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023)화 (1,023/1,192)

제1023화

남류청은 갑작스러운 등장에 깜짝 놀랐지만, 침착하게 상대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상대방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멀지 않은 거리에서 서로를 훑어보았다.

그는 머리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남류청은 그를 자세히 살피려고 했지만 달이 도로 구름에 가려져 흐릿한 윤곽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보초가 혹시 환술에서 깰까 봐 초조해, 먼저 말을 건네려고 했는데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를 죽이러 왔습니까?”

그 한마디로 남류청은 바로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토록 찾고 싶을 때는 찾지 못하고, 잊고 있다 보면 오히려 찾을 수 있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그녀는 꽃을 피우듯 보조개가 쏙 들어갈 만큼 방긋 웃었고, 어둠 속을 요염하게 걸어갔다.

“죽이러 온 게 아니에요. 당신을 구하러 왔어요.”

그녀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달빛이 다시 구름을 뚫고 나왔다.

남류청은 그가 얼굴에 금색 가면을 쓰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왜 내가 당신을 죽이러 왔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마치 뼈가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어요?”

그러나 그 사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남류청은 손을 들어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혹시 내가 안 보여요?”

가면 구멍으로 보이는 두 눈이 깜박거리더니 깊게 숨을 내쉬었다.

“만약 날 죽이러 왔다면 당신 손에 죽고 싶군요.”

남류청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요?”

“서책에서 봤습니다. 모란꽃 아래에서 죽으면 귀신이 되어도 풍치가 있다고.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어서 지금 꿈을 꾸는 기분입니다.”

남류청이 물었다.

“왜 내가 당신을 죽이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황형皇兄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지난번 황형이 이곳을 떠날 때, 저를 죽이겠다고 하더군요.”

여기까지 말한 그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절 죽이겠다는 말은 여러 번 했습니다. 그가 언제 절 죽일지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요.”

“정말 죽고 싶어요?”

그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황형이 저를 죽이지 않더라도, 답답해서 죽을 것 같습니다.”

남류청은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가면을 벗고 나에게 얼굴을 보여줄 수 있어요?”

그 사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됩니다. 형님이 알면 절 죽일 겁니다.”

남류청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그런데도 무서워요?”

그 사람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가 잠시 후 다시 들어 올렸다.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주면 얼굴을 보여 주겠습니다.”

“나는 당신 황형의 귀비예요.”

그 사람은 깜짝 놀란 듯 몸을 꼿꼿이 세웠다.

“당신이… 형님의 귀비라니!”

그는 한참 만에 겨우 평정을 되찾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을 압니다. 황형이 한 여인을 좋아하게 됐다며 그녀를 귀비에 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당신이었습니까?”

남류청은 약간 가슴이 떨렸다. 하지만, 순간 스치는 이상한 감정보다 의아함이 더 컸다.

“당신 형님이 나를 언급했어요?”

“딱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당신에 대해 물어보면 화를 냅니다.”

남류청은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줬으니 이제 당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예요.”

그 사람은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가면을 벗었다. 달빛 아래, 곤청롱과 똑같은 얼굴이 가면 뒤에 숨어 있었다.

“당신은 이름이 뭐예요?”

“곤청리昆清璃.

“내 이름이 궁금하지 않나요?”

그는 홀린 듯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꿈결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우시니… 이름도 분명 예쁠 것 같습니다.”

“저는 남류청이라고 해요.”

“역시 용모만큼이나 이름도 아름답습니다.”

남류청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말씀을 참 잘하시네요.”

“서책에서 배웠습니다.”

“서책을 많이 읽으시나요?”

“예. 전 할 일이 없어서 매일 서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는 책으로 가득한 방이 여럿 있습니다.”

그는 문득 아까 그녀가 한 말이 떠올랐다.

“방금 날 구하러 왔다고 했습니까?”

그녀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반문했다.

“나가고 싶지 않으세요?”

그는 즉각 대답했다.

“나가고 싶습니다.”

“황형이 밉지 않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고 침묵에 빠졌다. 그러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미워요.”

곤청리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황형은 당신을 좋아하잖습니까.”

그녀는 그를 향해 유혹하듯 웃었다.

“당신은 내가 좋나요?”

“좋습니다.”

그는 사실대로 말했다.

“하지만…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 봐요. 아름다운 여자는 너도나도 다 좋아해요. 그러니 날 좋아하는 건 별로 특별한 게 아니에요.”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왜 황형을 미워하는 겁니까?”

“당신 황형이 나를 가둬 놓았거든요. 당신을 이렇게 작은 후원에 가둔 것처럼. 나는 황궁에 갇혀 있어요.”

“귀비가 되었으니 좋지 않습니까? 왜 이곳을 떠나려는 겁니까?”

“난 몽달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내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당신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남원에서 왔어요.”

