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2화
서재 앞에 도착한 그녀가 문을 열어 보니, 황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서재는 등불 하나만 불을 밝히고 있어서 주위가 어두웠다.
그녀는 문을 닫고 느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폐하.”
황제는 주춤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짐은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세상에 화아의 아버지는 오직 한 명이고 그건 분명 짐이다.”
그녀는 또다시 심장이 찔리듯 아팠다.
“신첩도 알고 있습니다.”
“짐을 탓하느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죽었는데,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황제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지난번엔 짐이 잘못 말했다. 넌 짐의 생각보다 훨씬 차가운 심장을 가졌구나.”
그녀가 담담히 대답했다.
“신첩의 심장이 차가운 게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 * *
그날 밤 황제는 침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재에 머물렀다. 항상 그녀와 함께 잠자리에 들던 황제였다. 하지만 황제는 이틀 동안은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다음 이틀도 황제는 침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서재에서 잠을 청했다.
그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며 각자 다른 곳에서 묵묵히 진전을 추모했다.
사흘 뒤 침전으로 돌아온 황제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그날 밤 그는 몹시 사나웠고,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서 결국 그녀의 화를 돋우었다. 남류청은 황제를 상대로 한바탕 사투를 벌였고, 황제는 끈질기게 그녀를 안고 입맞춤을 했다.
그런 그에게 짜증이 난 그녀는 도무지 참을 수 없어서 이불 밑으로 그를 걷어찼다. 그는 그제야 멈춰서 나지막이 웃더니 그녀를 품에 안고 깊이 잠들었다.
날씨가 완전히 더워지자 남류청은 다시 남원의 옷을 꺼내 입었다. 짧은 괘자褂子(중국식 홑겹 상의)와 좁은 통치마를 입으니 매혹적인 그녀의 자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황귀비가 이런 차림을 하는 건 점잖지 못했기에 황제는 여러 번 그녀를 꾸짖었지만, 그녀는 전부 귓등으로 들을 뿐이었다. 결국 황제도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좋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요즘 그녀는 얌전하게 지내고 있었다. 후궁에 가서 괜한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고, 전정에 머물면서 유모와 함께 어린 황자를 돌보고 있었다. 아이를 낳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성격이 점점 차분해졌다. 어쩌면 세월이 그녀의 모난 성격과 야생성을 무디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황제는 그녀에게 예전과 다름없이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가끔은 그녀를 데리고 출궁해서 패륜이 시내에서 작은 장난감을 사 주었고, 보통 부부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거리를 걸었다. 넓은 소매로 가렸지만, 그는 늘 그녀의 손을 잡고 다녔다. 이건 황제에게 있어서 너무 위험한 짓이었지만, 그녀가 기뻐하니 그는 종종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지났다. 어김없이 풀이 자라고 꾀꼬리가 우는 봄이 찾아왔다.
한 살을 넘긴 어린 황자는 걷기 시작했다. 아직 잘 걷지는 못했지만, 신이 나서 짧은 다리를 내디뎌 전당 사이에 있는 공터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아무리 지쳐도 안아 주는 것을 싫어했고, 주저앉은 채로 남류청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남류청은 굳이 다가가 일으켜 주지 않고 멀리 앉아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린 황자는 땅을 짚은 채 작은 엉덩이를 쭉 내밀고 혼자 일어나 부리나케 제 어미를 향해 달렸다. 두어 걸음 뛰다가 코방아를 찧었지만 어린 황자는 울기는커녕 다시 일어나, 이번에는 뛰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그녀의 품에 안겼다. 남류청은 그를 안아 올려 입을 맞추었다.
황제는 멀리 떨어진 나무 아래에 서서 이 광경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의 마음은 다림질을 한 듯 따뜻하고 편안했다.
남류청의 마음은 온통 아이에게 가 있었다. 그녀는 매일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걸음마와 말을 가르쳤다. 때로는 춤을 추는 걸 보여 주기도 했다. 궁중의 시종과 시녀들도 남 귀비가 어린 황자를 데리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화원에서 꽃구경을 하거나 호수에서 배를 타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황제는 침전으로 돌아오면, 늘 아무도 없어서 씁쓸했다. 왠지 자신이 냉대받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바쁜 와중에도 황제는 남류청을 데리고 출궁했다. 그녀와 단둘이서 넓은 소매 아래로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녔다. 이따금 이야기꽃을 피우고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다. 그러다 그녀가 좋아하는 오래된 가게에서 식사를 했다. 황제는 이렇게 평범한 부부처럼 저잣거리에 녹아드는 느낌이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마차가 가게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황제는 친히 발을 걷고 남류청을 먼저 들여보냈다.
여느 때처럼 창문에 달린 발을 걷어 올리고, 거리 풍경을 구경하던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석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곳에 있는 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기호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왜냐하면 그건 그녀가 정한 기호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은 한바탕 어지러웠다. 너무 흥분되어 손까지 가늘게 떨렸다. 그녀의 사람이 그녀를 찾아왔다.
