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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18)화 (1,018/1,192)

제1018화

건성으로 연극을 보던 황제는 문 앞에서 기웃거리는 한 시위를 발견했다. 그가 일어나자 황후는 깜짝 놀라 따라 일어섰다.

“폐하, 어디를 가십니까?”

“짐이 술을 과하게 마신 듯하오. 잠시 좀 다녀오겠소.”

이건 소변을 보고 오겠다는 뜻이었다. 황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어서 다녀오세요. 재미있는 부분이 이제 곧 시작될 겁니다.”

황제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장포 자락을 젖히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은월은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어찌 가 버리셨답니까? 조금 이따가 있을 일은…….”

“폐하께서 돌아오시지 않으셔도 본궁이 그들을 잡으면 된다. 많은 사람이 직접 볼 것이니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 * *

진전의 침묵에 남류청은 해맑게 웃었다.

“왜 날 보고 또 말이 없어요? 요 며칠 좀 이상하던데…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요?”

진전의 눈길이 그녀의 배에 머물었다. 그는 긴장한 듯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보이지 않아요?”

남류청이 양팔을 벌리고 한 바퀴 돌자 진전은 깜짝 놀라 그녀를 붙들었다.

“조심하십시오. 임신한 몸이 아니십니까?”

남류청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폐하와 똑같이 이런 작은 일에 놀라고 걱정하세요?”

“이 아이는…….”

진전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누구의 아이입니까?”

남류청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어쩐지 좀 이상하더라니……. 이 아이가 진 대인의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닙니까?”

진전은 진지하게 말했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그날 밤에…….”

“만약 당신 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진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은 임신한 몸이니 어렵지만, 몸을 풀고 나면 방법을 찾아서 당신과 아이를 데려가겠습니다.”

“어디로 데려가게요?”

“남원으로.”

남류청은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당신은 내게 잘해 준다니까요.”

잠시 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얘기를 하려고 나를 만나자고 한 거예요?”

진전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절 불러낸 건 당신이지 않습니까?”

남류청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 서둘러 말했다.

“얼른 이곳을 떠나세요. 아마 우리를 잡으러 사람들이 오고 있을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난 신경 쓰지 말아요. 꼭 기억하세요. 난 당신밖에 없어요.”

진전은 주저하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남류청은 그 자리에 서서 냉소를 지었다. 황후가 가만히 있지 않을 줄은 알았다. 이제 보니, 올가미를 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서 있다가 작은 숲 쪽으로 돌아섰다. 몇 걸음 못 가 그녀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황제가 나무 아래에서 양손을 늘어뜨린 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남류청은 켕기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미소 띤 얼굴을 치켜들었다.

“폐하, 어찌 나오셨어요?”

“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했단다.”

황제가 다가와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더니 투덜거렸다.

“손화로를 들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차가운 것이냐? 이렇게 추위를 타면서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야?”

남류청은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안심했다. 그녀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어리광을 부렸다.

“폐하께서 절 좀 따뜻하게 해 주세요.”

황제는 그녀에게 손화로를 쥐여 주고 그녀의 손등을 감쌌다. 그녀를 힐끔 쳐다본 그는 살짝 화를 내듯이 말했다.

“너는 항상 짐을 괴롭힐 생각만 하는구나.”

두 사람이 다정하게 대화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왔다.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은 황후였다.

황후는 황제를 계속 기다릴 수 없어서 먼저 사람들을 데리고 간통 현장을 잡으러 왔다. 작은 숲은 햇빛이 환하지 않고 수풀이 우거져서 은밀히 만나는 데 제격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은 남류청과 황제였다. 황후는 음식을 먹다가 목에 걸린 것처럼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아연실색하여 발걸음을 멈추었다. 황제가 웃으면서 물었다.

“황후는 어찌 이곳에 오셨소?”

황후는 그의 냉담한 미소에 약간 주눅이 들어서 더듬거렸다.

“신첩은 폐하께서 안 돌아오셔서 그냥… 그냥 나와 본 겁니다.”

황제가 놀리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

“짐이 설마 자신의 황궁에서 길을 잃어버릴까 걱정한 것이오?”

그는 황후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다들 짐을 찾아 나왔다니… 짐의 비들은 참 다정하오.”

* * *

황후는 궁으로 돌아와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류청과 함께 있는 건 분명 진전이어야 하는데, 어떻게 황제로 바뀌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황제는 황후가 함정을 팠다는 걸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아무 말 없다는 건 따질 생각이 없다는 것일까? 그녀는 과연 황제가 진전을 봤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은월은 따뜻한 우유차를 건네며 말했다.

“마마, 따뜻한 차 한잔 마시며 몸을 녹이세요.”

황후가 찻잔을 받으며 물었다.

“진전이 가는 것을 확실히 보았느냐?”

“분명히 봤습니다. 그곳을 지키던 사람이 확인하고 와서 보고한 겁니다.”

은월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폐하로 바뀌었을까요?”

