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017)화 (1,017/1,192)

제1017화

황제가 황후의 생일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자 후비들은 모두 흥분했다. 최근 황제는 남류청 때문에 패를 뒤집지도, 황후궁에 행차하지도 않았었다. 황제의 얼굴을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남류청이 회임을 해서 황제의 시중을 들기 불편할 테니 어쩌면 그녀들에게도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다.

황제가 남류청을 데리고 후궁에 행차했다. 여인들의 짙은 향기가 코를 찌르자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혹여 남류청이 그들과 부딪힐까 걱정되어 그녀를 꼭 붙잡기도 했다.

여자는 아이를 가지면 허리도 굵어지고 얼굴에도 살이 붙는다. 게다가 기미도 생기고 기분도 처진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남류청 역시 못생겨지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황제의 품에 안겨 있는 여인은 예전보다도 더 빛났고 얼굴엔 잡티 하나 없었다. 거기에 황제가 제 몸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걸 보자 후비들은 말할 수 없이 실망했지만 억지로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귀비 마마, 몸이 아주 좋아 보이십니다. 신첩이 회임을 했을 때는 계속 졸음이 쏟아져 하루 종일 정신없이 지냈었습니다.”

“귀비 마마, 회임을 하시더니 전보다 훨씬 아름다우십니다.”

“귀비 마마의 배 모양을 보니 황자가 분명합니다.”

남류청은 황제에게 기대어 그녀들의 칭찬을 듣고 있었다. 그녀가 남 귀비였을 땐 조롱만 하던 이들이 이제 황귀비가 되자 알맹이 없는 찬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이게 바로 권력의 좋은 점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로는 턱도 없었다. 남류청은 이 여인들이 곤청롱만큼 자신을 두려워하길 바랐다. 그래야만 권력의 꼭대기에 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곤청롱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없으면 저 여인들은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이다.

상석에 앉은 황제의 왼쪽엔 황후가, 오른쪽엔 남류청이 앉았다. 황후는 자리에 앉고서야 웃음을 보였다. 적어도 황제의 정신이 완전히 흐려진 것은 아니라 그녀가 황후이고, 정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황제가 그녀에게 직접 술을 권하자 황후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작년 신첩의 생일에 폐하께서 보내 주신 옥 불상이 마음에 꼭 듭니다. 폐하께서 올해 또 옥 불상을 주셔서 작년의 불상과 짝을 이루었습니다. 정말 사려 깊으십니다. 폐하.”

황제는 말이 없었다. 얼핏 들으면 좋은 말 같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뼈가 있는 것 같았다. 황후는 부드러운 솜 속에 바늘을 숨겨 놓는 사람이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의 탄일이니 황제도 그녀와 따질 생각은 없었다.

“황후가 좋아하면 됐소.”

그때 보모가 태자를 데리고 왔다. 겨우 두 살 남짓한 태자 곤청유는 씩씩하게 작은 술잔을 들어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소자가 모후께 축하주를 올립니다. 모후의 무궁한 행복과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저렇게 작은 아이가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모두들 웃었다. 황제가 손짓을 하자 황후는 얼른 말했다.

“유아, 부황께서 부르신다.”

곤청유가 짧은 다리로 곤청롱에게 뛰어갔다. 곤청롱은 곤청유를 안아 제 다리 위에 앉히고 어린 양고기를 먹였다. 아이는 볼에 잔뜩 고기를 넣고 꼭꼭 씹어 먹었다. 눈도 크고 동그란 것이 정말 귀여웠다. 곤청롱이 아이와 장난을 치며 이야기하는 모습에 황후도 맞장구를 쳤다. 세 식구의 모습이 퍽 즐거워 보였다.

몰래 남류청을 살펴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신이 나서 커다란 소갈비를 뜯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회임한 그녀는 술을 마실 수 없었다. 한데 화비는 그 사실을 잊은 것인지 혹 고의였는지 남류청에게 술을 권했다. 남류청이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잔을 받으려는데, 별안간 곤청롱이 잔을 빼앗았다. 이내 그는 고개를 젖히고 그대로 들이켰다.

화비는 황제가 책망할까 두려워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황제는 아무 말도 없이 잔을 내려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태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들 모두 그 작은 소동에 깜짝 놀랐다. 황후, 태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줄 알았던 황제의 신경이 반은 남류청에게 쏠려 있었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잔을 뺏을 수 있었겠는가? 그의 섬세한 보호를 받는 남류청을 보고 다른 여인들은 피라도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황후는 태자를 데리고 오면 황제가 그들 모자의 중요성을 깨달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그들을 상대하면서도 마음은 오직 남류청을 향해 있었다. 황후는 어찌나 이를 악물었는지 입안에 비릿한 피비린내가 번졌다.

남류청도 조금 놀랐다. 황제가 여기서 이런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뭘 위한 것인가? 오늘 이런 자리는 그녀에게 어떤 타격도 주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궁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그녀는 남자 하나가 여러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는 것에 익숙했다. 그녀의 부황도 많은 후비가 있었고, 그녀 또한 앞으로 여제가 되면 그녀에게도 후궁이 생길 것이었다.

그녀는 늘 강자만이 이런 권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녀는 비의 신분이니 비가 감수해야 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군주는 언제까지고 굳건하게 자리를 지킬 테지만, 총애받는 비빈은 언젠가 흘러가는 물처럼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군왕의 총애가 한 사람의 곁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 그게 바로 궁정의 법칙이다.

황제는 그녀가 계속 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 편도로 만든 음료 한 잔을 그녀 앞으로 밀었다.

“입맛이 좋다고 너무 많이 먹지 말거라. 속이 더부룩하면 또 소화를 시켜야 하니.”

