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5화
그 말에 황제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진심이 담겨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그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정말 안 간다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에 불신이 느껴졌다.
“어차피 폐하께서 보내 주지 않으면 나갈 수도 없잖습니까. 하지만 이 후궁에 구속되고 싶진 않습니다.”
“그건 문제될 것 없다. 전정에 머물면 되지. 날마다 짐과 함께 지내는 것이다.”
그녀가 살짝 눈을 흘겼다.
“매일 눈앞에서 지키고 있으면 폐하께서 질리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그래도 넌 아니다.”
황제가 대답했다.
“말씀도 참 달콤하게 하십니다, 폐하.”
그녀가 웃자 황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가갔다.
“달콤한지 아닌지 어디 맛 좀 보거라.”
황제는 자기가 한 말에 곧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미 움직였으니 물러설 수 없었다. 그는 애초에 이런 달콤한 말을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녀 앞에만 서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들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흘러나왔다.
부끄러움 없는 남류청이었지만 지금은 그녀도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리곤 입술을 내밀어 그의 입에 살짝 가져다 댔다.
그 가벼운 입맞춤은 황제의 마음속에 파도를 일으켰다. 때로는 듣기 좋은 말 열 마디 보다 작은 행동 하나가 나은 법이다. 그는 그렇게 화해했다고 생각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 부드럽고 뜨거운 입맞춤에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졌고, 몸도 마치 얼음이 녹듯 풀렸다.
그가 떨어지자 그녀는 더 이상 화낼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자 황제가 흡족하게 웃으며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예전의 일들은 모두 잊고 앞으로는 짐과 함께 잘 지내 보자.”
잠시 후 그녀가 조건을 내걸었다.
“폐하, 저에게 면사금패免死金牌(죽음을 면제해주는 금패)를 내려 주십시오.”
황제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에게는 이미 면사금패가 있지 않느냐. 바로 짐 말이다. 짐이 있는데 누가 감히 너에게 나쁜 짓을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짐은 영원히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믿지 못하겠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폐하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말이지요. 나중에 어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게다가 후궁에 저 많은 여인들이 모두 저를 사무치게 미워하는데, 그들이 힘을 합쳐 저에게 달려들기라도 한다면 제가 아무리 목숨이 아홉 개라도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그나마 면사금패라도 있으면 마음이 든든할 것 같습니다.”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짐이 그렇게 해 주지.”
황제는 그녀를 기쁘게 해 주려 이튿날 바로 면사금패를 줬다. 면사免死 두 글자가 큼직하게 새겨진 순금으로 만든 패. 자단 나무가 테두리를 둘렀고, 아래엔 오색 술도 달려 있었다.
남류청은 조심스럽게 금패를 품에 넣으며 웃었다.
“이제 폐하도 저를 죽이실 수 없습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재미있어 황제가 입을 맞추려는데, 그녀가 손을 들어 막았다.
“아직 병중입니다. 폐하께 옮으면 안 됩니다.”
“어제는 왜 막지 않았지?”
그러자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웅얼거렸다.
“잊어버렸습니다.”
황제는 껄껄 웃으며 그녀의 손을 치우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그가 유일하게 입을 맞춘 여인이다. 한번 그 맛을 본 이후로는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멈출 수 없었다.
* * *
남류청의 병은 곧 나았다. 그녀는 궁 안에 있기 싫어 두껍게 껴입고 밖을 돌아다녔다.
황제는 그녀가 자신을 보러 전정에 오는 걸 좋아하면서도 내심 그녀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너는 추위를 많이 타니 자꾸 나오지 말거라.”
“싫습니다. 여기서 오래오래 지내려면 이곳의 날씨에도 적응해야지요. 저 여인들은 매일 밖을 나다니는데, 저라고 못 할 게 뭐 있겠습니까?”
황제는 그 말에 마음이 한결 놓여 자신의 요패를 직접 건네줬다.
“궁은 아주 넓다. 경치가 좋은 곳들도 있으니 많이 가 보거라. 짐의 요패가 있으면 누구도 널 막지 못할 것이야.”
그녀는 보물이라도 받은 듯 호들갑을 떨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황제는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보다는 이렇게 감사를 표하는 게 더 좋구나.”
그녀는 그의 품에서 교태를 떨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러다 밖에서 낮은 기침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얼른 황제를 밀어내고 숨을 몰아쉬었다.
문밖에서 사적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대사독이 한참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 보십시오, 폐하. 더 있다가는 폐하의 대신들이 제 흉을 볼 것입니다.”
황제는 그녀가 멀어지는 걸 웃으며 지켜보았다.
전각에서 나온 남류청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진전을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그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그날 황제의 비밀을 알고 난 후, 그녀는 일차적인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아직은 진전에게 말할 수 없었다. 황제에 대한 그의 충심을 생각하면 그가 반대할지도 모른다. 이 일은 그녀 혼자 빈틈없이 준비해야 했다.