황후는 차를 몇 모금 마셨다.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공교로운 일이 있다고? 진전이 떠나자마자 폐하가 그곳으로 가셨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왜 그곳에 가셨단 말이냐?”

은월은 가만히 서서 한참 궁리하다가 말했다.

“마마, 폐하께서 일어나셨을 때는 남 귀비가 자리를 비운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입니다. 그때쯤에는 분명 진 대인도 그곳에 있었을 겁니다. 분명 폐하께선 진 대인을 보셨을 텐데… 설마 폐하께서 일부러 진 대인을 그냥 보내 주신 것입니까?”

“폐하께서 왜 진 대인을 그냥 보내 준단 말이냐?”

“남 귀비의 체면을 지켜 주기 위해서 아닐까요?”

황후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께서는 그런 성격이 아니시다. 그분은 배신을 절대 용납하지 않아. 하물며 그게 진전이라면 더욱더.”

은월은 또 다른 걱정거리가 하나 떠올랐다.

“마마, 소인이 보기엔 폐하께서 무언가 알아차리신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차후에…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황후도 그걸 걱정했다. 만약 황제가 진전을 보지 못했다면 황후가 괜히 남류청을 함정에 빠뜨리는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가 남류청을 생각하는 것으로 볼 때, 그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가 지금 움직이지 않는 건 단지 적당한 기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그녀는 일어나서 방 안을 서성이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걱정해 봐야 소용없다. 일단 지켜보자.”

은월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마마, 모두 소인의 잘못입니다. 소인이 일을 그르쳤습니다. 소인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황후는 봉황이 그려져 있는 기둥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어나라.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늘의 뜻이 이러하니 본궁은 누구도 탓하지 않을 것이다.”

* * *

남류청은 황제를 따라 전정으로 돌아가며 줄곧 그를 관찰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다정한 표정을 지었고, 덕마가 보양탕을 가져왔을 때도 그가 받아서 직접 먹여 주었다. 잠자리에 들 때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 줬고, 잠들기 전에도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잘 자거라.”

평온한 그의 태도에 그녀는 뭔가 이상했다.

그는 그녀가 왜 작은 숲에 갔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 곁에 왜 시녀가 없었냐고 묻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황후가 사람들을 데리고 왔을 때도 그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거기에 황후에게 하는 말에 비웃음이 담겨 있는 게, 아마도 일의 전말을 짐작한 것 같았다. 그런 건 사실 그녀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궁금한 건 진전과의 대화를 들었는지 여부였다. 그가 들었을까? 혹시 그랬다면 얼마나 들었을까?

그녀가 담 뒤로 돌아 나갔을 때, 그는 이미 작은 숲에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약간 이상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건 찰나일 뿐, 곧 평소와 같이 웃어 보였다.

이 남자는 자기감정을 너무 잘 숨겼다. 어떤 것도 그를 꺾을 수 없었다. 줄다리기에서 줄곧 밀리는 것은 그녀였다.

많은 이들이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워했고, 어떤 사람은 초조해했다. 다들 황제가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코앞에서 벌어진 음모를 절대로 간과하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이 흘러도 황제는 여전히 침묵했다. 남류청에게 묻지도 않았고, 황후를 질책할 핑계도 찾지 않았다. 그렇게 한 차례의 풍파는 조용히 넘어가는 것 같았다.

* * *

십이월이 되자 날씨는 더욱더 추워졌고, 남류청의 배는 눈에 띄게 불렀다. 그렇지만 팔다리는 예전과 다름없이 가늘었고, 뒤에서 보면 여전히 가녀린 자태를 뽐냈다.

그녀는 줄곧 유심히 황제를 관찰했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다정하게 대했다. 그녀는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고 여겼다. 그날 작은 숲에서 황제는 진전과 자신의 대화를 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진전은 그날 이후로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가능하면 남류청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황제가 불러도 가급적 남류청과는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황제와 함께 자라서 황후보다 황제를 더 잘 알았다.

다만, 그도 그날의 일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황제는 도대체 얼마나 아는 것일까? 전혀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다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그는 감히 방심할 수 없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남류청에게 괜한 민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무장들이 모여 있는 대오에서 용상에 앉은 황제를 올려다봤다. 각진 이목구비와 가만히 있어도 풍기는 위엄, 그것이 바로 몽달의 왕이며 그의 군주였다. 그는 황제를 경애하고 충성을 바쳤지만, 유독 남류청과의 일에서는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느 날은 황제에게 죽음으로 속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또 어떤 날은 자기변명만 떠올랐다. 남류청은 황제를 사랑하지 않는다. 황제는 그녀를 총애하지만, 그녀를 황후로 세울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은 황제와 달랐다. 그는 평생 그녀 한 사람만을 사랑할 것이다. 이 사랑을 어둠 속에서만 꽃피울 수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몽달 용사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의 머리를 바치는 것도 일종의 영광이었다. 그는 남류청을 위해 죽기를 원했다.

갑자기 주위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진전이 귀를 쫑긋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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