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3화
남류청은 방금 일어난 탓에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다. 덕마와 탁려는 그런 그녀를 겨우 달래서 그녀는 보양탕 두 그릇과 어린 양고기만 조금 먹었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뜻밖에도 황후가 찾아왔다. 황후는 손화로를 들고 가만히 서서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나오는 걸 보니 괜찮은가 보군.”
남류청은 그녀 앞에서 빙글 돌며 생긋 웃었다.
“잘 먹고 잘 잤으니 이제 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황후가 얼굴을 찡그렸다.
“괜찮다면 귀인으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도록 하게. 폐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만큼 자네는 후궁에서 제법 눈에 띈다고 할 수 있네. 자네도 알겠지만 화무십일홍이니,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법을 배워 두는 게 자네에게도 좋을 걸세. 폐하께서 다들 고르게 총애하셔야 후궁도 안정될 것이야. 자네는 영특한 사람이니 내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황후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후궁의 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규율은 지켜야 하네. 폐하의 총애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굴지 말고 다른 사람과 잘 지내면 자네에게도 나쁠 것이 없네. 보이는 화살은 쉽게 피해도 몰래 쏘는 것은 막기 어려운 법이지. 자네도 내 말뜻을 잘 알겠지?”
남류청은 소매에 손을 넣고 입꼬리를 올렸다. 공경하는 태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엄하지도 않았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황후는 그녀의 ‘저’라는 말에 다시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하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음식이 정리되지 않은 탁자를 한 번 보고는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황후가 떠나자 덕마는 가슴을 두드리며 길게 한숨 쉬었다.
“마마께서 이제 겨우 좋아지셨는데 황후 마마가 생트집을 잡으시려 온 줄 알고, 소인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자 탁려가 말했다.
“마마께서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황후 마마가 감히 폐하께 맞설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후궁은 시비가 잦으니 저희도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덕마의 생각은 다른 듯 보였다.
“폐하께서 마마를 지켜 주시는데 뭐가 겁나.”
남류청은 태연하게 웃으며 덕마에게 손화로를 가져오게 했다.
황후가 찾아와 은혜니, 위엄이니 두루두루 이야기한 것을 보니 아마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잠시나마 그녀와 평화롭게 지내려는 것 같았다.
황제가 골고루 총애해야 후궁이 평안해지고, 또 상황도 좋아진다……. 또 황후는 몰래 쏘는 화살은 막기 어렵다 하였으니, 훗날 남류청이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죽는다 해도 아무도 모를 것임을 암시했다.
궁에서 생존하는 길은 그녀가 궁비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곤청롱만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그녀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다행히 그는 지금으로서는 그녀를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녀의 가짜 죽음에 대해서도 별다른 분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 그의 화가 터질 줄 몰랐다. 그 화는 그녀의 목숨까지 노릴 것이다.
그녀에 대한 곤청롱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건 제왕의 존엄을 거스를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한 애정인 것인가?
권력의 꼭대기에 오르는 것이 목표인 그녀에게 황권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발목을 잡는다면, 조금도 미련 없이 부숴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곤청롱에게 황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왜 계속 그녀를 잡아 두는 것인가?
* * *
황제는 서양전에 머물렀던 그날 이후 매일 밤 찾아와, 그녀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다 시간이 되면 얌전히 잠만 잤다. 하지만 남류청은 여전히 그가 곧 마수를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깊은 밤, 황제는 또 그녀의 발을 감싸 안았다. 남류청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장기전은 그녀의 특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곤청롱의 진면목을 끌어내고자, 발을 문질렀다. 그러자 예상대로 황제는 가벼운 신음을 하며 그 발칙한 발을 잡았다.
어둠 속에서 남류청은 살짝 웃었다. 고작 그런 걸로 그만둘 그녀가 아니었다. 다른 발을 뻗자 그는 그녀를 누르고 위협하듯 말했다.
“뭐 하는 것이냐?”
그녀의 목소리는 그에게 눌린 탓에 조금 탁했다.
“폐하께서는는 뭘 하시려는 겁니까?”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대치했다.
곤청롱의 코끝에 그녀의 은은한 향기가 맴돌았다. 모공까지 뚫고 들어와 제 안에 불을 붙이는 것 같은 향기였다. 그는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요물 같으니라고.”
그가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아플까 봐 한없이 부드럽게 했지만, 나중에는 무엇도 눈에 뵈지 않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렇게 남류청은 그를 따라 구름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다시 바닥에서 구름까지 날아올랐다.
* * *
겨울밤은 끝이 없건만, 연인과의 밤은 너무나 짧다.
남류청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날이 환히 밝아 있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으며 천천히 눈을 떠 보니, 뜻밖에도 황제가 베갯머리에서 샘처럼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눈길에 모골이 송연해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제 얼굴을 만지며 물었다.
“폐하, 왜 저를 그렇게 보십니까?”
그러자 황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했듯… 얌전히 짐의 곁에 있으면 황후 자리만 빼고 뭐든 네게 주마.”
목소리가 또렷한 걸 보니 그는 방금 깬 것이 아니었다.
남류청은 그저 웃었다.
“죽음을 꾸며도 떠나지 못하니, 남는 수밖에 없는 것 같군요.”
