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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08)화 (1,008/1,192)

제1008화

모두에게 잊힌 서양전은 세 사람만 숨 쉬고 살 뿐 아무것도 없었다. 밖을 지키는 시위도 여섯 명에서 두 명으로 줄었다. 요즘은 후궁 여인들의 발걸음도 줄었다. 매일 불쌍한 꼴을 하고 있는 여자와 입씨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낀 듯했다.

남류청은 아무런 욕망도 없는 것처럼 지내고 있었다. 밥이 있으면 먹었고, 없어도 아무 내색하지 않았다. 발의 상처도 내버려 두었다. 시녀들이 닦아 주면 닦아 주는 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도 굳이 요구하지 않았다.

밤이 깊었는데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방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초를 아끼기 위해 잠들었든 안 들었든 잘 시간이 되면 불을 껐다.

눈을 감고 있으면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진다. 그녀는 바람에 섞인 발소리를 들었다. 굉장히 가벼운 그 소리는 곧 침상 곁에 닿았다.

“왔군요.”

그녀도 아주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날이 추우니 바깥의 시위들은 일찌감치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졸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어둠 속에서 그자의 눈동자만 반짝였다.

“제가 구해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기다리려고 이런 비참한 꼴을 자처한 건 아니에요. 설령 저를 구출한다고 해도 곤청롱이 사람을 보내 죽일 거예요. 난 단번에 편안해질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해요.”

그녀의 말에 그 사람은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

“죽음 말입니까?”

“그래요, 후궁의 많은 이들이 나의 죽음을 원하니 당장 죽어도 그럴듯하겠지요.”

“저는… 아직 적당한 사형수를 찾지 못했습니다.”

“너무 번거로우니 궁에 불을 지를 필요는 없어요. 내가 죽은 척을 해야죠.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게. 내가 죽어야만 곤청롱도 마음을 접을 거예요. 그는 사랑에 미친 사람도 아니니 기껏해야 관이나 내려 주겠죠. 그리고 때가 되면 당신이 날 관에서 꺼내 주면 돼요. 절대 사흘이 지나면 안 된다는 걸 기억해요. 사흘 내로 날 구하지 못하면 아마 난… 질식해서 죽을 거예요.”

진전은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의 생사가 걸린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날씨 이야기라도 하듯 평온했다.

“하지만 당신의 발은…….”

그녀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다리를 절기밖에 더하겠어요? 목숨만 붙어 있으면 돼요.”

방 안이 너무 어두워 침상 곁에 서 있는 진전은 어둠과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남류청은 그가 아직 거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두운 눈빛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손을 줘요.”

그녀가 말했다. 진전이 머뭇거리다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손이 닿더니 그의 손을 잡았다.

“진전, 나에겐 당신밖에 없어요. 날 도와줘야 해요.”

진전도 그 손을 잡았다. 여인의 작은 손을 쥔 그의 마음속에 갈등이 일었지만, 더 이상 그녀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순 없었다.

“알겠습니다.”

어둠 속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결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반드시 돕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은 어둠 속에서 마주쳤고 두 손은 허공에서 맞잡았다. 그녀의 작은 손에 온기가 전해지고 나서야 진전은 손을 놔 주었다.

“건강 잘 챙기십시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살짝 웃었다.

“나도 목숨이 소중한 사람이에요. 절대 일찍 죽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에게는 원대한 목표가 있으니 이렇게 쉽게 죽을 수는 없었다. 사지에 몸을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꼭 살아남을 것이다.

커다란 손이 멀어지며 손끝에 남아 있던 온기도 사라졌다. 남류청은 진전이 떠나자 그가 잡았던 그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이제야 여기까지 왔다. 이번에는 모두를 속이고 살아 나갈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 * *

남 귀인이 죽었다. 이 소식이 퍼지자 궁궐은 충격에 휩싸였다. 한동안 서양전에 가지 않았던 후궁 여인들은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남류청을 불여우 같은 요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물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죽을 수가 있나.

그녀들이 조롱하고 괴롭혀도 남류청은 태연한 얼굴로 맞섰다. 제아무리 외모는 선녀가 따로 없다 한들, 속은 요물이니 제대로 먹지 못한다고 해도 이 년은 끄떡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일찍 죽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반면 남류청의 죽음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남 귀인과 같은 처지인 화 귀인도 꿋꿋이 버티고 사는데, 그녀보다 훨씬 강한 남 귀인이 벌써 죽었다니!

후궁 여인들이 서양전 문 앞에 도착하자, 안에서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서양전에 남은 두 시녀가 자신들의 주인을 위해 울고 있는 소리였다.

여인들이 마음을 가다듬고 들어가 보니 침상에 누워 있는 남류청이 보였다. 그녀는 방금 숨이 끊어진 모양인지 얼굴엔 아직 푸른빛이 돌지 않았고 그저 창백했다. 거기에 아직까지도 발목엔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옷자락 아래로 침상 기둥과 연결된 짙은 회색 쇠사슬이 드러나 있었다.

사람이 죽었으니 그에게 맺힌 원한 또한 내려놓아야 했다. 궁비들은 덕마와 탁려에게 거듭 이야기했다.

“그만 진정하게. 황후 마마께 이 소식을 알렸는가? 앞으로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황후 마마께 여쭤 봐야지.”

