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4화
드높은 하늘 위로 엷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남류청이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 진전은 이미 갑옷까지 입고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는 분위기를 풍기며 홀로 스산한 연무장에 서 있던 그는 그녀를 발견하곤 무표정하게 예를 갖췄다.
“말장, 남 귀인을 뵙습니다.”
남류청이 웃으며 말했다.
“예를 갖출 것 없어요. 진 대인께 폐를 끼치는군요.”
진전은 그녀를 위해 적갈색 암말을 끌고 왔다. 그 말은 온순했고 덩치 또한 그리 크지 않았다. 그는 남류청에게 말에 올라타는 법부터 가르쳐 주었다.
“귀인께서 말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말장이 말을 끌고 한 바퀴 돌겠습니다.”
남류청이 끄덕이며 덕마와 탁려에게 말했다.
“너흰 여기서 잠시 기다려. 진 대인과 한 바퀴 돌아보고 올 테니.”
그저 연마장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덕마와 탁려는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진전은 말을 끌고 천천히 연무장을 돌았다.
잠시 후, 남류청이 그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며칠 뒤 가을 사냥에 데려가 주신대요. 그때 제가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줘요.”
진전은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이런 말을 꺼낼 줄 몰랐기에 놀란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쳐다보지는 말고 말만 들어요.”
남류청은 말 위에 앉아 냉정하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궁전을 불태우는 것보다는 초원에서 도망치는 게 더 쉬울 것 같아서요.”
진전은 시선을 거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없어요? 계획이 별로인 것 같아요?”
진전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답했다.
“아닙니다.”
별로인 게 아니라… 그녀가 이렇게 빨리 떠난다고 할 줄 몰랐다. 계획이 성공하면 아마 두 번 다시 그녀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물었다.
“미리 계획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입을 시위 복장을 준비해 줘요. 폐하께서 내가 없어진 걸 알면 분명 찾으려 하겠죠. 그 틈에 대오에 섞여 도망치면 돼요. 가을 사냥을 하는 곳은 분명 진 대인한텐 익숙한 곳이겠죠. 어디서 빠지는 게 가장 적당한지 진 대인이 알려줘요.”
“사실은 말을 탈 줄 아시지요?”
“당연하죠.”
남류청이 가볍게 웃었다.
“남원의 공주들은 춤도 추고 말도 탈 줄 알아요. 전 그저 당신을 만날 핑계를 찾으려는 것뿐이었어요.”
진전은 오랜 시간 침묵을 지켰다. 역시 그녀는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계획을 세워 두다니. 게다가 그와 만날 구실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오로지 도망칠 생각뿐인 그녀와 달리 그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남류청은 그가 침묵에 잠기자 별안간 고삐를 잡아당기고 다리를 꽉 움츠렸다. 그러자 말은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앞뒤로 흔들었지만 결국 흔들림을 이기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너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깜짝 놀란 진전은 황급히 그녀를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다가온 남자가 미인을 안정적으로 받아냈다.
안색이 창백해진 미인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호흡도 갑작스레 멈춘 듯 미약했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뜨긴 했지만, 아직 혼미한지 놀란 얼굴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폐, 폐하.”
곤청롱은 그녀를 안은 채 비웃었다.
“두려운 게 없는 여인인 줄 알았더니… 고작 말 한번 타고 이리 놀라는 것이냐?”
진전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신이 남 귀인을 제대로 돌봐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남류청은 곤청롱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이를 악물었다. 사실 그녀는 진전의 품에 떨어질 생각이었다. 그 바보가 망설이고 있으니 아주 조금 단맛을 선사하려는 것이었는데… 곤청롱이 별안간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진 대인 탓이 아닙니다. 신첩이 너무 성급했어요.”
곤청롱이 말했다.
“남 귀인이 용서하라고 하니 그만 일어나거라. 진 대인은 돌아가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거라. 죄는 면해 주겠지만 보름치 녹봉은 깎을 것이다.”
진전은 두 눈을 내리깐 채 자리에서 일어나 무표정하게 돌아갔다. 남류청 역시 곤청롱이 이리 빨리 나타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녀가 부끄러운 듯 입을 열었다.
“어서 내려 주시어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곤청롱이 그녀를 조심히 내려 주자 그녀가 또다시 물었다.
“폐하, 이곳엔 어찌 오셨습니까?”
“짐이 오지 않았다면 낙마를 했을 터.”
곤청롱은 조금 전 일을 떠올리니 여전히 아찔했다.
“걷는 법도 제대로 익히지 않고 달려가려 하다니. 정말 바닥에 떨어졌다면 네 몸을 다치는 것은 물론 진전도 어찌될지 확신할 수 없다. 평소에는 진중하던 자가 어찌……. 되었다. 다른 이에게 맡기려니 짐은 영 안심이 되지 않는구나. 차라리 짐이 가르쳐 주겠다.”
남류청은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을 감싸 안았다.
“신첩이 진작부터 폐하께 배우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폐하처럼 신첩에게 세심히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곤청롱이 웃으며 그녀를 말에 태운 뒤, 자신도 그 뒤에 올라탔다.
“짐이 태워 주지.”
그는 고삐를 흔들며 다리에 힘을 주더니 호통쳤다.
“이랴!”
말은 곧장 앞으로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가 멀리 울려 퍼졌다.