“당신이 이렇게 아름다우니, 그 나라도 분명 아름답겠죠.”

그의 말에 그녀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남원은 정말 아름다워요.”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높이 뜬 달을 바라보았다.

“기회가 된다면 꼭 가 보고 싶습니다.”

“아직 나한테 대답해 주지 않았어요. 당신은 황형이 밉나요?”

그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같은 미인조차 황형을 미워하는데, 저도 미워할 겁니다.”

남류청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진영이네요. 내가 당신을 구해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전제 조건이 있어요. 바로 당신이 곤청롱 행세를 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곤청리가 말했다.

“저는 황형과 완전히 똑같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생긴 것만 똑같아서는 안 돼요. 말하는 모습, 걷는 모습, 화내는 모습, 웃는 모습까지 전부 다 똑같아야 해요. 할 수 있겠어요?”

그는 또 그녀를 한참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엄숙한 곤청롱의 모습을 흉내 냈다. 뒷짐을 지고 턱을 약간 치켜든 게, 정말 곤청롱이 서 있는 것 같아 조금 의외였다.

“몰래 연습이라도 했나요?”

그는 멋쩍은 듯 웃었다.

“여기선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남류청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이만 갈게요. 또 올 테니 누구에게도 내가 여기 왔었다는 걸 말하지 말아요.”

“저도 그리 바보는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한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옆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여기서 지냅니다. 춥지 않을 때는 주로 복도에 있는 걸 좋아하지만, 추울 때는 방 안에 있습니다. 여기엔 저와 시종 한 사람만 있습니다. 그 시종은 밤에 아주 깊이 잠들기 때문에 제가 방에 없다는 걸 눈치챈 적이 없지요.”

“알겠어요. 다시 올게요.”

남류청은 간드러지게 손을 흔들고선 발길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곤청리는 황홀한 눈빛으로 보다가 그녀가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에야 다시 가면을 썼다. 가면을 덮는 순간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남류청이 일어났을 때, 밖은 이미 훤히 밝아 있었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앉은 그녀는 덕마와 탁려의 시중을 받으며 환복한 뒤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탁자에 놓인 예쁜 꽃병이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꽃병에는 화려한 꽃 한 묶음이 꽂혀 있었다. 모두 아주 작은 꽃송이였고, 홍색, 백색, 자색 등 빛깔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보자마자 궁중이 아니라 초원의 야생화임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꽃다발을 한참 바라보자 덕마가 말했다.

“마마, 폐하께서 직접 따셔서 마마께 보낸 겁니다.”

남류청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꽃다발을 바라보더니 곧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씻으러 갔다.

퇴청 후 침전으로 온 황제는 커다란 나무 아래 서 있는 남류청을 발견했다. 그 모습이 꼭 마중 나온 것 같아, 그의 입꼬리는 절로 올라갔고 발걸음도 빨라졌다.

“짐을 기다린 것이냐?”

남류청은 손을 뻗어 그를 잡아당겼다.

“신첩, 하사해 주신 꽃을 보았습니다. 아주 예뻐요.”

“마음에 드느냐?”

“네,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래서 일부러 여기에서 기다린 것이냐?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신첩은 그냥 폐하가 보고 싶었어요.”

황제는 그녀의 손을 꽉 쥐고 바라보며 놀리듯 말했다.

“아주 드문 일이구나.”

남류청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화아는?”

“덕마와 유모가 데리고 있습니다.”

황제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하는 게 더 좋다.”

“무엇을 말입니까?”

“화아를 네 곁에서 키우는 건 원래 예법에 맞지 않았다. 예로부터 자상한 어머니가 아이를 망친다고 했지. 너도 점점 화아를 떠나 보낼 준비를 하는 게 아이의 장래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자 남류청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잘 알겠어요.”

* * *

야생화 꽃다발을 보고 나니 남류청의 마음속에 한 줄기 동요가 일었다. 뭔가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계획을 잠시 중단했다. 모든 일을 분명히 생각해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던 황제는 그녀를 곁눈질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는 몸을 옆으로 돌려 그에게 기대었다.

“조금 피곤하네요.”

“피곤하면 그만 자거라.”

그는 머리카락을 놓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짐이 보기엔 어찌 네가 다른 생각에 빠진 것 같구나.”

“아니에요.”

그녀가 변명했다.

“신첩, 정말 피곤해서 그럽니다.”

황제는 그녀의 귓불에 입을 맞추더니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 더듬기 시작했다.

“그런데 짐은 조금도 피곤하지 않구나.”

“폐하.”

그녀는 부드럽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렇게 절제할 줄 모르시면 어찌합니까?”

황제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짐은 공주를 원한다.”

그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처럼 예쁜 공주를 말이다.”

남류청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서서히 그의 손을 놓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