭐든 소인에게 맡겨 주십시오. 소인은 지금 마마의 권세를 빌려 궁중 어디든 갈 수 있으니, 처리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남류청은 피식 웃었다.

“그건 권세만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거지.”

얼굴을 붉힌 덕마는 멋쩍은 듯 중얼거렸다.

“사실, 소인도 평소에는 그렇게 잘난 체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남류청이 말했다.

“괜찮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보거라. 내가 뒤를 지켜 주마.”

불현듯 덕마가 말했다.

“마마께서는 소인에게 정말 잘해 주십니다.”

남류청은 마치 어리숙했던 자기 여동생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직도 대궐 밖으로 뛰쳐나가던 그 순간, 바보 같은 여동생이 남현속의 다리를 죽기 살기로 끌어안고 소리쳤던 게 선명했다.

“언니! 빨리 도망가!”

그때 남류청은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여동생의 비명을 뒤로하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남현속이 펼친 천라지망을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다시 잡혀왔다. 그 후로는 두 번 다시 여동생을 만날 수 없었다.

남류청은 덕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왜 너에게 잘해 주는지 아느냐?”

덕마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마마께 충실하기 때문이죠.”

그녀는 덕마의 이마를 콕 찌르며 대답했다.

“그건 네가 바보 같기 때문이야.”

* * *

남류청은 요즈음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덕마는 걱정거리가 있냐고 물었지만 그녀 자신도 심신이 불안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이미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도 연락을 취했다.

남원암은 아직 동월에 남아 있었으니 연락이 닿는다면 바로 달려올 것이다. 그녀는 남원암이 도착하기 전에 모든 일을 잘 안배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란 마치 흩어진 모래알을 도로 주워 담는 것과 같아서 도저히 한데 모여지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면 저걸 놓치는 식이었다.

그녀는 도무지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우유부단한 성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한밤중에 깰 정도로 불안했다. 자꾸만 계획이 주도면밀하지 못한 것 같고, 무언가 잊고 있는 듯했다.

그녀를 아무리 탐해도 싫증 낼 줄 모르는 황제는 항상 그녀가 기진맥진할 때까지 몰아붙였다.

숨을 헐떡이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면서 그녀는 어렴풋이 그가 얼굴을 쓸어내리는 걸 느꼈다. 눈에서 코, 입술, 그리고 목까지. 그 편안한 손길에 자기도 모르게 마치 덩굴이 나무를 휘감는 것처럼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한밤중에 그녀는 또 꿈을 꾸었다.

꿈에서 곤청롱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무릎 꿇고 있었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고 황제다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곤청리가 칼을 들고 서서 겁에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황형, 나를 탓하지 마시오. 이 여인이 내게 이렇게 하라고 했소.”

곤청롱이 그녀를 바라보자 그 눈빛에 그녀는 당황하며 물러섰다.

“나,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당신이 돌아가지 못하게 했잖아. 내겐 반드시 갚아야 할 피맺힌 원한이 있어서, 난…….”

곤청롱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뺨을 수없이 맞은 듯,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로움에 눈물만 흘렸다.

“나를 탓하지 말아요. 어쩔 수 없었어…….”

곤청롱이 물었다.

“당신은 조금도 날 좋아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나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고 괴로워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일어나 보거라.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이야?”

그리고 이어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눈가에 닿았다.

그러자 남류청은 천천히 눈을 떴다. 사방이 온통 칠흑 같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는 것과 그런 그녀를 황제가 걱정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소리 없이 고개를 가로젓자 황제는 물었다.

“꿈을 꿨느냐? 어떤 꿈이었지?”

그녀는 심호흡을 하더니 말했다.

“꿈에서 부모님을 만났어요.”

황제는 그녀의 얼굴에 묻은 눈물 자국을 지워 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깊게 입을 맞춘 뒤 그녀의 머리를 품에 안아 줄 따름이었다.

“좀 더 자거라.”

그러나 잠기운이 사라진 남류청은 가만히 그의 심장 박동을 들었다. 세차게 쿵쾅거리는 소리에 그녀는 그제야 안정감을 느꼈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깬 남류청은 가만히 누워서 어젯밤의 일을 회상하며 자책했다.

그녀는 절대 물렁한 사람이 아닌데 왜 난데없이 이런 슬픔이 생겼을까?

부황은 그녀에게 큰일을 할 사람이라면 고난을 감당할 줄도, 욕심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려면 어떠한 것에도 구속되지 않아야 했다. 만약 실수로 무언가에 사로잡혔다면 독한 마음을 먹고 단호히 망가뜨려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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