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5화
잔뜩 구겨진 체면을 만회하기 위해 곤청롱은 사냥 대열로 돌진했다. 그는 선두에 서서 물 흐르듯 빠르게 화살을 걸었다. 몇 발을 연이어 쏘자 영양과 토끼가 잇달아 픽픽 쓰러졌고, 자리에 있는 모두가 황제의 위용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함성에 매는 깜짝 놀라 더 멀리 날아가 버렸고, 시위들도 말을 타고 매를 뒤쫓았다.
남류청은 고개를 돌리다가 무심코 진전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냥감을 포위하는 대열에 섞여 있었다. 굳은 얼굴로 도망치는 사냥감을 노려보고 있던 그는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그녀와 가볍게 눈이 마주쳤다. 그는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다. 찰나에 불과한 상황이었기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빛에 남류청은 진전이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어쩌면 최악의 상황을 계획했는지도 몰랐다. 배수진을 친 듯 단호한 그의 표정에 그녀는 조금 감격스러웠다.
사실 진전은 그녀가 좋아하는 외모를 가진 사내였다. 건장한 체격에 잘생긴 용모,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까지. 만약 자신과 함께 간다면, 훗날 그녀가 여제가 된 뒤에 후하게 대접해 줄 텐데. 그러나 그는 우둔할 만큼 충심이 깊어 그녀와 함께 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정오가 되자 병사들이 시냇가에 진을 쳤다. 시위들은 수확한 토끼와 영양, 노루 등의 배를 갈라 깨끗이 씻고 모닥불을 피웠다. 사냥물을 수확했을 때 하는 몽달의 관례였다.
조상들이 지금의 땅을 쟁취해 궁을 지었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유목 민족의 뜨거운 피가 흘렀다. 그들은 높은 하늘과 드넓은 초원으로 이루어진 광활한 경치와 활쏘기를 좋아했다. 사냥을 한 뒤에는 다 함께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고기를 구워 먹으며 술을 마셨다. 그건 성안에서는 절대 누릴 수 없는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황제 역시 비록 금의옥식을 누리며 자랐지만, 이런 땐 모든 이들과 한데 어울렸다.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토끼 다리를 한입 크게 베어 물기도, 술 주머니에서 술을 들이켜기도 했다. 그리고 종종 주변의 종실 아우들, 신하들과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며 통쾌하게 웃었다.
그는 몇 입 베어 문 토끼 다리를 사냥개에게 던져준 뒤, 영양 다리를 얇게 썰어 차곡차곡 접시에 담았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기에 향료까지 뿌린 뒤에 그는 그걸 들고 막사로 들어갔다. 남류청은 커다란 침상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인기척에 눈을 뜬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폐하께서 신첩을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사실 이런 곳에 여인을 데리고 나오는 건 영 불편했다. 곤청롱은 특히나 남류청이 사내들 틈에 끼어 그들이 나누는 음담패설을 듣는 게 싫었다. 이 얼마나 체통 없는 일이란 말인가.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막사 안에만 있게 한 것이었다.
“짐이 어찌 널 잊겠느냐.”
곤청롱은 작은 탁자에 접시를 내려놓고 그녀의 턱을 붙잡은 채 입을 맞췄다.
가을 사냥은 날짜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황제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그가 사냥을 하고 싶을 때 분부를 내리면, 아랫사람들이 모든 걸 준비해 주는 식이었다.
원래는 야영을 하지 않았기에 그동안은 딱히 막사를 준비할 필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황제가 여인을 데리고 온다고 하기에 막사를 준비한 것이었다. 혹여 남 귀인이 피곤해 한다면 그녀가 쉴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막사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다. 사방이 꽁꽁 가려져 있기도 하거니와, 그가 남 귀인과 막사에 있을 땐 다들 눈치껏 들어오지 않았다.
곤청롱은 술까지 마신 상태에서 입을 맞추니 더 피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밖에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기에 자중하려 했지만, 그녀를 안으니 그윽한 향기에 순간 머리가 어질했다. 그는 자제력을 잃고 그녀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남류청은 싫었지만, 그렇지 않은 척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가는 숨을 뱉었다.
“폐하, 안 됩니다. 밖에 사람들이 있는데…….”
말로는 안 된다고 했지만, 그녀는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쌌다. 그러자 곤청롱은 그녀의 귓불을 물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그가 이 요물을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되었을까!
바깥은 시끌벅적했으나 막사 안에서 나는 소리 역시 만만치 않았다. 누군가 그 소리를 듣고는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다들 입을 다물자, 막사에서 여인의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다들 기루를 들락날락하는 사내들이었기에 그들은 자연스레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고는 서로 눈짓을 보내며 키득거렸다. 그러다 급기야는 신음이 들리지 않을 만큼 박장대소를 터뜨리고는 더욱더 신이 나서 음담패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전만은 굳은 얼굴이었다. 그는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장작으로 쓸 것처럼 모닥불 가까이 가져가더니 갑작스레 방향을 틀고는 곧장 바닥에 내리꽂았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본래 높은 곳에서 뭇사람들의 경배를 받아야 할 고귀한 공작신이 황제에게 짓눌려 원치 않는 웃음을 지어야 한다니. 그녀는 분명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에게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을 터.
그는 힘을 주다 그만 가지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예의를 갖추지 않고 태만히 굴었다는 걸 깨달았다. 옆에 앉아 있던 이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 대인은 역시 힘이 장사군. 가지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분명 땅속으로 완전히 박혔을 터인데.”
“진 대인의 무공이 또 정진하였으니 응당 축하해야 할 일이구먼.”