모퉁이에 다다른 진전은 뒤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한 손엔 고삐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남류청의 허리를 감아 거의 눕히듯 품에 안았다. 그 모습에 진전은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는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렇게 며칠 동안 곤청롱은 남류청에게 말 타는 법을 알려 주었다. 남류청은 인내심을 갖고 열심히 배우는 척했고 얼추 다 배웠다 싶을 때, 홀로 두 바퀴를 달렸다.
출발선으로 돌아온 그녀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곤청롱은 말을 막아선 뒤 그녀가 내려올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녀가 착지하자 그는 손을 놓으며 말했다.
“며칠 만에 실력이 이렇게 좋아지다니, 남 귀인은 짐의 생각보다 더 똑똑한가 보군.”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한 그 말에는 꼭 뼈가 있는 것 같았다. 남류청은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기에 그저 모르는 척 웃으며 대꾸했다.
“당연히 폐하께서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지요.”
남류청의 아첨에 곤청롱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 * *
황제가 남류청을 가을 사냥에 데려갈 거라는 소식이 황후의 귀에도 닿았다.
그녀의 안색은 온종일 어두웠다. 지금껏 가을 사냥에 여인이 동행한 적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애지중지 아끼는 여인 때문에 제도까지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런 식으로 가다간 머지않아 혼군이 될 터였다.
그녀는 며칠 동안 남류청이 연무장에서 승마를 배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처음엔 진전이 가르친다고 하기에 여우와 신하 사이에 이야기라도 꾸며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남 귀인이 말에서 떨어질 뻔하여 황제가 직접 나섰다는 소식을 접했다. 실망을 금치 못한 그녀는 속으로 진전을 욕했다. 하지만 그런들 어찌하겠는가.
오늘따라 유난히 가슴이 답답했던 그녀는 밖을 거닐다가 자기도 모르게 연무장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제와 남류청이 함께 말을 타고 있는 걸 봤다.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털을 가졌지만 네 개의 말발굽만큼은 먹처럼 검게 빛나는, 비범한 황제의 말이었다. 그녀조차 타 본 적 없었는데…….
그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저렇게 몸을 맡긴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황후가 되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당부하던 말이 있었다. 한 나라의 어머니가 되었으니 누군가를 시샘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충고했다. 지금껏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잘 지키며 살아왔다. 다른 후비들에게 최대한 공평하게 대하려 노력했고, 아주 가끔 계략을 쓰며 소란스럽게 구는 이들만 벌했다. 그건 질투심 때문이 아니라 후궁의 안정을 위해 황후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남류청은 달랐다. 남류청을 보고 있으면 그녀는 무언가 가슴을 한 입 한 입 갉아먹는 듯, 끔찍한 고통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은월이 그녀를 타일렀다.
“마마, 상심하지 마십시오. 여우가 어찌 큰 인물이 되겠습니까. 무슨 짓을 해도 마마를 넘어설 순 없습니다. 총애를 잃거든 그때 마음껏 벌하시지요.”
그러나 황후는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설령 남류청이 총애를 잃는다 해도 또 다른 여인이 그 자리를 채우지 않겠는가?
* * *
가을의 몽달 초원은 남류청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쌀쌀한 날씨에 노랗게 변한 풀잎도 있었지만, 여전히 푸른 물결이 넘실거렸다. 풀밭 사이로 듬성듬성 피어난 작은 꽃들 덕에 마치 정교하게 수놓은 커다란 융단을 보는 것 같았다. 짙푸른 하늘 아래 끝도 없이 펼쳐진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마음마저 확 트였다.
말을 타고 있는 남류청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림 같은 풍경에 놀라, 그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장 냉정을 되찾았다. 이곳에 온 목적을 잊어선 안 되었다.
가을의 초원은 수풀이 우거진 만큼 사냥할 동물들도 많았다. 시위들이 사냥감을 몰자 짐승들은 이리저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 뒤를 쫓던 이들이 활을 쐈고, 시위들은 화살에 맞은 사냥감을 주워 왔다.
곤청롱은 남류청과 나란히 말을 몰며 물었다.
“재미있느냐?”
그러자 남류청은 하늘을 날고 있는 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재미있습니다. 폐하, 저 매가 영양을 잡기도 하나요?”
“그래.”
곤청롱은 연이어 말했다.
“영양은 물론이고 사람까지 잡을 수 있지.”
그 말에 남류청은 웃으며 말했다.
“하면 폐하께선 저 매를 잡으실 수 있습니까?”
그녀의 말이니 안 되는 것도 되게 해야 했다. 곤청롱은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 활시위를 당겼다. 한쪽 눈을 감고 매를 겨냥한 뒤,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마치 정월 초하루에 터뜨리는 폭죽처럼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매는 민첩하게 날개를 펼치며 화살을 피해 날아갔다.
곤청롱은 몽달에서 수사자로 불릴 정도로 무술과 기사騎射 모두 뛰어난 명수였다. 그런 그가 첫 발에 실패하고 말았으니 어찌 체면이 설까. 그는 다시 한번 시도했지만, 역시나 실패했다. 남류청이 말했다.
“폐하, 그만하시어요. 저 매는 아무래도 지금 죽을 운명이 아닌 듯합니다. 그냥 놓아 주시지요.”
곤청롱은 성이 난 얼굴이었다. 좋아하는 여인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법. 그는 얼굴을 굳힌 채 분부했다.
“짐 대신 저 매를 잘 지켜 보거라.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짐이 반드시 저 매를 잡고 말 것이다.”
시위들은 명을 받잡고 곧장 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