진전은 그녀를 슬쩍 보고 눈길을 돌리다 전각 문가에 서 있는 황제를 보았다. 그는 가슴이 철렁해서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 * *
곤청롱은 약속을 하나하나 지켜 나갔다. 남류청에게 면사금패 뿐만 아니라 황후에 버금가는 황귀비의 자리도 줬다. 그것 때문에 조정 대신들이 수차례 간언했지만 그는 차가운 얼굴로 반박했다. 끊없이 반박하는 대신들을 끌어내 매질을 하기도 했다. 그는 성군이었지만 오직 이 일에서만큼은 독단적으로 결정해 혼군의 싹을 보였다.
좋은 가문 출신도 아니었고 자손도 없었지만, 남 귀인은 하등 궁녀에서 황귀비까지 올랐다.
온 후궁이 시끄럽게 들끓었다. 궁비들은 눈에 핏대가 설 지경이었고 황제를 찾아가 이유를 물어보고 싶어 했다. 그녀들은 분수를 지키면서 힘들게 자손들을 낳아 기르고, 후궁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는데 돌아오는 건 고작 냉대뿐이었다. 반면 남류청은 탈출하고 죽음을 꾸며 내고, 사람들과 싸움을 일삼는데다 자식도 없는데도 총애받았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이유는 그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사람을 홀리는 불여우한테 당해 낼 수 있는 여인은 없었다. 그녀보다 아름답지 못했고, 하다못해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황후도 그 소식에 한참이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황제가 남류청을 좋아하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황귀비라는 자리까지 줄지 몰랐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황후 자리까지 대신할 게 아니던가?
처음에는 남류청이 그저 여우 같은 짓을 하며 황제를 독차지할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제 그녀에게도 위협이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은 그녀가 통제할 수 없지만, 자신의 지위에 위협이 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었다.
황후는 지난번처럼 물건을 집어던지며 성질을 부리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두려워질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남류청의 호신부護身符는 황제다. 황제가 있으면 그녀도 남류청에게 손을 쓸 수 없었고, 손을 쓰지 못하면 그녀의 황후 자리도 위험했다. 그렇게 되면 태자의 자리도 역시……. 만약 남류청이 아이라도 가진다면 황제가 그들 모자를 폐위하고 남류청 모자를 황후와 태자로 책봉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녀는 식은땀을 흘렸다.
예전에는 남류청이 미워도 천천히 손을 쓰려 했었다. 어떤 일들은 시간이 해결해 주기도 하니 그녀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남류청을 제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생각보다 심각했다. 더 이상 손 놓고 기다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서양전은 언제부터인가 물 샐 틈도 없는 철옹성이 되어 버렸다. 황후는 그 안에 사람을 심을 수도, 심지어 소식도 알아볼 수도 없었다. 서양전의 대문은 전정을 향해서만 열려 있었고, 남류청은 늘 밖을 돌아다니지만 그녀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 * *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흘렀다. 황후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또 하나 들려왔다. 남류청이 회임을 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그녀는 누군가 가슴을 마구 찌르는 것 같았다. 이제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궁으로 불러 상의했다. 남류청은 뿌리 없는 부평초였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상대하기 쉬울 것 같았지만 사실은 혈혈단신이라서 오히려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한편 회임 사실을 알게 된 남류청 역시 깜짝 놀랐다. 그녀는 늘 가져오는 보양탕이 회임을 못 하게 하는 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어전에 있을 때부터 그랬었다. 황제는 그때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필요가 없다고 분명히 말했었다. 황제의 마음이 갑자기 왜 바뀐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안심하고 있던 찰나 아이가 생긴 것이다.
그녀는 어찌할 줄 몰랐지만 곤청롱은 무척 기뻐했다. 그는 그녀의 배가 벌써 불러 오기라도 한 것처럼 늘 배만 쳐다봤다.
그가 베개를 가져다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줬다.
“날씨가 차니 당분간 밖에 나가지 말고 안에 있거라. 답답하면 짐이 일찍 와서 같이 있을 테니.”
남류청은 몰래 오른쪽 손목을 잡아 맥박을 세고 있었다.
남현속이 사람을 시켜 그녀의 심문을 닫아 놓았는데 아이를 낳으면 심문이 다시 뚫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 아이나 임신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이가 생겨 버린 게… 그녀에게도 아주 나쁜 일은 아니었다.
황제는 황후가 회임했을 때 하늘이 노래질 만큼 토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 남류청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는 조회가 끝나면 곧장 서양전으로 향했다. 정무도 서양전으로 가져가서 처리하니, 사적나는 황제가 왔다갔다하는 것이 안타까워 차라리 황귀비의 거처를 전정으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황제도 괜찮은 생각 같아 볕이 좋은 오후, 남류청의 거처를 서양전에서 전정으로 옮기고 황귀비로서 황제의 침전에 머물게 했다.
후비들은 분노에 차 한바탕 욕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아무리 욕을 한들 소용없었다. 남류청이 들을 수 없으니 욕은 하나 마나였고, 그저 저들끼리 쌓인 분을 삭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남류청은 황제의 걱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평소보다 잠이 많아졌을 뿐 어떤 변화도 없었다. 입맛도, 기분도 좋아 자신의 배 속에 아이가 생겼다는 것도 종종 잊었다.
잠을 잘 때면 황제는 그녀의 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건 이미 매일 밤 그의 필수 일과가 되었다. 이렇게 어루만지면 아기가 빨리 자라는 줄 아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