덕마는 우느라 고개도 들지 못했고, 대신 탁려가 울면서 대답했다.

“서양전에는 사람이 없어 두 시위에게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께 소식을 전해 달라 부탁드렸습니다.”

그 말에 궁비들은 기분이 상했다.

“너희는 뭘 모르는구나. 황후 마마에게만 알리면 될 일을! 정사 때문에 바쁘신 폐하께 무엇하러 알린단 말이냐?”

황제는 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북쪽의 합고哈庫 부족을 소탕하는 일로 군기대신과 상의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사적나가 문가를 기웃거리는 아만을 보곤 조용히 나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아만이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총관리, 서양전의 그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이 일이…….”

사적나가 깜짝 놀랐다.

“돌아가셨다니? 어찌 돌아가셨다는 것이냐?”

고개를 숙인 아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적나가 한숨을 쉬었다. 서양전의 일은 그도 알고 있었다. 처음엔 황제가 언젠간 입을 뗄 거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가도 그에게선 말이 없었다. 나중에는 황제의 기분이 상할까 염려해 아예 고하지도 않았었다. 그저 남 귀인이 이렇게 빨리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말했다.

“무슨 큰일도 아니고……. 후궁의 일은 황후 마마가 처리하신다. 폐하께는 시간 날 때 내가 아뢰면 된다.”

아만을 돌려보낸 사적나는 평소처럼 황제의 시중을 들었다. 황제가 의논을 끝내고 대신들을 모두 물리고 나자 그가 입을 열었다.

“폐하, 남 귀인이 오늘 떠나셨습니다. 마마…….”

황제는 멍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어딜 떠났다는 거냐?”

쇠사슬로 묶어 놨는데 어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사적나는 순간 멍해졌다. 황제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곤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 귀인은 이제 더는 안 계십니다.”

역시,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사적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걸 더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떠났다, 없다… 모두 죽었다는 뜻을 에둘러 말한 게 아니던가.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황제는 이미 바깥으로 나갔다. 큰 소리로 어가를 준비하라 일렀지만 황제는 들은 척도 않고 성큼성큼 수화문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보고 있던 사적나는 황급히 제 다리를 탁 쳤다.

“큰일 났다.”

그러자 곁에 있던 어린 시종이 궁금한 듯 물었다.

“대총관, 뭐가 큰일이란 말입니까?”

사적나는 언짢은 듯 눈을 흘겼다.

“저리 꺼지거라!”

시종은 아직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대총관, 어가를 준비할까요?”

사적나는 그와 쓸데없는 입씨름을 할 때가 아니었기에 황급히 황제를 쫓아갔다.

황제가 서양전에 들어섰을 때, 후비들은 이미 돌아간 후였다. 남류청이 죽었다는 걸 확인한 후비들은 곧장 자리를 떴다. 부정을 탈지도 모르는데 죽은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덕마와 탁려는 아직도 침상 곁을 지키며 울고 있었다. 황제가 오자 덕마는 곧장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폐하, 저희 마마께 좋은 관을 내려 주십시오.”

황후에게 밉보인 여인들은 죽으면 대부분 멍석에 둘둘 감겨 땅에 묻히거나 들개들의 밥이 되곤 했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무서운 일이었다. 덕마는 황후라면 남류청을 버리라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주인과 하인으로 잘 지냈으니 그녀는 좋은 관을 받아 주인에게 평안을 주고 싶었다.

덕마가 이마를 바닥에 쿵쿵 찧었지만 황제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침상의 여인에게 멈춰 있었다. 한때 그토록 아름다웠건만 이제는 생기를 잃고 창백한 얼굴과 새까만 머리칼만 남아 있었다. 입술은 완전히 익은 대추처럼 검은빛이 돌았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황제의 눈에는 그 모습조차 보기 싫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침상 곁에 앉아, 온기가 사라진 그녀의 팔목을 어루만졌다. 또,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살이 빠진 것인지 뼈가 도드라져 마치 실로 간신히 엮어 놓은 것처럼 앙상해 보였다.

그녀의 손끝을 잡은 황제는 갑자기 가슴이 아파 왔다. 통증은 작은 점에서 시작해 온몸 곳곳으로 퍼졌다. 그 순간, 그는 그녀의 죽음을 마주했다. 하지만 어떻게 죽은 것일까? 그토록 강인한 사람이……. 그녀는 황제의 눈앞에서도 음모를 꾸며서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황제가 그녀를 과소평가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녀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녀를 차마 죽일 순 없기에 후궁에 버려두고 그녀가 고생하는 걸 보고만 있었다. 후비들은 그녀를 조롱했고 황후는 그녀에게 가혹했으며 궁전의 하인들도 몇 명이나 도망갔다.

그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모욕에 비하면 이 정도 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손길이 없어도 그녀에겐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차고 넘칠 만큼 많았다. 그는 그녀의 능력을 믿었다.

그가 그녀를 과대평가했던 건가? 그녀는 끝내 버티지 못하고 이렇게 쉽게 죽어 버렸다. 그는 그녀의 죽음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된다. 오로지 남원으로 돌아가 복수하려는 생각, 즉위하여 황제가 되려는 생각으로 가득한 여자였다. 그렇게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죽다니! 그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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