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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14)화 (1,014/1,192)

제1014화

남류청이 직접 그를 찾아오자 황제는 하루 종일 기분 좋았다.

남 귀인이 찌푸린 얼굴로 들어오고, 돌아가도 그저 좋기만 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불경하다고 했겠지만 남 귀인은 달랐다. 황제는 그녀가 연기하는 것보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훨씬 좋았다.

기분이 좋았던 황제는 그날 조금 더 일찍 서양전으로 향했다. 남류청과 함께 밥을 먹고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 아름다운 여인은 기분이 나쁜지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그녀가 기어오를수록 황제는 어쩔 줄 몰랐지만 그의 미소는 도무지 가시지 않았다.

그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기분이 좋았었다.

황제가 그녀를 안고 엎치락뒤치락 장난치자 남류청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렇게 목을 따라서 그의 몸을 더듬어 가다 보니 그의 어깨 사이로 혹처럼 튀어나온 덩어리가 만져졌다.

황제는 혹을 만지는 그녀의 손을 몇 번인가 걷어냈다. 하지만 남류청이 개의치 않고 계속 만지작거리자 그는 크게 화를 내며 그녀를 침상 밖으로 밀어 버렸다. 바닥에 두툼한 융단이 깔려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니면 크게 다칠 뻔했다.

남류청은 놀라고 두려운 듯이 그를 봤다.

그러나 그는 굳은 얼굴로 급히 옷을 입고 나갔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 남류청은 얼른 두려운 기색을 거두고 일어나 침의를 입었다.

덕마가 조용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마마, 폐하께서 왜 저리 가시는 겁니까?”

대답이 없는 남류청의 표정은 차가웠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려 하는 덕마를 막으며 말했다.

“혼자 있게 해 줘.”

덕마는 황제가 노여움에 차서 가는 것을 보고 둘이 싸운 줄 알았다. 하지만 침상 위에서 어떻게 싸울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가서 자. 들어와서 귀찮게 하지 말고.”

남류청이 도로 들어가자 덕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남류청은 침상에 누워 멍하니 천정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전에서 일했을 때도 그녀가 호기심에 그 혹을 만져 보자 곤청롱은 곧장 얼굴을 굳히며 그녀에게 경고했었다.

그리고 귀인이 된 이후에 또 한 번, 그녀는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서는 분위기가 좋은 날 물어봤었다. 하지만 그때도 곤청롱은 대충 얼버무리더니 옷을 입고 나가 버렸고, 그녀는 그 혹이 그의 금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늘 궁금했다. 그 혹에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있길래 만질 수도, 물어볼 수도 없는 것인가?

* * *

바람이 몹시 찼다. 진전은 나무 아래에서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는 남류청이 올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황제가 매일 서양전에 가니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모험을 걸고 그에게 암시했다. 그는 한참 고민하다 운에 맡겨 보기로 했다.

솨아아.

숲속에서는 날카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뭇가지들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와중에 그는 눈을 감고서 미동도 없었다. 달이 구름에 가리자 비단 같던 달빛은 사라지고 어둑한 그림자만 남았다.

바람결에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눈을 떴다. 나무 그림자 사이로 남류청이 뛰어오고 있었다. 이 어두운 밤, 그녀와 그녀의 주변만 옅게 빛나고 있었다.

진전은 그녀의 가벼운 몸놀림에 잠시 넋을 놓았다. 정말 요괴가 아닐까?

속도를 주체하지 못한 그녀가 그의 품에 안기듯 멈춰서는 바람에 진전은 몇 발짝 뒷걸음질 쳤다. 그는 두 손을 그대로 내린 채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조금만 움찔해도 그녀는 쉽게 깨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남류청은 그의 허리를 감싸며 잠꼬대처럼 말했다.

“추워요.”

잠시 머뭇거리던 진전은 그녀를 품에 안고 돌아서서 찬바람을 막았다.

“어떻게 나왔습니까?”

그의 물음에 그녀는 교활하게 웃었다.

“폐하를 화나게 해서 나가게 했지요.”

진전은 너무나 마음이 복잡했다. 여인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이 천근만근이었다.

“폐하를 화나게 하면 안 됩니다. 귀인에게 잘해 주시지 않습니까.”

그는 한숨지었다.

“잘해 주는 건 이런 게 아니에요. 나를 내보내 주는 것이 진정 잘해 주는 것이지요.”

진전은 잠시 말이 없었다.

“폐하께서는 귀인을 보내기 아쉬우신 겁니다.”

“당신은요?”

그녀는 그의 품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당신은 아쉽지 않아요?”

진전은 행동으로 대답하려는 듯 팔에 힘을 주었다. 남류청이 웃었다.

“당신도 아쉽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날 돕지요. 폐하는 당신과 달리 그저 나를 차지하고 싶은 거예요. 당신은 날 진심으로 좋아하고요.”

진전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궁전을 불태우고 싶습니까? 폐하께서 매일 서양전을 찾으시니 그 계획은 안 될 것 같습니다.”

남류청도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가 있으니 진전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여긴 너무 추워요. 바람을 피해서 이야기해요.”

황궁은 무척 커서 바람을 피할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매일 궁을 돌아다니는 진전은 어디로 가야 순찰을 피할 수 있을지 알고 있었다.

