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2화
태의들은 시도 때도 없이 맥을 짚었고, 눈꺼풀도 뒤집어 봤으며 은침으로 여기저기 찔러 보다 자기들끼리 목소리를 낮춰 의논했다.
남류청은 태의들이 그저 시간을 끌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답답했다. 자신을 그렇게 미워했던 곤청롱 아닌가? 그런데 왜 그녀를 살려 내고 또 죽이려 했던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입으로 작은 산삼 조각이 들어갔다. 고약했지만 씁쓸한 맛에 점점 정신은 맑아지는 반면, 몸은 무거워졌다.
형용할 수 없는 피로가 몰려와 그녀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주변이 조용했다. 그녀는 곁에 느껴지는 기척이 하나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눈을 떴다.
그런데 어둑한 등불 속에, 곤청롱이 침상 기둥에 기대어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게 어쩌면 자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가 아직도 있을 줄 몰랐기에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한 나라의 제왕이 왜 쉬지도 않고 그녀의 침상을 지키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를 좋아해서일까? 그녀 또한 제왕의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그런 호감은 별거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곤청롱의 마음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두 번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자신감도 큰 타격을 받았다.
그렇게 멍하니 있던 그녀는 곤청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짐이 너를 다시 죽일까 봐 두렵지도 않느냐?”
남류청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죽기로 마음먹지 않는 이상, 이런 짓은 쓸데없는 일이었다.
어둑어둑한 방 안, 둘의 눈빛이 대치했다. 그들은 서로를 관찰하고, 대결하고, 탐구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죽으면 시신을 돌려보내 준다 하셨잖습니까. 저를 속이셨던 겁니까?”
“그 말 때문에 죽음을 가장한 거냐?”
곤청롱이 차갑게 웃었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었나?”
남류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어찌 한 것이냐?”
그가 다시 물었다.
“남원 무술이에요.”
“공주가 무술에도 통달했다니……. 짐이 하나 배웠구나.”
곤청롱이 웃었다.
“네가 못 하는 것도 있나?”
남류청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리 대단해도 폐하의 손바닥 안이잖습니까.”
“알면 됐다. 앞으로 이런 일은 하지 마라. 죽어도 너는 몽달에 남아야 한다.”
그 말에 남류청은 되물었다.
“어째서입니까?”
곤청롱은 대답 없이 그녀를 보았다. 그의 표정은 본심을 들켜서 거북하기라도 한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는 꿋꿋이 말했다.
“왜라니. 너는 짐의 사람이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그는 말을 마치고 나갔다.
남류청은 황제의 말에 마음이 초조해져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말에 그녀 역시 알 수 없는 무언가 느껴졌다.
한편 곤청롱은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황급히 돌아갔다.
* * *
신기하게도 남 귀인이 출상 전날 밤 되살아났다. 후궁의 여인들에게는 이보다 더 나쁜 소식이 없었다. 모든 원한은 그녀가 죽었기 때문에 사라졌던 것이었다.
그녀의 죽음에 황제는 자지도 않고 그 곁을 지켰는데, 그런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니 후궁의 여인들은 초조한 동시에 화가 났다.
죽은 지 며칠이나 지난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살아난 걸까?
곧 남류청에 관한 수많은 소문이 돌았다.
어떤 이들은 그녀의 목숨이 너무 질겨 염라대왕도 원하지 않는다거나, 그녀가 무술로 자신의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누군가는 그녀를 불사의 악령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불가사의한 소문들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두려워했다.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서양전으로 가서 사정을 알아보지 않았다.
그 덕에 남류청은 깨어나고 며칠 동안은 아주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제일 기뻐한 것은 덕마였다. 덕마는 남류청이 악령이든 아니든 그녀가 살아만 있다면 그게 제일 좋은 일이었으니 매일 싱글벙글했다. 누군가 남류청을 비난이라도 하면 덕마는 살벌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덕마는 남들이 감히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는 게 우습기만 했고, 난생 처음 기를 펴고 사는 즐거움도 느껴 보았다.
“마마, 어떻게 다시 살아나신 겁니까?”
이걸로 벌써 세 번째 질문이었다. 덕마는 굳이 방법을 알고 싶은 것보다는, 나중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남류청은 불쾌한 듯 덕마의 볼을 꼬집었다.
“한 번 죽었던 사람에게 넌 간도 크구나. 묻지 말라는데도 계속 묻고 말이야.”
덕마가 실실 웃었다.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기더라도 그때는 방법이 있으니 겁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남류청은 재차 그녀의 볼을 잡아당겼다.
“내가 또 죽길 바라는 거야?”
덕마는 얼굴을 감싸 쥐고 실쭉 웃었다.
“소인이 어찌 감히……. 소인은 그저 마마를 돕고 싶을 뿐입니다.”
그 말에 남류청은 마치 바보같이 순진무구한 여동생을 보는 것처럼 덕마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다.
“더는 묻지 말거라. 알아서 좋을 것도 없어.”
그때 탁려가 급히 들어왔다.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남류청은 귀찮다는 듯이 침상 머리맡에 기댔다.
“오면 온 거지, 왜 그리 난리야?”
그녀의 시큰둥한 반응에 두 시녀는 서로 얼굴만 마주 보았다. 침상에서 내려와 황제를 맞이해야 하는 게 기본 규율 아닌가?
