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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09)화 (1,009/1,192)

제1009화

그는 찬찬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뜯어보다 자신이 묶어 놓았던 쇠사슬을 발견했다. 옷자락을 들추자 쇠사슬 아래로 상처가 가득한 발목이 드러났다. 살갗이 모두 문드러져 딱지가 생긴 곳도, 아직 붉게 부어 있는 곳도 있었다. 여전히 피와 고름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별안간 황제의 동공이 작아졌다. 다른 일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상처가 이렇게 심각한 것만은 모르고 있었다. 상처가 덧나면서 나쁜 기운이 퍼져 허약해진 탓에 목숨을 잃은 것 같았다.

황제의 얼굴은 먹구름이 낀 듯 근심으로 가득했다. 가슴에 가득한 슬픔을 쏟아 낼 만한 구석을 찾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리의 상처가 이렇게 심각한데 왜 짐에게 알리지 않았느냐?”

황제가 여기 있으니 덕마와 탁려는 차마 목놓아 울지 못하고 소리 죽여 흐느낄 뿐이었다. 황제의 질문에 탁려가 대답했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소인이 태의원에도 가 보고 황후 마마께도 청하여 봤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마께서는 소인들에게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청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분명 마마께선 그때 이미 죽음을 각오하신 것입니다. 소인이 마마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으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탁려는 바닥에 이마를 찧기 시닥했다. 그녀를 따라 덕마 역시 엎드려 빌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또 어쩌겠나?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게다가 저 두 시녀는 마지막까지 남류청을 지킨 그녀의 심복이었다. 만일 저들을 벌한다면 구천에서 그녀가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그때 황후가 서양전에 도착했다. 복도에 서 있는 사적나를 발견한 황후는 안에 황제가 있다는 사실에 긴장했다. 황제가 왔다는 건 그녀에게 옛정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황후는 황제에게 트집 잡힐 일은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쨌건 도리에 어긋난 짓은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사적나는 황후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황후는 그의 얼굴에서 근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턱을 넘어섰다. 황후는 황제 곁에 서서 천천히 예를 올렸다.

“폐하, 슬픔을 거두십시오.”

황제가 말했다.

“황후, 남 귀인의 발을 보았소?”

고개를 올린 황후는 피와 살이 엉긴 남 귀인의 발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덕마가 그녀의 궁에 찾아와 제 주인의 발이 심하게 다쳤다고 애원하긴 했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작 살갗이 다친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거기다 남 귀인의 발이 곪는 건 황후에게는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그녀의 바람대로 된 듯했지만 그녀는 크게 놀란 척하며 역정을 냈다.

“곁에서 모시는 것들은 모두 죽은 사람이더냐! 어찌 본궁에게 아뢰지 않았는가?”

그녀는 시녀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만약 덕마가 황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소매를 걷고 그녀와 한판 싸움이라도 벌였을 것이다.

유목민의 딸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양젖을 짜던 덕마는 거칠고 강했다. 그랬던 그녀는 황궁에 들어온 후로 여기저기서 하대를 받아 왔다. 그러다가 남류청을 처음 봤을 때, 정말이지 덕마는 그녀가 선녀인 줄 알았다. 신분마저 고귀한 남원 공주는 덕마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때리지도 않았고, 소소한 선물도 자주 주었다.

덕마는 누군가 자신에게 잘해 주면 그녀도 잘 대해 주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마음속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주인이 떠났다. 거기다 황후가 그 주인을 모욕하고 있었다. 화가 난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은 황후 마마께 청을 올렸습니다. 황후 마마는 그저 가벼운 상처일 테니 며칠 쉬면 좋아질 거라고 태의를 청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미천한 시녀 따위가 감히 황후를 고발하다니! 황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의 안색이 심상치 않자, 은월은 얼른 앞으로 나서 덕마의 얼굴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 팔목은 허공에서 붙잡혔다.

은월은 제 팔목을 붙잡은 황제와 얼굴을 마주하고는 깜짝 놀라 무릎 꿇으려 했다. 그 순간, 황제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고 은월은 휘청거리다 넘어졌다. 뒤이어 황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저것을 끌어내서 호되게 쳐라.”

은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울면서 용서를 구했다.

“살려 주십시오, 폐하. 소인은 그저 마마께 불경한 모습에……. 소인이 어찌 폐하 앞에서 무엄하게 굴겠습니까?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폐하!”

황제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지금 그는 사람이라도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만 그의 앞에 목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은월은 바닥을 기어 황후의 다리를 붙잡았다.

“마마, 소인을 살려 주십시오! 마마!”

황후도 불쾌했다. 황후의 시녀인 은월을 건드는 건 그녀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남류청에게 태의를 보내 주지 않았다는 것을 벌하는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정말 그녀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을까? 알면서도 묵인한 것은 곧 허락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죽고 나니 그 죄를 제게 물다니! 황후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폐하, 은월은 신첩을 따르는 궁녀입니다. 노비가 신첩에게 불경한 행동을 하면 은월은 그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습니다. 이건 본디 저 아이의 직책인데 어째서 저 아이를 나무라십니까?”

황제가 차갑게 웃었다.

“황후는 후궁의 주인으로서 후궁을 질서정연하게 다스려야 하오. 그 또한 황후의 직책인데 황후는 무슨 짓을 한 거요? 남 귀인의 발이 저 꼴이 되었는데도 치료를 받지 못하게 하다니! 황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이 모를 줄 아시오?”