남류청은 그의 뒤를 따라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지나 작은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그 오두막은 청소 도구를 두는 곳이었다. 벽에는 기다란 비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그 밑에 키, 삽, 나무통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걸레, 수건, 그물 등 잡다한 물건으로 가득한 나무 상자가 즐비했다.

날씨가 추운 탓에 하인들이 게으름을 피우느라 청소하지 않아, 사나흘이 지나도록 사람 그림자 하나 보기 어려운 곳이었다.

진전은 깨끗한 수건 하나를 상자에 깔고 남류청을 그 위에 앉혔다. 이내 자그마한 초를 찾아 불을 붙였다. 오두막에는 창이 없어 빛이 새어나갈 염려는 없었다.

남류청은 추위를 참고 말없이 진전을 바라보았다. 진전도 별수 없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의 체온이 높은 덕에 그녀도 금세 따뜻해졌다.

그의 품에 기대 편안해진 남류청이 물었다.

“폐하가 다친 적이 있었나요?”

진전은 그 질문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왜 그런 걸 묻습니까?”

“폐하의 등에 튀어나온 곳이 있는데 만져 보니 상처 같아서요. 그런데 물어보지도 못하게 하고, 물어보면 화를 내요. 알고 있었어요?”

진전이 말이 없자 남류청은 고개를 들었다.

“알아요?”

진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남류청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

“아니, 당신은 알고 있어요.”

그녀가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내 눈을 봐요. 당신은 날 속이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진전은 그녀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그 두 눈은 어떤 마력이 있는 것처럼 그를 깊은 심연으로 끌고 들어갔다.

“묻지 마십시오, 알아도 좋을 것이 없습니다.”

진전이 끝까지 버티자 남류청은 그의 얼굴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녀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그는 마치 가슴에 깃털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진전은 그녀 때문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허리를 감싼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이 여인을 자신의 몸에 집어넣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는 견디기 힘들어 잠시 고개를 들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숙였을 땐 눈빛이 이미 흐릿해진 뒤였다…….

* * *

남류청은 감기에 걸렸다. 아침에 일어날 때 그녀는 입을 가리고 몇 번이나 기침했다.

덕마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말했다.

“아이참,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마마, 밤에 감기라도 걸리신 겁니까?”

남류청은 따분한 듯 침상에 기대 이마를 만져 보더니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좀 더 잘게.”

탁려는 걱정스럽게 그녀를 보았다.

“마마, 소인이 태의를 불러오겠습니다.”

남류청은 몽롱한지 눈을 감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이지 몽달의 겨울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침상에서 나오기만 해도 뼈가 아플 정도로 추웠다.

곤청롱은 조회를 마치고서야 남류청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불현듯 어젯밤 잔뜩 화가 나서 그녀를 침상 아래로 밀어 버린 것이 떠올랐다. 설마 그 잠깐 사이에 감기에 걸린 건 아니겠지? 그는 어젯밤 그렇게 나간 것 때문에 오늘 서양전으로 갈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남류청 이야기를 듣자 체면이고 뭐고 급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황제가 왔을 때 남류청은 침상에 기대어 생강탕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곁눈으로 황제를 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황제는 조금 화가 났지만 이내 그녀의 손을 문지르며 물었다.

“어디가 아픈 것이냐?”

남류청은 대답하지 않았다. 탁려가 하는 수 없이 주인을 대신해 대답했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마마께서 어젯밤 감기에 걸리셔서 태의가 와서 진찰을 했습니다. 다행히 별일 아니라고 합니다. 마마께서 쓰디쓴 약은 싫다고 하시어, 태의는 생강탕을 끓여 드시게 하고 또 금귤을 달여 마시면 기침이 멎을 거라 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렇게 하거라. 그래도 차도가 보이지 않으면 약을 먹어야지.”

그리곤 남류청을 돌아봤다.

“아이도 아니고 쓴 걸 싫어하나?”

얼얼한 생강차를 마시자 금세 몸에 따뜻한 기운이 퍼져 그녀의 얼굴에도 살짝 홍조가 돌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곤청롱은 심장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었다. 병이 났는데도 이렇게 사람을 홀리다니……. 이 여자는 요물이 분명하다.

탁려는 살짝 시선을 들어 황제의 안색을 살피고는 그릇을 받아 든 뒤 덕마를 끌고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황제는 침상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남류청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도 짐에게 화가 났느냐?”

남류청은 그의 말을 고개 돌려 무시했다. 그러자 황제는 체면도 던져 버리고 히죽히죽 웃으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할 줄 몰랐기에 남류청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그가 입을 맞추자마자 그녀는 있는 힘껏 얼굴을 문지르더니 화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성질부리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황제는 크게 웃었다.

“걸핏하면 성질이나 부리는구나. 그래도 짐은 받아 줄 수 있다.”

남류청은 코웃음을 쳤다.

“받아 준다면서 바닥에 집어 던지십니까?”

그 말에 황제도 정색했다.

“짐은 누가 그걸 건드리는 것을 싫어한다. 네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알면서 일부러 그런 것은 매를 버는 것 아니냐?”

남류청은 이 기회에 한번 더 혹에 대해 물어보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이미 진전에게 황제의 비밀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정을 듣고 놀라긴 했지만 비밀이 있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남원 황실도 있었으니까. 원래 황실엔 말 못 할 비밀이 있기 마련이다.

황제는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풀렸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가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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