“역시 금군 통령으로 손색이 없지. 정말 대단하다니까!”
남들이 자신을 치켜세워 주자 진전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저 보잘것없는 실력이라 여러분들께 웃음거리만 될 것입니다.”
그는 가지를 뽑아 모닥불에 던졌다. 금세 불길이 가지를 까맣게 불태웠다.
* * *
난생 처음 외부에서 정을 나누니 곤청롱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는 진이 다 빠지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반면 남류청은 아니었다. 그녀는 시큰거리는 허리를 어루만지며 속으로 끙끙 앓았다. 당장이라도 깊이 잠든 이 사내를 발로 차 침상에서 떨어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작은 분을 참지 못하면 큰 계획을 망치는 법. 그녀는 자신의 계획을 망칠 생각은 없었지만, 마음이 조금 혼란스러웠다. 계획대로 빠져나가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그녀는 억지로 눈을 감고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정신을 제대로 차려야 다음 계획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이 되니 몽달의 낮은 점점 더 짧아졌다. 해가 어느덧 서쪽으로 기울더니 금세 석양이 졌다. 넘실거리는 노을빛에 황금빛으로 물든 대지는 보는 것만으로도 따스했다.
곤청롱은 황급히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류청이 곁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그제야 안도하곤 몸을 일으켰다.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간 그는 잠시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이리 오래 잤단 말인가?
저 멀리 모닥불은 이미 꺼진 뒤였고, 그 주위로 여전히 서너 명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머지 왕족들은 먼 초원에서 말을 타고 사냥하는 중이었다. 모처럼 사냥을 나왔으니 실컷 즐기다 돌아갈 심산인 듯했다. 진전이 다가와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폐하,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환궁하셔야 합니다.”
곤청롱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때, 시종이 다가와 고했다.
“폐하, 낮에 말씀하신 매가 지금 오 리 밖에 있습니다.”
곤청롱은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 리면 그리 멀지 않으니 빠르게 내달리면 늦지 않을 것이다. 그는 목청 높여 분부했다.
“짐의 말을 가져오너라.”
그때 막사 안에서 남류청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그녀의 목소리에 곤청롱의 마음은 순식간에 온기로 가득 찼다. 막사로 들어가 보니,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남류청이 침상에 앉아 졸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깨었느냐.”
그녀는 애처롭게 손을 내밀었다.
“폐하, 말을 준비하라고 하시던데……. 어딜 가시려는 거예요?”
곤청롱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매를 원하던 게 아니었느냐? 짐이 잡아 오겠다.”
남류청은 그의 가슴에 기댄 채 나른하게 팔을 쭉 뻗어 그의 튼튼한 허리를 껴안았다.
“신첩도 같이 가고 싶어요.”
미인이 옆에 있으니 용사의 투지는 더욱 강하게 타올랐다. 곤청롱은 그녀의 턱을 붙잡고 힘껏 입맞춘 뒤 대답했다.
“알겠다. 하면 짐이 데려갈 테니 준비하거라.”
석양은 어느새 지평선까지 내려와 있었다. 곤청롱은 석양빛을 맞으며 빠르게 말을 몰았다. 은색 갑옷을 입고 비범한 위용까지 뽐내니 그 모습이 마치 천신처럼 보일 정도였다.
남류청은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전 그녀 위에서 표범처럼 날뛰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심장이 출렁거렸다. 그녀는 건장하고 얼굴이 잘생긴 사내를 좋아했다. 만약 곤청롱이 황제가 아니라 평민이었다면 그녀는 어떻게든 그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녀는 곤청롱과 나란히 말을 모는 진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또한 늠름한 얼굴에, 체격도 건장한 편이었다. 다만 진전에게서는 서슬 푸른 수령의 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자, 곤청롱은 속도를 늦추더니 고개 돌려 남류청을 바라보며 칭찬했다.
“훌륭하구나. 여기까지 잘 따라오다니.”
그러자 남류청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폐하께 배웠으니까요. 신첩이 사부의 체면을 어찌 깎겠습니까.”
매는 비탈에 가만히 멈춰 서서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곤청롱은 시위에게 자신의 활을 건네받곤 그대로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그는 정확히 매를 겨냥했지만, 미처 화살을 쏘기 전에 매가 날아올랐다. 기회를 놓친 곤청롱은 인내심을 가지고 하늘을 맴도는 매를 지켜보았다. 매가 더 먼 곳으로 날아가자 진전은 서둘러 시위들에게 분부했다.
“매가 더 멀리 가지 못하게 쫓거라.”
시위들은 명을 받잡고, 매를 몰기 위해 잇달아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도 빠르게 다가와 주변을 에워싸고 앞다투어 화살을 쏘아 대며 매를 사정권 안으로 몰았다. 매는 놀랐는지 날개를 퍼덕거리며 이리저리 날아갔다. 하지만, 정작 매를 맞힌 화살은 없었다. 그건 황제가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매가 화살을 피해 허둥대자 곤청롱은 흥이 나서 남류청에게 말했다.
“어디 가지 말고 짐이 저 매를 명중시키는 걸 잘 지켜보거라.”
그러자 남류청은 말했다.
“폐하, 저 매를 죽이진 마시어요. 신첩의 곁에 두고 데리고 놀고 싶습니다.”
곤청롱은 실소를 터뜨렸다. 다른 후비들은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걸 기르는데 그녀는 매를 기르겠다니. 매는 눈먼 자를 물어뜯을 수 있는 하늘의 패왕인 것을.
“그래. 기를 수 있도록 짐이 목숨은 살려 두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