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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11)화 (1,011/1,192)

제1011화

조용히 앉아 있다 보니 햇빛이 조금씩 사라지며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때 사적나가 들어와 고했다.

“폐하, 소인이 옆방에 어선을 준비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드십시오.”

그러나 황제가 앉은 자리에서 미동도 앉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진 대인이 폐하와 술 한잔 하고자 합니다.”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남류청을 바라보고는 조용히 사적나를 따라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전이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곤 인사를 올렸다. 황제가 탁자 옆 의자를 가리켰다.

“앉게.”

사적나는 얼른 다가가 술을 따른 뒤 진전에게 눈짓을 하고 살짝 물러섰다. 진전이 술잔을 들었다.

“폐하, 공경의 의미로 소신이 먼저 잔을 비우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황제도 그를 따라 잔을 비우고 직접 주전자를 들어 술잔을 가득 채웠다.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보이며 물었다.

“자네도 짐이 여인 때문에 미쳤다고 생각하는가?”

진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 지난번 소신에게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있는지 물으셨지요? 소신이 폐하를 속였습니다. 소신도 한 여인을 좋아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데 그 여인도 세상을 떴기에 소인, 폐하께서 느끼시는 슬픔을 이해합니다.”

황제는 그의 말이 좀 의외였다.

“어째서 이 얘길 처음 듣는 거지?”

진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소신의 사사로운 일인지라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짐에게 말하는 것이냐?”

“소신도 폐하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소신도 폐하께서 남 귀인을 아끼셨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땅에 묻어 평안을 찾아 주는 것이야 말로 죽은 자에 대한 최고의 경의입니다. 폐하, 땅에 묻혀 평안을 얻어야 남 귀인의 혼백도 안녕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남 귀인의 혼이 외롭게 떠도는 것은 폐하께서도 원치 않으시는 일 아닙니까?”

황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외롭게 떠도는 혼이 되면 차라리 좋겠군. 그녀가 짐을 찾아오기를 기다릴 테니까.”

“설마 폐하께서는 남 귀인의 겉모습만 좋아하신 것입니까? 소신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란 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고, 또 그 사람을 우선적으로 헤아릴 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제는 작은 술잔을 잡고 두어 번 돌렸다. 진전의 뜻은 이해했다. 분명 남류청을 빨리 땅에 묻어 그녀의 환생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겠지. 시간을 끌면 그녀의 혼은 외롭게 떠돌다 구천의 벼락을 맞아 영원히 환생할 수 없을 것이다. 한참 침묵하던 황제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내 너의 말을 듣겠다.”

* * *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남류청은 그날 밤 다시 입관됐다. 빈전은 곧 떠들썩해졌지만 황제는 다시 오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면 심란할 일도 없다는 것이겠지. 황후는 그래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제대로 장례를 치러야 황제가 나중에 지난 일을 들추지 않을 것이다.

법도에 따르면 비의 장례는 사흘 동안 치르고 출상한다.

출상하는 날 저녁. 빈전은 여전히 시끌시끌했다. 덕마는 몇 번이나 울다가 혼절했고, 탁려는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날까 싶어 덕마를 부축해 데리고 들어갔다.

빈전에서 이틀 동안 통곡하던 시녀들은 피로가 쌓였다. 황후가 자리에 없으면 그들은 대충 시늉만 하거나 어딘가 숨어서 게으름을 피웠다. 승려들만이 성심껏 불경을 읽고 있었다.

황제가 오지 않으니 황후도 오지 않았고 시종들은 당직을 정해 장례를 진행하고 있었다. 후궁의 하인들 모두 황후의 뜻을 알고 있었다. 황제만 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편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뿌리도 없는 이국의 여인, 게다가 겨우 귀인이니 죽으면 그만이다. 지위를 높여 장례를 치러준 것만 해도 최대한 체면을 챙겨 준 것이니 이 정도면 됐다.

진전은 무고한 자를 죽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류청의 관을 다른 시녀의 죽음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그는 동으로 만든 솥을 준비해 관을 채울 생각이었다. 그 솥이 여인의 체중과 비슷할 테니 움직이지 않게 잘 고정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한밤중에 몰래 서양전 전각으로 들어간 그는 대들보 위에 숨어 기회를 노렸다.

시종 하나가 장막을 걷고 들어와 등불에 기름을 붓고는, 관을 한 번 보더니 몸서리치며 황급히 나갔다. 남류청이 벌써 귀신이라도 된 것 같았다.

진전은 주위를 살폈다. 모두들 몰래 자고 있었고, 승려들은 불경을 읽느라 고개도 들지 않으니 누구도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가볍게 뛰어내려 구석에 있던 솥을 옮기려 했다.

그때 불경 소리 뒤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에 누구지? 그는 깜짝 놀라 얼른 대들보로 올라가 숨었다.