황제는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자연스레 그녀의 귀를 어루만졌다.
“네가 권력을 원하면 짐이 줄 수도 있다. 한데도 꼭 남원으로 가야 하겠느냐? 여기서 짐이 널 지켜 주는 것이 좋지 않으냐?”
그러자 남류청은 고개를 들고 웃었다.
“폐하께서 제게 어떤 권력을 주실 수 있는지요?”
“황후만 빼고 네가 고르거라.”
“폐하께서는 제가 권력을 가지면 후궁을 난장판으로 만들지 않을까 걱정되지도 않으십니까?”
“후궁은 전정과 같다. 총명한 사람만 남을 수 있고, 총명하지 않은 사람은 남아 봐야 소용이 없지.”
“너무 무정한 말씀이시군요, 폐하. 그들은 모두 폐하의 여인이지 않습니까.”
황제는 가타부타 않고 그저 웃었다.
“짐이 네게 권력을 주는 것은 너가 스스로를 지키기 바라기 때문이다. 후궁이란 곳은…….”
그는 코웃음 치더니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남류청은 그의 차가운 코웃음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곤청롱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가 잘해 주는 데 이유가 따로 있겠는가? 그저 그녀의 미색과 몸을 탐하기 위해서일 뿐이리라.
* * *
남류청은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도무지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손화로를 붙들고 방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어서… 그리고 곤청롱의 묘한 태도 때문에 마음이 더 초조했다.
한동안 그와 함께 지내다 보니 그녀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순간도 점점 많아졌다. 그녀에게 이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큰일을 하려면 반드시 이성과 냉정함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따뜻한 곳에 오래 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타성에 젖는 법인데 그래서는 안 된다.
남류청은 손화로를 가지고 전정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보초가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겨우 귀인 신분이었지만, 모두들 그녀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누구도 그녀에게 소홀하게 대하지 못했다.
천천히 궁문에 도착한 그녀는 나무 아래 서 있는 진전을 발견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마음이 흔들린 남류청이 탁려에게 물었다.
“진 대인은 어째서 나를 보고도 인사를 올리지 않지?”
난처해진 탁려가 대답했다.
“마마, 진 대인께서는 마마보다 계급이 높으시니 마마께 인사를 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자 남류청은 불쾌한 내색을 비쳤다.
“내가 비록 귀인이라지만 폐하께서는 나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대하신다. 그걸 진 대인은 모른단 말이냐?”
탁려와 덕마는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서로 마주 보았다.
남류청은 코웃음을 치더니 성큼성큼 진전에게 다가갔다.
“진 대인.”
“남 귀인.”
진전은 평소와 달리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탁려와 덕마는 무슨 소란이라도 일어날까 싶어 얼른 쫓아갔다.
남류청은 진 대인 어깨 너머에 있는 앙상한 나무를 보며 말했다.
“진 대인, 날 모르나요?”
“압니다.”
“아는데 왜 인사도 하지 않지요?”
진전은 난처한 얼굴이었다. 그동안 어느 후비도 제게 다가와 직접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남녀가 유별하니, 혹여 말장이 실례를 할까 해서 그랬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허리를 숙이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남류청은 코웃음 치더니 돌아서서 궁전으로 들어갔다.
진전은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뒤돌아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굳이 보지 않아도 남류청의 뜻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숲에서 그와 만나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매일 밤 황제가 서양전에 머무르니, 그녀가 기회를 잡긴 쉽지 않을 것이다.
남류청이 목을 빳빳이 세우고 들어오자 사적나는 얼른 달려 나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남 귀인, 오셨습니까.”
그녀는 손화로를 들고 거만하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뭘 하고 계시는가? 바쁘시면 그냥 돌아가겠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 귀인은 꼭 만나셔야지요.”
사적나는 손짓을 하며 안내했다.
“폐하께서 남 귀인을 보시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녀는 어전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만큼, 사적나가 그녀를 서재로 데려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곤청롱은 서재에서 상주서를 읽고 있었다. 집중하고 있던 그는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금방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나더니, 그가 자기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쩐 일이냐?”
“바람을 쐬러 나왔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가 붓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손을 뻗자 다른 이들은 눈치 빠르게 나갔다.
남류청이 다가가자 황제는 그녀를 무릎 위에 앉히고 뜨거운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갖다 댔다.
“짐이 보고 싶었던 것이냐?”
그녀가 몸을 비틀자 그는 그녀를 더 꼭 안았다. 그러곤 그녀의 목덜미까지 훑고 내려와 두어 번 입을 맞춘 뒤 고개를 들었다.
“왜 기분이 좋지 않느냐?”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황제는 재차 물었다.
“진전이 기분을 상하게 했느냐?”
그녀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그녀가 들어설 때 반갑고 놀라운 듯 던진 ‘어쩐 일이냐?’라는 말이 얼마나 우스운지. 그녀가 전정에 들어온 후의 모든 행적들을 다 알면서도 굳이 모르는 척한 것이다.
“아닙니다.”
그녀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품에 안겼다.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마침 그 사람이 운이 없던 겁니다.”
그러자 곤청롱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의 턱을 잡아당겼다.
“총애를 받더니 아주 교만해졌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