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2화
황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걸 먹었다?”
그녀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반문했다.
“설탕 인형은 먹는 게 아닙니까? 설마 다른 용도라도 있단 말씀이십니까?”
“정말 먹었다?”
“먹었습니다.”
“누가 먹었느냐?”
“물론 신첩이 먹었지요. 폐하께서 하사하신 것을 신첩이 어찌 감히 다른 이에게 먹이겠습니까.”
황제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한참을 머물렀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만큼 그럴싸한 얼굴이었다.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온 탓에 그는 잠시 얼빠진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자리를 떴다.
남류청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쩐지 평소와 다른 황제의 뒷모습에, 그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딱히 화를 내지도, 그녀에게 벌을 내리지도 않았다. 정말 의아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황제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장 계획을 짜는 게 급선무였다. 황제가 궁을 비웠던 지난 이틀이 좋은 기회였지만, 진전은 아직 적당한 사형수를 찾지 못했다며 조금 더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일을 길게 끌면 문제가 생기는 법. 그녀는 어쩐지 일이 그리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것 같았다.
밤이 되자 황제는 또다시 그녀를 찾아왔다. 심지어 아무런 통보도 없이 조용히 들어와 장막을 걷고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는 침의만 걸치고 있었다. 침상에 누워 있던 남류청은 일어나 예를 갖추려 했지만, 그가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누워 버리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남류청은 그의 거친 몸동작으로 지금 그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이유가 설탕 인형 때문인지, 조정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그녀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도 성질이란 게 있었다. 더는 견디다 못해 그녀는 결국 반항을 했다. 그녀는 반드시 사내가 여인 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 여인은 사내를 짓누르면 안 된단 말인가?
두 사람은 마치 짐승처럼 침상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엎치락뒤치락했다. 서로를 깨물기도 하고 걷어차기도 하며 오랫동안 힘을 겨루었다. 한번은 그가 그녀를, 그 다음엔 그녀가 그를 짓누르며 누구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구력은 그가 좀 더 앞섰기에 결국 그녀는 녹초가 된 채 밑에 깔렸다. 그리고 그 위로 곤청롱 역시 축 늘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그의 가슴에 파묻혔다. 코까지 눌린 탓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나마 그가 가슴이 들썩거릴 만큼 거칠게 숨을 몰아쉰 덕에 질식사는 면할 수 있었다. 그는 내려가지 않을 작정인지 계속 그녀를 내리눌렀다. 산처럼 묵직한 그의 무게에 남류청은 몇 번이나 그를 밀쳤지만, 소용없었다. 순간 그녀는 화가 나 그의 등을 힘껏 때렸다.
“폐하, 절 눌러 죽이실 거예요?”
이럴 때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대했다. 그녀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황제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는 그녀에게서 떨어져 잠시 숨을 몰아쉬다가 장막 꼭대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남류청, 남원에 돌아갈 생각하지 말고 마음 편히 짐 곁에 있거라. 황후의 자리를 제외하고는 짐이 뭐든 다 주겠다.”
남류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 그녀의 마음은 저 나락 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그녀가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를 유혹하려던 건 정말이지 미친 생각이었다. 그를 잘 구슬려 돌아가게 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그녀에게 홀린 황제는 돌아갈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 말인즉슨 두 번 다시 남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황제도 그녀를 꿰뚫어 보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긁었다.
“신첩이 폐하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 또한 주실 건가요?”
그러자 곤청롱은 제 분수도 모르는 그녀의 손을 움켜쥐더니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줄 것이다.”
* * *
궁 안에서 시간은 유난히 느리게 흘러갔다. 서양전 주변을 유심히 살펴본 남류청은 불을 지르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계획이 성공하려면 궁전 전체가 다 탈 정도로 불이 크게 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다 태워 버리기도 전에 불길이 잡힌다면 그녀의 계획이 발각될 것이었다. 죽은 사람을 구하는 것과 불을 일으키는 것 모두 진전에게 의지해야 했다.
진전을 떠올리자 그녀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는 곤청롱처럼 소유욕을 부리지 않고 묵묵히 그녀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걱정이 너무 많아 시간을 끄는 게 탈이었다. 그녀도 너무 조급하게 굴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곤청롱의 집착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초조하게 살다 보니 그녀는 그만 근심이 쌓여 몸져눕고 말았다.
탁려는 태의를 부르러 갔고, 곤청롱도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조회를 마치고 곧장 그녀에게 갔다. 그가 도착했을 땐, 마침 태의가 진맥을 짚고 있었다. 궁중 여인들이 남자인 의원에게 진맥을 받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어쩐지 곤청롱은 그녀의 고운 손목을 태의가 만지고 있다는 게 상당히 언짢았다.
진맥을 마친 태의가 황제에게 증상을 고하기 위해 뒤돌아 선 순간, 자기를 노려보는 황제의 눈빛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덜덜 떨었다. 황제가 남 귀인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는 생각에 태의는 곧장 그를 안심시켰다.