흰 장막을 걷고 들어온 것은 황제였다. 일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진전의 가슴이 철렁했다.

황제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듯 관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황제가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자 진전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시간을 따져 보니 이미 임박했다. 더 시간을 끌다 남류청이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그 이후의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떡하지?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곤청롱은 마음이 복잡했다. 내일 출상을 하기 전 그녀와 작별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한데 막상 와 보니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몇 번이고 갈등하던 그는 결국 관 뚜껑을 열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얼음처럼 창백했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털끝 하나 놓치지 않고 자세히 보았다.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이다. 저 먼 이국에서 그의 곁으로 온, 눈길 한 번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짧게 머물다 간 사람. 그녀는 어쩌면 죽은 후에야 그토록 원하던 고향에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했다. 진전의 마음도 그의 발걸음에 맞춰 조금씩 가라앉았다.

하지만 장막 근처까지 간 황제는 고민하다 되돌아왔다.

진전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때마침 약효가 떨어진 남류청은 힘껏 숨을 들이쉬었다. 신선한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천천히 눈을 뜨자 시야는 아직 흐렸지만 관 옆에 선 남자가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힘없이 손을 뻗었다. 남자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희미한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남자의 입술은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진전이 자신을 걱정하는 줄 알고 위로의 미소를 보여 주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우는 것보다 더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의 호흡이 차차 안정되면서 시야도 점점 또렷해졌다. 그런데 환각이 생겼다. 왜 눈앞에 곤청롱의 얼굴이 나타난 걸까? 그녀는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것은 여전히 곤청롱이었다. 어째서 곤청롱이지? 어째서? 그녀는 힘껏 눈을 감았다 떴다.

그때, 그제서야 대들보 위에 있는 진전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역시 퍽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곤청롱이 그녀의 코밑에 손을 대자 그녀도 정신을 차리고 멍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다시 살아난 것인가?”

황제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여전히 싸늘했지만 분명 체온이 오르고 있었다. 그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류청은 얼른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다시 한 번 죽은 척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숨은 참을 수 있다 하더라도 조금씩 돌아오는 체온은 속일 수 없었다.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는 그 손이 이상하리만큼 차게 느껴졌다. 마음까지 서늘해질 만큼 차가웠다. 그 손은 턱을 지나 목까지 닿았다. 다섯 손가락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그의 목소리도 어딘가 이상했다.

“죽지 못했군. 짐이 도와줄까?”

남류청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무지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분명 그녀가 죽고 난 뒤 며칠이 흘렀을 텐데……. 어째서 곤청롱이 그녀 옆을 지키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설마 그가 자신의 계획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숨결은 아직 미약했다.

목덜미를 움켜쥔 황제의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남류청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는구나 생각했다. 억지로라도 말을 꺼내 보려 했지만 이 남자의 손아귀에 제 목숨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무슨 말을 한들 소용없을 것 같았다. 점차 숨이 막혔고,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그녀는 진전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가 구해 주기를 바랐지만, 시야가 흐려져 진전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틀림없이 죽게 생겼다고 생각한 순간 곤청롱이 갑자기 손을 거뒀다.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 그는 곧바로 입을 맞추며 관에서 끌어냈다. 불처럼 뜨거운 입술에 그녀는 바들바들 떨었다.

머리가 핑 돌 정도로 강렬한 입맞춤에 남류청은 또다시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 걸까?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그가 너무 꼭 안고 있어 온몸의 뼈에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말로 할 수 없는 괴로움에 그녀의 의식은 점차 희미해졌다.

곤청롱은 품에 안은 여인이 몸부림을 멈추자 그제야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눈을 감은 남류청의 창백한 얼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그녀의 숨결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의 코끝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 * *

남류청은 대제사에게 봉인이 된 것처럼 눈을 뜰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지만, 주변의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곁에 여러 명이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조용히 기침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녀의 맥을 짚고 있었다. 또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거나, 서성이는 사람도 있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곤청롱의 목소리였다.

“폐하, 남 귀인의 맥은 안정되었습니다. 그저 정신이 들지 않을 뿐입니다.”

태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소신도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계속 지켜봐야 합니다.”

“짐이 말해 두지.”

곤청롱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저 사람은 꼭 살아야 한다. 죽어서는 안 돼. 저 사람이 죽으면 너희들도 함께 순장할 것이다.”

태의들은 두려움에 쩔쩔맸다.

“폐하, 남 귀인의 기력이 부족해 더는 차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소신 생각엔 삼으로 기력을 보태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뭘 꾸물대느냐.”

곤청롱이 사적나에게 분부했다.

“곳간에 짐이 받은 그 산삼을 가져와라.”

그리곤 태의에게 말했다.

“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라. 반드시 살려야 한다.”

황제의 엄명에 태의들은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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