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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21)화 (1,021/1,192)

제1021화

한 바퀴 돌고 난 뒤, 그녀는 아이를 안아서 여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벌써 세 살이 된 어린 태자가 동생을 보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남류청은 할 수 없이 쪼그려 앉아서 태자가 황자의 자그마한 손을 만질 수 있게 해 줬다.

그때 황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아, 동생은 아직 어려서 만지면 안 된단다. 어서 모후에게 오너라.”

태자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모후의 말에 따랐다.

남자들이 시끌벅적했다면, 여자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어린 태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감히 남류청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후비들은 아첨하면서도 되도록 그녀를 멀리했다. 마치 그들 모자가 무슨 재앙이라도 되는 양 아무도 어린 황자를 건드리지 못했다. 괜히 다가갔다가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한단 말인가?

황후와 지위가 높은 후비 몇 명은 모두 황제의 곁에서 함께 손님을 응대했다. 남류청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술잔을 들고 진전에게 다가갔다. 얼굴에는 그럴듯한 미소를 띤 채,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는 듯했다. 하지만 주변이 떠들썩한 덕분에 그들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아이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돌아와 버렸으니… 아마 이제는 도망도 못 갈 거예요.”

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이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제, 진제秦霽, 어떻습니까? 괜찮습니까?”

그녀는 그를 놀리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 당신 아이라고 생각해요?”

순간 표정이 굳어진 그는 딱딱한 말투로 확신했다.

“저는 제 아이가 맞는다고 확신합니다.”

그녀는 그에게 잔을 들어 올리고 나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진전은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그녀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돌아섰다. 곁눈으로 살펴보니 황제의 시선이 그들에게 닿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녀는 진전에게는 그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녀라든가, 아이라든가. 이게 그의 소원이라면 그녀도 더는 그를 책망할 수 없었다.

진전이 실종된 지 한참이 지났을 때, 황제는 이미 새로운 금군 통령을 임명했다. 게다가 현재 진전의 상황으로 볼 때, 그를 다시 금군 통령으로 임명하는 건 적절하지 않았다. 다친 곳도 많았고, 몸 상태도 예전 같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그를 내무부의 부총관으로 임명했다. 내무부 부총관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책이었다. 비바람을 맞으며 훈련할 필요도 없이 편안하게 녹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사석에서 황제는 옛정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며 칭송했다.

그러나 진전과 남류청만은 이번 직책이 단순한 호의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 * *

비록 진전은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 황제에게 꼬투리를 잡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를 비난하는 상소문이 올라왔다고 했다. 진전은 무장이라 음모를 꾸미거나 권모술수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무부에서 부리는 농간을 진전도 듣기는 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증거가 제시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반박할 여지조차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황제가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도성으로 돌아온 진 대인은 그렇게 하옥되었고, 황제는 자신의 호의를 저 버린 것에 진노하여 참수형을 내렸다. 이번에는 정정당당하게 진전을 죽이려는 것이다.

남류청은 자신이 황제에게 가서 용서를 빌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만약 황제가 원하는 게 그녀가 머리를 숙이는 것이라면 그것쯤은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늦은 밤. 그녀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진 대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모두 신첩의 잘못입니다.”

황제는 그녀를 보며 냉소를 지었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이냐?”

“신첩이 그를 망쳤습니다.”

“그를 좋아하느냐?”

“아니요. 신첩은 도망치려고 그를 이용했을 뿐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말했다.

“내 짐작도 그러하다.”

그는 흥 하고 코웃음 쳤다.

“짐은 네가 그의 생사를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다.”

그에 그녀가 대답했다.

“그가 밖에서 죽었다면, 신첩은 상관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차마 눈앞에서 죽는 건 그냥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웬일로 솔직하구나.”

황제는 비아냥거리며 웃었다.

“이제 보니, 넌 짐이 생각하는 것만큼 차가운 사람은 아니구나.”

“신첩은 사람을 해칠 생각까진 없었습니다. 그저 이 모든 것들은 신첩이 돌아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진 대인을 한 차례 처벌하셨습니다. 그가 돌아온 것 또한 구사일생이겠지요. 이왕 살아 돌아왔으니, 폐하께서는 그에게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그에게 기회를 주면? 몰래 만나려고?”

“신첩이 그와 단둘이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설령 만난다 한들 폐하의 눈앞에서 만날 겁니다.”

황제는 황자의 백일잔치 날, 모든 사람 앞에서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진전과 대화했던 걸 떠올렸다. 진전의 자리가 구석에 있어서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그런 자리에서 그들은 어떤 다정한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황제는 한참 침묵에 잠겼다.

