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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19)화 (1,019/1,192)

제1019화

“야족인夜族人들이 왜 또 나타난 것인가? 정말 이놈의 망령은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군.”

“누가 가더라도 다 죽는 거 아니겠소?”

“그 망할 춘륜春倫은 절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닐세. 굶어 죽지 않으면 얼어 죽는다고.”

황제의 목소리가 높은 단상에서 들려왔다.

“어떠한가? 친애하는 경들 중 누가 야족인들을 남김없이 쓸어버리겠는가?”

그 말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고개를 드는 이도 없었다. 다들 황제와 눈이 마주치면 춘륜으로 가서 야족인들과 싸워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진해서 출정할 무장이 없다?”

황제는 한 바퀴 휘둘러보더니 호명했다.

“배 대인, 어떠한가?”

배 대인은 얼른 앞으로 나와 공수를 올리며 아뢰었다.

“폐하, 소신의 노모가 지금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소신은 아무래도…….”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 대인은 효심이 갸륵하군. 짐도 차마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할 수는 없으니, 배 대인은 빠져도 되오.”

그는 시선을 뒤로 돌렸다.

“양 대인?”

양 대인은 대오에서 나와서 억지로 웃었다.

“폐하, 소신은 방금 와투성에서 방비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말하지 않았다면 짐이 잊어버릴 뻔 했군. 양 대인, 그동안 고생 많으셨소. 이번엔 가지 않아도 되오.”

그의 시선이 더 뒤쪽으로 옮겨졌다.

“진 대인?”

진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황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간 그를 괴롭히던 의문이 한번에 풀리는 듯했다. 그날 작은 숲 담벼락에서 황제는 남류청과 자신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

진전은 대오 앞으로 나가 공수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폐하, 소신이 가겠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진 대인이 짐의 근심을 함께 나누어 준다니 다행이군. 일이 급하니 즉각 떠나게.”

진전은 떠나기 전 황제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갔다. 그가 황상의 곁을 떠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지만, 임무를 수행하러 나갈 때마다 황제를 찾아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군신일 뿐만 아니라 한때는 친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관례대로 몇 마디 당부를 남기고 진전의 어깨를 두드렸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아 보였다. 황제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는 순간, 진전은 자신이 춘륜이 아니라 전혀 위험하지 않은 곳으로 가는 듯한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떠나려는 그를 황제가 불렀다. 황제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더 짙어졌다.

“진전, 지난번에 말했었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게 누구냐?”

진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짐에게 알려 주면 안 되겠느냐?”

진전은 침묵했다. 황제도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물었다.

“짐에게 말해 보거라. 그녀를 위해 죽을 수 있겠느냐?”

진전은 계속 침묵하려 했지만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입에서는 굳은 각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 그녀를 위해서라면 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

황제는 또 한 번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신이 한 말을 명심하거라.”

진전은 황제를 보면서 그의 눈동자에 담긴 뜻을 이해했다.

“가거라.”

황제의 입가에 있던 웃음기가 옅어지고, 이내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진전은 주저하지 않고 문으로 돌아섰는데, 황제가 쉰 목소리로 다시 그를 불렀다.

“진전, 그래도 살아서 돌아오너라.”

깊게 숨을 들이마신 진전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신, 꼭 돌아오겠습니다.”

* * *

진전이 떠난 지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남류청은 이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폭신한 의자에 기대어 서책을 읽다가 덕마가 전하는 말을 들었다.

“마마, 앞으로는 진 대인에게 트집을 잡으실 일도 없을 겁니다.”

그녀는 무심하게 물었다.

“어째서?”

“진 대인께서는 춘륜으로 야족인을 물리치러 가셨어요.”

그 말에 그녀는 천천히 서책을 내려놓았다.

“그게 언제 벌어진 일이야?”

“진 대인이 출발하신 지 이미 이틀이 지났어요. 마마께서는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그런데…….”

덕마는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은 좀 이상합니다. 금궁을 관할하는 진 대인은 보통 출정하지 않는데……. 폐하께선 왜 하필이면 진 대인을 보냈을까요? 게다가 춘륜은 그리 좋은 곳도 아니에요. 이곳 패륜이도 춥지만, 춘륜은 여기보다 훨씬 춥습니다. 입김마저 순식간에 얼어 버려요. 춘륜인 말고는 아무도 그곳에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덕마는 남류청이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자 신이 나,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게다가 야족인은 신출귀몰하고 깊은 산속에 살면서 짐승 가죽을 입고 생고기를 먹어요. 심지어 배고프면 사람까지 먹는다고 합니다.

예전에도 그들이 우리 몽달을 침범했는데, 산에서 내려와서 식량을 빼앗고 사람도 납치해 간 적도 있었어요. 그때 피해를 본 곳은 비단 몽달만이 아니었죠. 오마, 북도, 나사 등 주변의 소국들도 그들에게 피해를 봤습니다.