“전 혼자가 아닌걸요. 배 속에 한 명이 더 있어요.”

황제가 웃기만 할 뿐 다른 말은 없었다.

비빈들은 버릇없는 그녀의 태도에 남몰래 구역질을 했다. 황후 역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런 황후를 보자 비빈들의 마음은 오히려 편해졌다. 황후도 저리 속을 썩이고 있는데 그녀들이 더 질투를 하겠는가?

비록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탄일 연회는 좋은 분위기에서 마무리되었다. 황제는 남류청을 살뜰히 챙기면서도 황후를 냉대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즐거워했다. 하지만 정말로 즐거웠는지는 스스로만 알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다들 연극을 보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중요한 날에만 무대를 선보이는 광대들의 연극에 궁비들 모두 기대가 많았다. 궁에는 따로 연극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모두들 의자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시끄럽다는 이유로 연극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자가 흥미를 보이자 그를 데리고 연극을 보러 갔다. 황후도 빙그레 웃으며 왼쪽에 앉았다. 황제는 오른쪽의 빈 의자를 보고 사적나에게 물었다.

“귀비는?”

“방금 귀비 마마가 밖에 계신 것을 봤습니다. 바람을 쐬고 들어오실 것 같습니다.”

황제가 짧게 대답하고 다시 물었다.

“누가 따라갔는가?”

“덕마와 탁려가 함께 있습니다.”

황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돌려 무대를 보았다. 잠시 후 남류청이 들어와 그의 오른쪽에 앉았다. 황제가 그녀의 손을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차가운 것이냐, 손화로는?”

“덕마가 숯을 채우러 가져갔습니다.”

“방금은 어딜 갔었던 것이야?”

“속이 더부룩해서 밖에서 소화 좀 시켰습니다.”

황제가 웃었다.

“그러게 많이 먹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많이 먹으니 속이 더부룩하지.”

황후는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으면서도 담담함 표정을 지었다. 오직 태자를 볼 때만 그녀의 눈빛에 온기가 돌았다.

무대 위에서는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남류청는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을성 있게 앉아 있던 그녀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제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어딜 가느냐?”

남류청은 일어나자마자 그의 손길에 이끌려 다시 앉아야 했다. 그녀는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많이 먹어서 뒷간에 좀 갔다 오려고 하는데, 그것도 안 됩니까?”

황제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짐은 너를 걱정하는 것뿐이다. 몸이 무거운데 혹여라도 넘어지면 어떡하느냐? 짐이 함께 가겠다.”

남류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다독이며 달랬다.

“폐하, 오늘 황후의 생신을 축하하러 오신 겁니까, 아니면 황후 마마가 저에 대한 원망을 키우게 하려 오신 겁니까? 다른 비빈들의 눈빛이 실체를 가질 수 있었다면 저는 진작에 꿰뚫려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황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짐이 네게 관심을 가져도 잘못되었다고 하느냐?”

“오늘은 황후의 생일이니 폐하께서는 착실하게 황후 마마와 연극이나 보시면서 마마의 체면을 세워 주십시오. 황후 마마께서 저를 미워하시면 배 속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황제는 안색이 살짝 굳었다. 그는 자기가 그녀를 너무 버릇없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말을 감히 내뱉다니. 어떤 것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야 평화가 유지되는 법이었다. 그는 손을 놓으며 불쾌한 듯이 말했다.

“빨리 갔다 오거라.”

남류청은 그의 기분이 상한 걸 눈치채지 못한 듯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황후는 시선을 무대 위에 두고, 곁눈질로 옆에 서 있는 은월과 눈을 맞추었다. 은월은 모든 것이 순조롭다는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 * *

남류청은 덕마만 데리고 나왔다. 덕마는 그녀가 변소가 있는 쪽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좀 이상하게 생각했다.

“마마, 뒷간 가시는 거 아니셨습니까?”

남류청은 손화로를 끌어안고 대답했다.

“폐하를 속인 거야. 속이 좀 답답해서 걷고 싶어서 나왔어.”

덕마는 자신의 주인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감히 군왕을 기만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다니……. 하늘 아래 그녀를 제외하면 이런 사람이 더 없을 것이다.

앞으로 한참 가면 호숫가였다. 겨울 경치는 쓸쓸했지만 방에 오래 있다 보니 호수와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날씨가 꽤 춥구나. 내 피풍 좀 가져다 줘.”

덕마는 조금 불안해했다.

“마마, 그냥 돌아가요. 혼자 계시는 건…….”

남류청이 웃으며 말했다.

“왜, 누가 날 호수로 밀어 넣을까 봐? 안심해. 난 명줄이 질겨서 쉽게 죽지 않아. 얼른 갔다 와. 여기서 기다릴게.”

하기야 사흘이나 관 속에 있었지만 주인은 죽지 않았었다. 확실히 명운이 질기고 단단할 것이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자리를 떠나며 당부했다.

“마마, 아무 데나 돌아다니지 마시고 꼭 여기서 소인을 기다리십시오.”

“알았어,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가.”

남류청는 손을 흔들어 덕마를 쫓아냈다. 덕마가 모퉁이를 돌아 모습이 보이지 않자 남류청은 호수 제방을 걷다가 비탈길에 난 오솔길로 올라갔다. 그곳은 작은 숲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진전은 과연 작은 숲에 있었다. 그녀가 다가가니 그는 돌아서서 작은 숲을 빠져나갔지만, 그녀에게 따라오라는 듯 빠르지 않은 발걸음이었다.

그들은 한 벽에 도달했다. 거기엔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오목한 모양의 가짜 문이 있었다. 진전은 문 안에 서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