그날, 황제는 그렇게 떠난 뒤로 며칠이나 서양전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태의는 매일 찾아와 그녀의 맥을 살폈고, 어선방에선 온갖 보양식을 끊임없이 보내왔다.
그녀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곤청롱의 귀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 시간에 찾아온 것은 무언가 할 말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상대할 여력이 없었기에, 모든 걸 포기한 듯한 모습으로 잠자코 그를 지켜보려 했다.
곤청롱이 들어오자 남류청은 피하지 않고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도발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눈이 잠깐 빛나는 듯하더니 그는 곧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곤청롱이 들어오자 덕마와 탁려는 눈치 빠르게 나갔다. 덕마는 나가면서 남류청에게 기회를 꼭 잡으라며 남몰래 눈짓까지 했다.
곤청롱은 침상으로 다가가 그녀를 살펴봤다.
“좀 나아졌느냐?”
남류청은 손을 펼쳤다.
“어쨌든 살아는 있습니다.”
곤청롱이 웃었다.
“짐에게 말대답을 하는 걸 보니 잘 회복되고 있나 보군.”
그는 혼잣말을 하며 요대를 풀어 의자에 걸었고, 그 위에 두툼한 도포를 올려놓았다. 그리곤 천천히 침상으로 올라갔다.
“뭐 하시는 겁니까?”
남류청이 물었다.
“날이 추우니 일찍 자려는 것이다.”
“폐하의 용상을 놔두고 왜 여기서 주무십니까?”
“왜냐니?”
그는 거침없이 그녀를 안쪽으로 민 뒤 옆에 누웠다.
잠자코 있던 그녀는 말했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그는 우습기도 하고 또 화도 났다.
“짐이 뭘 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남류청은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곤청롱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를 흘깃 보며 말했다.
“그리 보지 말고 자거라.”
그러고서 그는 곧장 눈을 감았다.
머리맡에서 일렁이는 등잔불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남류청은 어둠 속에서 곤청롱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의 숨소리가 조금씩 고르게 변하자 그녀도 천천히 잠에 들었다.
잠결에 그녀는 누군가 그녀의 손을 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고질병도 아니고…….
그는 꼭 그녀가 자고 있을 때 건드렸다. 그녀는 계속 자는 척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그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지.
또, 곤청롱은 발로 그녀의 발을 건드렸다.
원래 그녀는 이곳의 겨울에 적응하지 못했었다. 방에 불을 때도 발은 계속 찼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따듯한 발을 대고 있으니 한결 편안했다.
그는 그녀의 발을 따뜻한 자기 배 위에 올려 놓았다. 짓물렀던 건 거의 나았지만 피부엔 아직 상처가 선명했다.
따뜻하면서도 힘 있는 그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상처를 쓰다듬어 주자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머릿속이 잠깐 하얘졌다. 황제의 행동은 정말이지 너무나 기이했고… 그녀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할 수 없으면 차라리 생각하지 말자. 그녀는 황제가 발을 그렇게 계속 감싸 주니 너무 편안해 졸음이 쏟아졌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 자세로 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발이 움찔거렸다.
그때 무언가 그녀의 발에 채인 것 같았다. 황제는 잠시 앓는 소리를 내더니 얼른 그 경망스러운 발을 붙잡았다.
그러고선 두 사람은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몸을 웅크리고 있던 그는 한참 후에야 발을 놓아 주었다. 남류청은 그들 사이로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그에게서 떨어져 돌아누웠다. 그 뒤로 둘은 조용히 잠들었다.
* * *
남류청이 눈 떴을 때 이미 하늘은 훤했다. 그리고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일어나 앉자 탁려가 얼른 장막을 걷고 들어와 시중들었다.
“마마, 오늘도 누워 계시겠습니까?”
남류청은 관에서 나온 이후 매일 침상에 있었다. 하지만 너무 누워 있다 보니 몸과 머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일어나야지. 더 누워 있다가는 바보가 되겠어.”
그녀는 신발을 신으며 물었다.
“덕마는?”
“어선방에 보양식을 받으러 갔습니다.”
보양식이라는 말에 남류청은 눈썹을 찌푸렸다. 곤청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는 매일 산삼탕, 제비집, 낙타 젖과 같은 최상급 보양탕을 그녀에게 잔뜩 보내고 있었다. 그녀도 호의호식하며 자랐지만 이렇게 많이 먹어 본 적은 없었다. 오죽하면 늘 배가 잔뜩 부르다 못해 탕이라는 말만 들으면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그녀가 씻고 있는 동안 들어온 덕마는 음식을 준비했다. 이른 아침부터 보양식 말고도 어린 양고기, 삶은 닭, 바삭하게 구운 거위 물갈퀴 등으로 한 상 가득 차려졌다.
씻고 나온 남류청을 덕마가 자리에 앉히자 그녀는 불평했다.
“폐하는 역시 내 목숨을 원하시는 거야.”
황제는 그녀가 배 터져 죽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 말에 덕마는 웃었다.
“마마, 폐하께서 이렇게 잘해 주시잖아요. 마마께서 살이 빠져서 몸을 보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그의 호의를 온전히 믿지 않았다. 그녀가 건강을 되찾으면 다시 괴롭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