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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07)화 (1,007/1,192)

제1007화

일어나 보니 온몸이 고통스러웠다. 아마 옥에 수감되어서 온갖 고초를 당했으리라. 연무에 휩싸인 옥 안에선 제대로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타는 듯한 갈증에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물…….”

마치 칼로 돌을 깎듯 거칠면서도 쉰 목소리가 나왔다.

따뜻한 물방울이 그녀의 얼굴로 떨어졌다. 그녀는 눈도 뜨지 못하고 생각했다.

‘곤청롱, 고문도 모자라 내게 이런 고통을 주다니. 물조차 입에 주지 않고 얼굴로 뿌리는구나.’

하지만, 금세 물잔이 입술에 닿았다. 그녀는 입을 살짝 벌려 따뜻한 물을 받아 먹었다. 따스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배 속으로 흘러 온몸 곳곳으로 퍼졌다.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 들자 그녀는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알고 보니, 그녀 얼굴에 떨어진 물방울은 덕마의 눈물이었다. 덕마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에게 물을 먹였다. 탁려도 충혈된 눈으로 덕마 옆에 있었다.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마마, 좀 괜찮으십니까?”

남류청이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난 목숨이 질겨서 안 죽어.”

덕마가 더는 참지 못하고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탁려가 서둘러 그녀의 어깨를 때렸다.

“밖에서 다 듣겠다!”

덕마는 심호흡을 하며 또다시 울음을 삼키곤 겨우 입을 열었다.

“마마, 어쩌다 폐하께 미움을 사서 이런 꼴이 되셨습니까?”

남류청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에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몸을 살짝 움직이자 밑에서 덜컹거리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였다. 깜짝 놀란 그녀는 덕마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한쪽 발목에 쇠사슬이 매여 있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곤청롱이 자신을 이리 개처럼 묶어 두었을 줄이야.

지난번 그의 총애를 잃었을 땐 귀인이라는 신분을 얻고 시중들까지 주더니, 이번엔 쇠사슬을 걸어 주었다. 후궁에 금족령을 당한 여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발에 쇠사슬을 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상 개에게 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남 귀인이 쇠사슬을 찼다는 소문은 후궁에 널리 퍼졌다. 후궁들은 모두 통쾌해 하며 하나둘 서양전으로 달려와 이 광경을 구경했다.

시위들이 궁전 밖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진 않았다. 후비들은 서양전으로 들어와 남류청을 보며 비웃었다. 존귀한 남원 공주가 쇠사슬에 묶이다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남원의 모든 이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후궁들은 남류청이 분명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녀는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간식을 먹고 있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오자 남류청은 오히려 쇠사슬을 흔들어 소리를 들려주었다. 누군가 놀리듯 물었다.

“세상에, 남 귀인. 발에 그게 뭡니까?”

남류청이 웃으며 말했다.

“폐하의 걸작이지요. 보세요. 팔찌를 하사하시는 건 흔한 일이지만, 이렇게 커다란 발찌를 받아본 적 있으신가요? 폐하께서 워낙 절 끔찍이 아끼셔서 말이에요.”

후비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간 뻔뻔한 자를 많이 만나 온 그들이지만, 이렇게까지 뻔뻔한 자는 처음이었다. 남류청은 공주가 아니던가? 어찌 저잣거리의 부인들보다 더 뻔뻔하단 말인가?

그녀의 두꺼운 낯짝이야 자신들과 견줄 수 없었지만, 비웃음과 빈정거림만큼은 그들 또한 지독했다. 누군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개를 묶을 때 쓰는 사슬이잖아요. 이게 어찌 남 귀인의 발에 묶여 있는 거죠? 폐하께서 귀인을 개라 여기시는 걸까요?”

남류청이 입을 가리며 깔깔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후궁의 여인들 중 폐하의 개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요? 여러분들은 묶을 필요가 없겠죠. 묶지 않아도 폐하 앞에 달려가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비위를 맞추니까요. 하지만, 전 아니거든요. 그래서 혹 도망칠까 봐 폐하께서 이리 묶어 두신 거랍니다.”

그 말에 몇몇 후비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듣기 거북한 말이긴 해도 그건 사실이었다. 그들은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방법을 궁리했지만 그의 관심을 사진 못했다. 하지만 남류청은 황제의 노여움을 사고도 참형에 처해지지 않고 후궁에 발이 묶여 있으니……. 황제가 그녀를 얼마나 중시하는지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남 귀인, 그리 자만하지 마세요. 두고 보세요. 폐하께서 이리 쉽게 용서하진 않으실 테니까요.”

남류청은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댄 채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설탕을 닦아냈다.

“그건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니 여러분들이 마음 쓰실 건 없어요.”

사실 그녀도 곤청롱이 그녀를 어찌할지 정말 궁금했다. 설마 이리 묶어 둔 채 수치심만 주고 끝내는 건 아닐 테지?

곤청롱은 바깥에 서서 방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던 그는 한참 뒤에야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저 여인을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극도로 화가 났을 땐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냉정을 되찾으니 망설여졌다. 그녀를 죽이는 건 내키지 않았다. 공모자는 분명 사내일 것이다. 시위일 수도, 시종일 수도 있을 터. 남자를 유혹하는 재주는 말할 것도 없으니 그녀라면 설령 거세를 한 사내의 혼이라도 빼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전정에 머물렀을 때 누군가를 꾀어낸 것일까? 그는 반드시 그자를 찾아낼 것이다.

전정으로 돌아온 그는 진전을 불렀다.

“남 귀인의 공모자가 누구인지 찾아 보거라. 남 귀인의 시위 행세를 도운 걸 보면 분명 궁 안에 있는 자의 짓이다. 혹여나 방비하지 못하게 조용히 찾거라.”