“폐하, 남 귀인께선 무더운 날씨에 더위를 드신 것 같습니다. 소신이 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 사나흘이면 금방 나아지실 겁니다.”
그러나 황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까닭 없이 왜 더위를 먹는단 말이냐?”
태의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라 방이 조금 덥긴 하옵니다만…….”
황제는 지금껏 남류청에게만 신경 썼을 뿐 다른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태의의 말에 곧장 방 안을 둘러본 그가 벌컥 화를 냈다.
“이리 더운 날씨에 어째서 얼음을 가져다 두지 않은 것이냐?”
덕마와 탁려는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고 우물거렸다.
“서양전은 얼마 전부터 얼음 대야가 끊겼습니다. 소인들이 얼음을 가지러 가니 내무부에선 날이 더워 얼음이 부족하다며 순서를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에 마마께서는 참으시겠다며 소인들을 더는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황제는 침상에 누워 있는 여인을 보며 속으로 냉소했다. 참고만 있는 건 남류청답지 않았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말하지 않다니, 혹 그가 나서 주기만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그녀가 무슨 생각이었든 간에 그가 이 일을 알게 된 이상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너희 주인을 잘 모시거라. 또다시 무슨 일이 생기거든 짐이 너희 가죽을 벗길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류청은 눈만 감고 있었을 뿐 정신은 멀쩡했다. 그녀는 곤청롱을 어찌 대해야 할지 점점 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생각보다 심하게 그녀에게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그 역시도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은 병이 났으니 그가 밤에 찾아오지는 않겠지.
* * *
황제가 황후의 궁전으로 갔을 때, 화비도 황후와 함께 있었다. 황제의 모습에 황후와 화비 모두 기뻐하며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황후를 일으켜 주는 척 손을 내밀며 담담히 말했다.
“다들 일어나시오.”
아들을 둔 화비는 황후 앞에서도 그리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자 수건을 꺼내 그에게 가려 했다.
“날이 정말 덥습니다, 폐하. 이마에 온통 땀이…….”
그러나 황제는 그녀의 손길을 막아서며 말했다.
“화비는 우선 돌아가시오. 짐이 황후와 할 말이 있소.”
망신을 당한 화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황후는 그가 온 이유를 대충 알 것만 같았다. 그녀는 직접 황제에게 찻잔을 건네며 조곤조곤 말했다.
“폐하,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요. 신첩이 경청하겠습니다.”
황제는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화가 나서 찾아올 때도 있었지만 문턱을 넘어서면 늘 냉정을 되찾곤 했다. 황후는 그의 정실인 만큼, 사소한 것 때문에 부부간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뒤 입을 열었다.
“날이 너무 더워 남 귀인이 더위를 먹었소. 오늘부터 서양전에도 매일 얼음을 보내 주시오. 얼음이 부족하거든 짐의 것을 남 귀인에게 나누어 줘도 좋소.”
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말 하나하나가 모두 바늘처럼 그녀의 마음을 찌르는 것 같았다. 황궁에서 황제는 가장 존귀한 존재다. 한데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그의 것을 나누어 주라니? 남류청이 대체 무엇이기에 염치도 없이 황제의 얼음을 쓴단 말인가? 그녀는 넋이 나가 하얗게 질린 채로 아무 말도 못 했다.
황제도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 알고 있었다. 그는 좀 더 온화하게 말했다.
“황후, 당신과 난 부부 아니오? 짐은 지금껏 당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해 본 적이 없소. 유일하게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인데… 이조차 들어주지 않을 것이오?”
황후는 더욱 처량해졌다. 남류청 때문에 황제가 그녀의 체면을 깎아내리다니. 그녀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선 남 귀인을 좋아하시는군요.”
황제도 굳이 속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 짐은 그녀가 좋소.”
“하지만 그녀는 남원 공주입니다. 남원국에서 폐하께 바친 여인인데, 그자가 무슨 속셈을 품고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짐이 알아서 할 것이오.”
황후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폐하, 자고로 미인은 나라를 망치는 화근이라고 했습니다. 설마 폐하께서도 주왕紂王(여색을 탐하여 나라를 망하게 한 상나라의 마지막 왕)의 전철을 밟으시려는 것입니까?”
그러자 황제는 더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굳혔다.
“황후는 말을 삼가시오. 짐은 주왕과 다르오. 남류청은 한낱 여인일 뿐이거늘 황후는 그녀가 조정을 혼란에 빠뜨릴까 두려운 것이오?”
“충언은 귀에 거슬리는 법입니다. 모든 게 다 폐하를 위해서입니다. 남류청은 단순한 여인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남원에서 어찌 이 먼 곳까지 보냈겠습니까? 폐하, 그 여인은 속을 알 수 없는…….”
“그만하시오!”
황제는 결국 언성을 높였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국모로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게 질투심이거늘, 황후는 어찌 이를 망각했단 말이오?”
황제가 성을 내자 황후는 두 눈을 내리깐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는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던졌다.
“서양전을 각별히 신경 써 주시오. 만약 조금이라도 부족한 게 생기거든, 짐이 황후를 찾아와 자세히 물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