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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03)화 (1,003/1,192)

제1003화

황제가 성큼성큼 문턱을 넘자 꼿꼿이 서 있던 황후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황제가 황후에게 성을 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타국의 여인 때문에 화를 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슬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한참을 의자에 앉아 있던 황후가 시종을 불렀다.

“내무부에 가서 전하거라. 오늘부터 다시 서양전에 얼음을 가져다주라고 말이다.”

어린 시종은 서둘러 황후의 명을 전하러 갔다.

방으로 들어온 은월은 잿빛이 된 주인의 안색을 바라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마마, 어찌 그리 쉽게 타협하십니까?”

황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 직접 하명하신 일인데 타협하지 않으면 어찌하겠느냐? 어렵사리 마음에 담은 여인이 생기셨으니 앞으로…….”

그녀는 작게 탄식했다.

“앞으로 어찌 될진 아무도 모를 테지.”

“하지만, 남 귀인은 딱 봐도 잔재주가 많은 여인 아닙니까. 베갯머리에서 입김을 자꾸 불면 어찌합니까. 마마에게 해가 될까 소인은 걱정입니다.”

황후는 그런 게 걱정되진 않았다.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 해도 폐하께 본궁을 내치고 자신을 황후로 세워 달라고 하진 못할 것이다. 본궁에겐 태자가 있지 않느냐. 제아무리 귀한 신분이라 해도 그저 정권 다툼의 희생양이 된 초라한 타국 공주일 뿐이지.

폐하께서 설령 정말 그런 마음을 가진다고 해도 조정 대신들이 필사적으로 말릴 것이다. 게다가 본궁이 폐하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폐하는 그저 잠시 미색에 홀린 것뿐이지, 정도를 잊으실 분은 아니다. 강산과 사직이야말로 폐하께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

은월이 중얼거렸다.

“남류청은 정말 여우 같습니다. 화 귀인이 총애를 얻을 땐 잠잠하다 싶더니 또다시 이리 음흉한 짓을 하다니요.”

은월은 문득 무언가 떠올렸다.

“맞다, 마마. 화 귀인이…….”

황후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내버려 두거라.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하는 법. 비슷한 무리끼리 서로 일깨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 * *

남류청은 곤청롱이 밤에 그녀를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몸이 아파 자다가 깨길 반복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 곁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따뜻한 손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잘 때 방해받는 걸 싫어했기에 곧장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 손은 곧장 이마에서 떨어졌고, 그 대신 따스한 무언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안 그래도 잠귀가 밝은 탓에 남류청은 깜짝 놀라 완전히 잠에서 깼다. 절절한 입맞춤이 이마에 닿자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곤청롱도 더 이상 무얼 하지 않고 얌전히 누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조용히 잠들었다.

남류청은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순간 자신이 착각한 건 아닐지 의심했다. 그가 이마에 입을 맞춘 것도 전부 다 환상 같았다. 그러나 따스하고도 서늘했던 그 감촉은 여전히 그녀의 이마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곤청롱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들었다. 시종들이 안으로 들어와 환복을 돕는 동안 줄곧 바스락거렸다. 그것 말고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방은 금세 다시 조용해졌다. 그가 방을 나간 것이다. 남류청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또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녀가 다시 깼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솟은 뒤였다. 덕마가 장막을 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마, 일어나셨습니까?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약을 먹고 나니 한결 가뿐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아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훨씬 나아졌어. 오늘은 약을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그건 안 됩니다.”

덕마가 말했다.

“폐하께서 사흘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약을 드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만약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시면 폐하께서 소인의 가죽을 벗기실 겁니다.”

남류청이 웃으며 말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시겠어?”

“그럼요.”

덕마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폐하께서 마마께 얼마나 잘해 주시는지 모릅니다. 혹여 마마가 깨실까 봐 세안도 방밖에서 하신걸요. 그리고 누구든 마마의 잠을 절대 방해해선 안 된다고 분부하셨습니다. 마마께서 이렇게 총애를 듬뿍 받으시니 소인도 얼굴에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밖을 돌아다닐 때면 허리가 평소보다 더 꼿꼿해진다니까요.”

덕마의 당당한 모습에 남류청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앞으로는 그렇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어. 남들을 무서워할 필요 없어.”

덕마가 말했다.

“소인을 업신여기는 자가 있거든 마마께서 나서 주실 거죠?”

“그럼, 내가 나서야지.”

남류청은 신발을 신고 화장대 옆에 앉더니 거울에 비친 덕마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궁에서 얼마든지 제멋대로 굴어. 무슨 일이 있거든 내가 막아 줄 테니까.”

덕마는 남류청이 자신을 놀리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박장대소했다.

“마마, 놀리지 마십시오. 소인이 어찌 감히 제멋대로 굴겠습니까. 마마께서 총애를 받으시는 탓에 다들 질투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마마를 찾아와 트집 잡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요.”

덕마는 별안간 할 말이 떠올랐다.