이 년이 넘게 걸려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결국 그들은 몽달에 찾아왔다. 그녀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바다에서 바늘을 찾듯 여기저기를 헤매다 이곳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정말이지 반가운 소식이지만, 그리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오지는 못했을 테니 그들만의 힘으로는 몽달의 황귀비를 데려갈 수 없을 것이다.
남류청은 원래 계획을 많이 세워 놨었다. 하지만 진전은 동의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단념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녀는 당시 그의 심각한 표정이 너무 우스워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대답했었다.
그러나 오늘, 기호를 보는 순간 그 계획이 또다시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몇 년 동안 그녀는 매우 평온한 일상을 보냈지만, 도망갈 준비는 조금도 쉬지 않았다.
그녀는 황궁의 비밀이 잠든 곳을 알게 되었다. 황제가 일정한 기간마다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을 만나고 올 때마다 황제의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가 그 장소로 가는 통행 영패를 어디에 두는지도 파악해 놓았다.
그리고 황제는 초원에 갈 때마다 하룻밤 머무른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그 정도면 그녀 역시 시간은 충분했다. 출산 후, 그녀의 심문心門은 조금 열린 게 확실했다. 비록 아직 고충蠱蟲을 심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짧은 환술은 부릴 수 있었다. 그 비밀스러운 곳을 자유롭게 오가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그녀는 진전에게 그 계획은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건 살아 있는 진전에게 한 약속이었다. 지금은 그가 죽지 않았는가. 그녀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죽었으니 그 약속도 사라진 셈이다.
계획을 차치하고도 그녀는 곤청롱과 똑같이 생긴 그 남자가 조금 궁금했다. 곤청롱이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는데 과연 그 남자도 그럴까? 그 사람은 대체 어떤 성격일까? 사실 그녀가 가장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그 사람도 곤청롱처럼 그녀에게 반할 수 있을까?
다음 날, 그녀는 덕마를 불러서 청색 비단 한 필을 하사했다.
“내일이 아버지 생신이라 했지? 이거 가지고 집에 다녀와.”
덕마는 비단을 받아 들고 눈빛을 반짝이며 웃었다.
“마마, 감사합니다.”
남류청은 종종 그녀에게 상을 내렸다. 처음에는 거절했었지만, 그러면 남류청이 기분 나빠했기에 이제는 기쁘게 받았다.
그리고 귀비를 모시는 최상급 시녀로서 그녀에게는 다른 시녀들이 질투할 만한 특권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일정 기간마다 집에 다녀올 수 있다는 거였다. 자연히 그동안 모은 좋은 물건을 부모님께 가져갔고, 이웃 사람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이건 그녀의 가문에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남류청이 말했다.
“출궁할 때,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하나 있어.”
그녀는 작은 나무 상자를 꺼내 열어 보였다.
“남원에는 영험한 가루를 바르는 풍습이 있어. 이 가루를 백도탑 앞 석벽에 바르면 화아의 복을 기원할 수 있어. 너무 많이 바르진 말고 막대 모양으로 한 번만 바르면 돼. 나머지는 돌아와서 다시 내게 돌려줘.”
덕마는 나무 상자를 받아서 조심스럽게 품 안에 넣었다.
“예, 마마! 소인이 꼭 황자님의 복을 기원하겠습니다.”
좌우를 둘러본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안심하세요. 소인이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겠습니다.”
황제는 남원의 무술巫術을 꺼려 해서 의복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남원과 관련된 어떤 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결국 남류청은 화로수花露水를 만든다는 핑계로 다른 것을 몰래 했다. 이런 일은 덕마만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닷새가 지난 저녁, 청색 새 한 마리가 금궁 상공을 선회했다.
남류청은 어린 황자를 데리고 밖에서 놀고 있다가 그 새를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새가 급강하하여 그녀의 팔에 내려앉았다.
남류청은 어린 황자의 옆으로 다가가 새의 깃털을 만지게 했다. 그러면서 다른 손으론 새의 발에 있는 작은 대나무 통을 떼어냈다.
* * *
열흘 후, 드디어 그녀가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황제는 초원으로 갔기에 오늘 밤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밤이 깊어지자 조용히 후전을 빠져나갔다.
그 비밀스러운 곳은 사실 황궁 안에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곳에 황족인 누군가가 구금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제의 삼촌이나 큰아버지, 또는 한때 총애를 받았다가 버려진 후비가 있을 거라 추측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심지어 그곳에서 일하는 시종도 사실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몇 년마다 시종들이 죽어 나갔다.
남류청은 미향을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 앞을 지키는 보초가 없으면 도리어 순찰하는 금군의 주의를 끌게 될 것이다. 그녀는 황제의 통행령을 들고 보초에게 환술을 부릴 수밖에 없어 시간을 오래 끌 수 없었다.
한밤중이라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그녀는 등잔불 하나 없이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잠시 눈이 적응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나아갔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그녀는 한 사람도 마주치지 못했다.
방이 아주 많았는데 그녀는 그 사람이 어느 방에 있는지 몰라,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 서서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달빛이 구름 사이를 뚫고 나와 주위가 조금 밝아졌다.
남류청이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긴 복도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어서 언뜻 보면 기둥의 일부라고 착각할 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