황후의 몸이 휘청거렸다. 황제는 지금 그녀를 신분 낮은 궁비 따위에게 질투를 하고 모해하는 여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 마음속에 끝 모를 슬픔이 솟구쳤다.

“폐하께서 신첩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신첩도 같이 벌하십시오.”

아무리 화가 나도 황제가 황후에게 손찌검을 할 수 없었다. 역대 조상들 중에도 황후를 때렸던 선례는 없었다. 그건 황실의 체면을 스스로 깎는 일이다.

황제는 그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없이 남류청을 보고 있었다. 그가 부르지 않으니 황후도 일어날 수 없었다. 초겨울의 바닥은 차고 딱딱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고생 한번 해 본 적 없었기에 조금만 꿇고 있어도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황제는 그녀와 부부임을 생각하며 입을 뗐다.

“황후가 시녀 대신 벌을 받겠다니… 그 시녀의 체면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오?”

한순간의 충동으로 무릎을 꿇은 것인데 황후는 곧장 후회가 밀려왔다. 황제와 대치할수록 손해를 보는 건 그녀였다. 황후는 얼른 입을 뗐다.

“신첩의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순간 마음이 약해져서 궁 안의 법도를 잊었습니다. 벌을 내리십시오, 폐하.”

황제는 그녀를 흘깃 보았다. 역시 황후다. 그녀는 어떻게 위기에서 벗어나야 하는지 아는 여인이었다.

“일어나시오.”

곁에 있던 시녀들이 황후를 일으켜 세웠다. 은월은 아직도 엎드려 있었다. 황제는 분노가 잦아들자 무력함이 느껴져 손을 흔들었다.

“곤장 스무 대를 쳐라! 목숨이 붙어 있을지는 저 아이의 운명이지.”

황후는 감사를 표한 후 함께 나갔다. 황제의 말에는 아직 여지가 남아 있었다. 때려죽이라고 하지는 않았으니 살 수 있다는 말이다. 형을 집행하는 사람은 황후의 체면을 봐서라도 전력을 다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죽을죄는 면했어도 형벌까지 피할 수는 없으니 한동안 누워 지내야 하리라.

황후가 지켜보고 있어 형을 집행하는 사람도 속으로 저울질하여 형을 집행했다. 스무 대의 형이 끝나고 은월의 등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숨은 붙어 있었다. 황후는 그게 황제의 보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때릴 수 없으니 그녀의 측근을 때린 것이다. 남류청의 발 한쪽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니 은월도 똑같이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은월을 방으로 옮겨 누인 후에야 황후는 안도하며 자리에 앉아 우유차를 마셨다. 찻잔에 아주 미세한 물결이 이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그녀는 자신이 떨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찻잔의 온기를 느끼면서 그녀는 한바탕 난리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칫하면 큰 화를 입을 뻔했다. 그 여자는 죽어서도 자신을 그냥 놔두지 않는구나!

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었다. 궁에 조용히 앉아 있던 황후는 다시 서양전으로 향했다.

두 시녀는 안에 없었고 황제 혼자 쓸쓸하게 침상 곁을 지키고 있었다. 황후가 문턱을 넘던 찰나, 문득 침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죽는다면 황제가 침상까지 찾아올지는 몰라도 절대 저토록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기 누워 있는 여인은 그가 유일하게 좋아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줄곧 남류청 옆에 앉아 있던 황제의 얼굴엔 어떤 상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황후는 알고 있었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황제가 여기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는 것을.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말했다.

“폐하, 남 귀인은 이미 떠났습니다. 시야를 좀 더 넓히시지요.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남 귀인 대신 뒷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원한 또한 연기처럼 사라지는 법입니다. 폐하, 신첩은 사리분별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 귀인은 폐하를 모신 공이 있으니 신첩이 비의 지위에 따라 장사를 치를 수 있도록…….”

황제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이미 그 사람은 없는데 체면이 무슨 소용인가. 그는 엉망이 된 남 귀인의 발을 보며 말했다.

“태의를 불러다 남 귀인의 발을 치료하시오.”

황후가 크게 놀랐다. 죽은 사람의 발은 왜 치료하라는 것인가? 황제가 드디어 실성이라도 한 것일까.

“폐하.”

황후가 완곡하게 말했다.

“지금 치료를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서 남 귀인을 땅에 묻어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발이 저렇게 상한 채로 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소. 좋아질지 아닐지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우선 사람을 불러 치료하시오.”

“하지만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이대로 남 귀인을 계속 침상에 둘 수는 없습니다. 어서 입관을…….”

슬슬 짜증이 났던 황제는 목소리를 높여 사적나를 불렀다. 그는 얼른 태의를 불러다 남 귀인의 발을 치료하라고 명했다.

사적나는 곧장 태의에게 시종을 보냈다. 그는 불진을 안고 복도에서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죽은 사람이 치료를 받는다는 건 한번도 들어 본 적 없었다. 설마 폐하가 너무 상심한 나머지 정신을 놓아 버린 것은 아니겠지.

사적나는 막막한 얼굴로 궁전 문 앞의 공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작은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깡총거리고 있었다. 그 참새는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조그만 머리로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푸드득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가냘프고 예쁜 모습을 하고 있지만 투지가 느껴지는 게 어쩐지 남류청과 닮은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죽어 버리다니. 사적나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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