몇 년 전에 폐하께서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야족인들을 소탕했습니다. 듣기로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했지만 적지 않은 수가 도망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거의 피해가 없었어요. 그런데 왜 또 이번에 나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남류청은 심장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금군 통령이 갑자기 위험한 곳으로 파견되다니…….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그녀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곤청롱은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침내 진전을 처리한 것이다. 다음 순서는 당연히 그녀 차례이리라.

진전을 떠올리니 그녀는 마음이 좀 불편했다. 결국 그 바보 같은 사람을 말려들게 했다. 그녀는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전을 해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를 남원으로 데리고 가려는 생각까지 했다.

그녀는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황제는 분명 그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는 또 한 가지 소식을 들었다. 황후의 오라버니가 횡령 사건에 휘말려 관직과 작위를 빼앗기고 평민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바로 이것이 황후에 대한 처벌임을 깨달았다.

황제는 고의로 엄포를 놓아 겁을 주는 방식으로 황후에게 경고를 보냈다. 세 사람이 저지른 일에 두 명은 이미 처벌을 받았으니… 이제 그녀 한 사람만 남았다. 황제는 그녀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까?

그녀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황제는 역시 권모술수의 고수였다. 그들이 경계하고 있을 땐 가만히 있다가 그들이 경계를 풀자 하나씩 처단했다.

그녀는 모퉁이에 있는 구리 향로에서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오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가볍게 배를 어루만졌다. 곤청롱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남류청 모자를 죽음으로 내몰까?

처음에 그녀는 아이를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배 속에서 아이가 자랄수록 모성애가 커져, 어느새 아이에 대한 기대와 감정이 점점 충만해졌다.

비록 천자의 가문은 혈육의 정이 옅지만, 그녀는 아직 배 속에 있는 이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무엇으로 아이를 보호할 수 있겠는가? 곤청롱이 죽이려 한다면 죽음을 기다리는 것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느냐? 짐이 들어온 것도 모르다니.”

황제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황제를 보았다.

방 안은 그리 어둡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잘 보이지 않았다. 얼굴도 흐릿했고, 입가에 떠오른 웃음도 가식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이 바로 군왕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진정으로 생살여탈권을 쥔 군왕으로, 누구도 그를 좌지우지할 수 없었다. 그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그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녀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폐하께서 오늘은 어인 일로 이렇게 일찍 오셨습니까?”

황제는 그녀의 손을 살살 문질렀다.

“태의가 임신한 여자의 몸은 불처럼 뜨겁다고 했는데… 너의 손은 어찌 이리 차가운 것이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아마 신첩은 선천적으로 이런 기질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황제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그간 자신을 지칭할 때 저라는 말을 즐겨 썼는데, 별안간 신첩이라고 하니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그는 곧 남류청이 그에게 어떤 암시를 주려고 신첩이란 호칭을 사용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황제는 그녀의 배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세월이 정말 빨리 지나가지 않느냐. 곧 연말이니 새해에는 아이를 만날 수 있겠구나.”

그녀는 그의 손등에 자기 손을 얹고 물었다.

“폐하께서는 이 아이를 예뻐해 주실 겁니까?”

“당연하지.”

그가 말했다.

“너의 아이가 아니냐? 짐은 당연히 좋아할 거다.”

그녀는 심장이 굴러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너의 아이라고 말했다.

그는 깜짝 놀라 눈을 치켜뜬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한 생각은 하지 말고 태교에 전념하거라.”

각자 모호한 말을 주고받은 그들은 서로의 의도를 다 알아챘다.

창밖에는 언제부터인지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바람은 한 점도 불지 않았다. 가득 피어난 설화는 목화솜을 손가락으로 비벼 당기듯 아래로 늘어졌다. 마치 한 폭의 움직이는 그림 같았다. 창밖에는 설경이 펼쳐져 있었고, 창문 안에는 서로를 의지한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지금의 고요함을 깨뜨리기 싫은 듯,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문득 평안하고 조용했던 세월을 떠올리자 그녀는 모든 게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단지 허울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꿈같은 그 세월은 제왕과도, 그녀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은 냉혈한이었기에 속임수와 배신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 * *

새해는 어김없이 다가왔다. 패륜이는 펑펑 쏟아지는 눈으로 온통 새하얗게 뒤덮였지만, 황궁 안은 오히려 시끌벅적했다.

이날은 황제가 일 년 동안 고생한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해 큰 연회를 베풀었다.

가느다란 대나무가 들보를 감싸고, 가무가 끊이지 않았으며 술잔이 서로 뒤엉켰다. 밖에는 차디찬 설경이 펼쳐졌지만, 궁궐 안에는 봄기운이 벌써 찾아온 듯했다.

남류청은 마구간 기둥 옆에 서서 손화로를 들고 진전을 떠올렸다.

한 달 동안 소식이 끊긴 그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인지 저세상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도 세도가에서 태어났기에 그의 부친과 형은 지금 대전에서 황제와 함께 있지만, 누가 감히 황제 앞에서 그의 이름을 꺼내겠는가?

새로 금빛 꽃을 피운 세도가에서 쓸모없는 바둑알은 버릴 수밖에 없었다. 백 년이 된 세도 가문이라도 그들이 의지할 곳은 여전히 지고지상한 황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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