“앞으로는 짐 앞에서도 만나지 말아라.”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황제는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입을 열었다.

“짐을 너무 탓하지 말거라. 너를 빼앗기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녀는 나지막히 대답을 내뱉으며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황제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 * *

감옥은 어둡고 습했지만, 그간 진전이 머물렀던 곳들에 비하면 쾌적한 편이었다. 그는 책상다리를 하고 차분하고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전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같지 않았다.

잠시 후, 감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누군가 들어와 그의 앞에 섰다. 천천히 눈을 뜬 그는 황제를 보았지만 일어서서 예를 행하지 않았다. 황제는 손을 들어 모두를 물러나게 했다. 그는 진전과 단둘이 대화하고 싶었다.

“귀비가 짐에게 너를 죽이지 말고 용서해 달라고 사정했다.”

뜻밖이었다. 남류청은 총명한 사람이었다. 황제에게 사정해 봤자 정반대의 결과가 만들어지고 그녀 또한 화를 피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전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인정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이던 여자가 마침내 그에게 다정한 면모를 보였다.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귀비 마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이 모든 것은 소신의 잘못입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허, 귀비는 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던데 너도 자기 잘못이라 하다니… 도대체 누구의 잘못이냐?”

“소신의 잘못입니다. 귀비 마마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소신이 미색을 탐한 것이니 소신을 죽여 주시옵소서.”

황제는 냉소를 지었다.

“네가 죽어 마땅한 대죄를 지었다는 건 아는구나.”

진전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소신이 춘륜에 가기 전, 폐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살아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소신, 폐하를 위해 천신만고 끝에 죽음에서 도망쳐 왔습니다. 소신은 폐하께서 소신이 돌아오길 원하신다고 여겼습니다.”

“진전.”

황제가 말했다.

“짐과 너는 군신 관계일 뿐만 아니라 한때는 둘도 없는 친우였다. 친우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말도 못 들어 봤느냐?”

진전은 시선을 떨구었다.

“소신도 알고 있습니다.”

황제는 역정을 내며 소리쳤다.

“그런데 넌 어찌 행동했느냐?”

“소신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진전은 일어나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렸다.

“다 소신의 잘못이니 제발 그녀와 아이는 살려 주십시오.”

황제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비는 짐이 사랑하는 여인이고, 화아는 짐이 사랑하는 아들이다. 짐이 잘 돌봐 줄 터이니 걱정하지 마라.”

말을 마친 황제는 밖으로 나갔다. 진전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 * *

며칠 지나지 않아 진 대인이 처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때 남류청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덕마가 전한 소식에 남류청은 놀라서 손을 떨었다. 찻잔이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고, 찻물이 여기저기 튀었다. 덕마는 당황해서 얼른 여기저기를 살폈다.

“마마, 화상을 입으신 것 아닙니까?”

남류청은 망연자실한 채 멍하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손이 미끄러졌어.”

탁려는 쪼그려 앉아서 찻잔 조각을 치우며 덕마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니? 그렇게 달려와서 말하니 마마께서 놀라시잖아!”

남류청이 말했다.

“정말 충격이긴 하구나. 폐하께서 사면하셨다고 하던데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지?”

탁려가 대답했다.

“아마 폐하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진 대인은 폐하와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아마도 귀신에게 홀려서 이런 짓을 저지른 것 같습니다. 정신이 들고 나니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겠지요.”

덕마가 이어 말했다.

“다들 밖에서 너무 고생하고 돌아온 진 대인의 성격이 변해 탐욕을 부렸다고 합니다. 원래는 죽을죄를 지었지만, 폐하께서 사면하시니 양심에 가책을 느낀 거죠. 감옥에서 반성하곤 순간적으로 자결한 것 같습니다.”

그녀는 한참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담담하게 물었다.

“정말 죽은 게 확실하니?”

“당연히 확실하죠.”

덕마가 말했다.

“이미 검시도 했고, 입관까지 마친 걸요. 진가 사람들이 관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장을 칼로 후비는 것처럼 격렬한 통증이 이어졌다. 그제야 그녀는 자기도 진전에게 감정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가 아무리 멍청하고 바보 같았어도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슬픔이 밀려왔다.

다만 그녀는 그를 잃은 슬픔을 마음속 깊이 간직할 뿐,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가 진전의 죽음을 전해 듣고는 스스로 서재에 갇힌 채 먹지도, 마시지도, 누구와 만나지도 않았다.

사적나는 남류청에게 황제를 위로하길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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