“듣자니 화 귀인께서 참 안타깝게 되셨더군요.”

“그게 무슨 말이야?”

“소문이 얼마나 자자한지 몰라요. 원래도 지위가 낮았잖아요. 총애를 받았을 때도 폐하께선 지위를 올려 주지 않고 상만 내리셨지요. 지금도 여전히 화용전에서 지내는데 화용전의 여비와 오 첩여가 화 귀인한테 잘해 주겠어요? 근처의 몇몇 마마들이 한패가 되어 화 귀인을 괴롭히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원래 화 귀인이 받아야 할 몫도 받지 못하고 있대요. 하루 세끼는 고사하고 밤에 쓸 양초도 없다던데요? 정말 딱하다니까요. 원래 아주 영리한 분이라 입에 발린 말을 잘해서 황후 마마께서도 곧잘 대해 주셨거든요. 한데 안타깝게도 폐하의 총애가 끊기니 저리 수직 낙하하신 거지요. 아마 앞으로가 더 괴로울 거예요.”

남류청은 머리 장신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덕마야, 네가 보기에 내가 받는 총애는 오래갈 것 같니?”

“당연하죠.”

덕마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께선 다른 분들과는 달리 선녀 같이 아름다우신 분이잖아요. 마마의 용모라면 당연히 오래오래 총애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여색으로 군주를 모시는 게 얼마나 가겠어?”

그러자 곧바로 덕마가 반박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내들은 다들 예쁜 얼굴을 좋아하는 걸요.”

“그러다 내가 늙으면?”

덕마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대꾸했다.

“마마께서는 그때도 분명 예쁘실 겁니다.”

남류청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또다시 입을 열었다.

“총애를 잃지 않으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덕마가 물었다.

“무슨 방법인데요?”

남류청은 일부러 뜸을 들였다. 덕마가 궁금해서 안달이 나자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제일 높은 곳에 올라서는 거지. 그래야 총애를 잃지 않아.”

그 말에 덕마는 화들짝 놀라 황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마마, 황후 마마가 되실 생각이십니까?”

남류청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뒤로 덕마는 수없이 캐물었지만, 남류청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틀간 앓아누워 있었더니 그녀는 방 안이 너무 답답했다. 잠시 나가 걸으려는데 갈림길에서 절로 발걸음이 멈췄다. 한쪽은 전정으로, 한쪽은 후궁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녀는 두 곳 모두 가고 싶지 않았다. 전정에 가자니 곤청롱이 오해를 할까 걱정이었고 후궁으로 가자니 자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여인들이 벼르고 있을 터. 겁나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성가신 일을 겪고 싶진 않았다.

그때 그녀는 조각문 너머를 힐끔거리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도망은커녕 멀리서 그녀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류청은 차마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황제의 명 없이 신하가 후궁으로 들어오는 건 금지였기 때문이었다.

진전은 늘 조심히 행동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남류청이 아프다는 소식에 그는 그녀가 좀 나아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멀리서나마 후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볼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었다.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마침내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안색이 좋아 보여 그는 며칠 동안 졸였던 마음을 겨우 내려놓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몇 차례 시선을 교환했다. 진전은 혹여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 * *

몽달의 여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남류청의 병이 나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날씨는 금세 서늘해졌다. 그녀는 스산한 가을 날씨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그 모습에 곤청롱이 색다른 제안을 했다.

“이틀 뒤 있을 가을 사냥에 데려갈 테니 몽달의 초원을 구경해 보거라.”

남류청은 그 말에 눈을 반짝였다. 지금껏 드넓은 초원을 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몽달의 초원은 듣자니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하다는데… 혹 그곳에서 도망칠 기회를 찾을 수 있진 않을까? 어쩌면 불을 지르는 것보다 그런 방법이 더 쉬울지 몰랐다.

하지만, 먼저 진전과 상의해 봐야 했다. 혹여나 허둥대다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활짝 웃었다가 다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신첩은 말을 타지 못합니다.”

곤청롱이 말했다.

“그건 상관없다. 짐이 가르쳐 줄 사람을 보내 주마.”

그녀는 곤청롱의 팔을 감싸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폐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지 않으십니까?”

진심이든 빈말이든 곤청롱은 그녀의 말에 퍽 기분이 좋았다. 그가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짐한테 시간이 어디 있겠느냐. 걱정하지 말거라. 짐이 잘 가르쳐 줄 사람을 보낼 테니.”

그러자 그녀는 삐죽거리며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

“폐하, 누구에게 신첩을 가르치게 하시려고요?”

“금군 통령 진전.”

곤청롱이 말했다.

“이미 만나본 적 있지. 흘하절 때 네가 만든 하병도 먹어 보았고.”

남류청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남색 장포를 입고 검은 옥이 박힌 모자를 썼던… 잘생긴 사람요?”

곤청롱은 얼굴을 굳혔다.

“그건 쟁왕야崢王爺고, 진전은 무장이라 갑옷을 입고 있었다.”

남류청은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듯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어물쩍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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