진전이 허리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예.”

진전이 고개를 들자 그의 안색이 퍽 좋지 않아 보였다. 곤청롱은 거뭇한 그의 눈 밑을 바라보며 물었다.

“안색이 어찌 이리 좋지 않은 것이냐?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이냐?”

“예.”

진전이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였습니다.”

곤청롱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늘 그리 지내선 아니 된다. 태의를 찾아가 불면증을 치료해 보거라.”

진전은 어린 시절부터 황제의 동무이기도 했다. 군신 관계가 되었어도 그들의 사적인 친분은 남들과 달리 끈끈했다. 진전은 고개를 숙이고 눈에 서린 감정을 숨겼다.

“태의를 번거롭게 할 필요까진 없습니다. 그저 신의 오랜 고질병이니 좀 더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래. 그만 돌아가거라. 반드시 그자를 찾아내야 한다.”

진전은 공수를 한 뒤, 발걸음을 돌렸다. 문 앞에서 다시 멈춰 선 그가 황제에게 물었다.

“폐하, 그자를 찾아내면 어찌 처분하실 것입니까?”

곤청롱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게 해 줄 것이다.”

진전은 더는 묻지 않고 성큼성큼 문턱을 넘어섰다. 죽느니만 못한 삶이라니. 그는 속으로 긴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이미 지금도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고 있거늘.

* * *

후궁 여인들은 황제가 남류청을 어떻게 처리할지 지켜보았다. 하지만 황제는 그녀를 서양전에 방치한 채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남류청을 방치하는 것은 황제가 나름대로 자신의 뜻을 밝힌 것이다. 황제의 노여움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는 뜻이니 남류청의 상황도 금방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남류청이 어째서 황제의 노여움을 산 것인지, 그날 가을 사냥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모두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었다.

다들 짐작은 했지만 짚이는 건 하나뿐이었다. 불여우에게 무슨 일이 있을 수 있겠나? 분명 남자와 관련된 것이겠지.

황제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면, 그녀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황실의 체면을 더럽힌 자가 살아 나간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여전히 목숨을 보전하고 있는 그녀를 생각하자 다들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남류청의 좋은 날은 다 끝났다. 지난번엔 화 귀인에게 높이 오를수록 비참하게 추락할 것이라고 하더니, 이제 그건 자기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서양전에도 소주방은 있었지만 어지간해서는 불을 지피지 않았다. 음식은 매일 시녀들이 대주방에서 가져왔기 때문이다. 황제의 총애를 받을 때는 좋은 음식을 대접 받았지만, 푸대접 신세인 지금은 식은 밥을 받는 것도 감지덕지였다.

남류청은 차가운 조롱과 비웃음은 견딜 수 있었지만 식은 밥은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궁에서는 위로 오르는 자를 짓밟으려 하니 다들 윗사람의 눈치를 살펴 일을 처리하곤 했다. 황제가 더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으니 황후도 일부러 더 괴롭혔다. 아마 그녀도 곧 화 귀인의 뒤를 밟게 될 것이다. 서양전의 노비들은 앞길이 보이지 않아, 제각기 살 방법을 찾아 떠났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서양전에는 덕마와 탁려 두 사람만 남았다.

날씨가 추워져도 땔감이 없어 방에 불을 땔 수 없었고 촛불도 모자랐다. 그나마 조금 있는 찬밥도 세 사람이 나눠 먹어야 했다.

남류청은 두 시녀가 늘 배를 곯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가 밥을 먹을 때면 덕마의 배가 꼬르륵거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좋은 사람은 아니어도 주변 사람들에게는 진심이었기 때문에 시녀들에게 자신을 떠나라고 권했다. 어느 궁으로 가든 여기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 덕마가 울음을 터뜨렸다.

“마마, 저희가 떠나면 누가 마마의 시중을 든단 말입니까. 마마의 발이 이렇게 망가졌는데 황후 마마는 치료할 사람도 보내주지 않으십니다. 분명 마마의 목숨을 원하는 것입니다.”

남류청의 발은 하루 종일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복사뼈 근처는 쇠사슬에 쓸려서 상처가 났고, 그 상처는 짓무르기 시작했다.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덕마가 태의를 청하러 갔지만 윗사람의 명령이 없으니 누구도 감히 남류청을 고쳐 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시 황후궁에 청을 하자 은월은 음흉한 말을 뱉으며 대문에 한 발짝도 들어서지 못하게 막았다. 덕마는 하는 수 없이 염치 불고하고 전정으로 가, 황제를 찾았다. 하지만 제일 바깥쪽에 있는 첫 문도 들어서지 못할 만큼 보잘것없는 시녀가 어찌 감히 황제를 볼 수 있겠나.

서양전이 관심을 받지 못하니, 이제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는 걸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남류청은 손수건으로 덕마의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바보야, 황후 마마가 내 목숨을 원하는 게 분명한데 이 기회를 놓치시겠어? 혹여나 내 상황이 다시 좋아지기라도 한다면 땅을 치고 후회하실 텐데.”

덕마는 훌쩍이며 물었다.

“마마, 상황이 좋아질 수는 있습니까?”

남류청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 폐하도 내가 죽길 바라는 것 같아.”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죽으면 해방되는 거니까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다만 시간만 끌다 죽지도 못하고, 산 채로 고생할까 봐 걱정이야.”

눈시울이 붉어진 탁려는 남류청의 발에 묻은 핏자국을 닦았다.

“마마, 그런 약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폐하가 마마를 잊으실 리 없습니다.”

“잊으면 다행이지. 무정한 황실의 남자들처럼 그냥 날 잊었으면 좋겠어.”

그는 무정하고 그녀도 그에게 마음이 없는데 그렇게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 잊자. 잊는 게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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