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1화
그러자 진전이 물었다.
“계획이 어찌 됩니까?”
남류청은 차갑게 웃어 보였다.
“폐하께서 요즘 저 대신 제 적을 만들고 있잖아요? 분명 황후 마마께선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일 거예요. 어떻게든 방법을 짜내 괴롭히겠죠. 그리고 그건 비단 황후뿐만 아니라 화비를 포함한 나머지 궁비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총애를 받는 귀인이 누군가 일으킨 불에 타 죽는 거… 어때요?”
진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양전을 불태우겠다는 말입니까?”
“그럼 어쩌겠어요?”
남류청이 말했다.
“모든 게 흔적도 없이 다 타 버려야 넘어갈 수 있을 거예요.”
진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려면 사형수를 찾아와야 합니다.”
남류청은 그리 번거롭게 할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다. 궁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무나 붙잡으면 그만이거늘. 그러나 고민 끝에 결국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더 있었다.
“폐하께서 그간 귀비께 마음을 적지 않게 쓰셨으니 폐하께서 돌봐 주시는 한, 이 일은 진행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남류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말도 맞아요. 총애를 잃었을 땐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귀인 하나 죽었다고 폐하가 신경 쓰진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요 며칠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눈에 불을 켜고 서양전으로 달려와서는 날 얼마나 괴롭히는지 몰라요.”
그녀의 말에 진전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궁비와 밀회를 갖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남류청이 너무 안쓰러워 그녀를 돕고 싶었다.
어쩌면 그건 그녀가 누군가의 여인이 되지 않길 바라는 아주 작은 사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남류청은 남원의 고귀하고 성결한 존재였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속해선 안 될 사람이었다. 응당 더 높은 곳에서 모든 이들에게 경배를 받아야 했다.
* * *
아만은 요즘 들어 서양전에 자주 들락거렸다. 아만과 제법 친해진 덕마는 그가 찾아오면 활짝 웃었다.
“아만 공공 오셨습니까.”
인사를 건넨 덕마는 그의 뒤를 바라보았다. 아만이 올 때면 보통 황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만은 몸을 틀어 덕마의 시야를 막아서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보지 말게. 폐하께선 오지 않으셨으니까.”
덕마는 기죽지 않고 여전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오지 않으셨다면, 우리 마마께 전할 말씀이 있어 오신 거로군요.”
“그래. 마마는? 폐하께서 물건을 전해 주라고 하셨네.”
덕마는 그를 데리고 들어가 남류청에게 고했다.
“마마, 아만 공공이 오셨습니다.”
남류청은 창가에서 책을 읽는 중이었다. 얼마 전, 황후가 얼음 대야를 치운 탓에 방은 몹시 더웠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매일 창가에 앉아 이따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덕마의 부름에 남류청은 고개를 들었다. 아만이 이미 가까이 와서는 예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에는 투명한 종이로 감싼 설탕 인형이 들어 있었다. 얇고 반짝이는 미인 조각 인형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입술, 꽃무늬가 새겨진 긴 장포까지… 정말 아름다웠다. 설탕 인형을 받아든 남류청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만을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내게 주라시던가?”
“예. 폐하께서는 아직 환궁하시는 길입니다. 혹시라도 설탕이 녹을까 봐 소인에게 먼저 입궁하여 귀인께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남류청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그렇군. 폐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게.”
그것 말고는 더 이상 말이 없자 아만은 허리숙여 인사를 올리곤 발걸음을 돌렸다. 남류청은 설탕 인형을 보더니 우습다는 듯 말했다.
“폐하께서는 날 아이라 여기시는 건가? 이젠 금은보화가 아니라 이런 간식을 주기로 한 걸 보니.”
그녀는 설탕 인형을 덕마에게 건넸다.
“자, 네가 가지거라.”
그러나 덕마는 감히 받을 수 없었다.
“마마, 이건 폐하께서 마마께 주신 선물입니다. 소인이 어찌 감히 받겠습니까.”
그러자 남류청이 말했다.
“폐하께서 주신 선물은 나도 당연히 함부로 처리 못 하지. 하지만, 이건 설탕 인형이잖아. 아마 거리에서 파는 걸 보고 호기심에 재미 삼아 사셨겠지. 내 처소에서 가장 아이 같은 건 덕마, 너니까 네가 가지거라.”
덕마는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이렇게 정교하고 예쁜 설탕 인형은 지금껏 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할짝대며 물었다.
“정말 소인에게 상으로 주시는 겁니까?”
남류청은 설탕 인형을 덕마의 손에 쥐여 주었다.
“주면 좀 받아. 어찌 그리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이야.”
결국 덕마는 설탕 인형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그것을 대통에 꽂아 자기 방 창가 쪽 궤짝에 올려두었다. 설탕 인형은 햇빛을 받으니 반짝거렸다. 먹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고 정교했지만, 덕마는 참지 못하고 한 입 핥아 보았다. 금세 입안으로 달콤한 향이 퍼졌다. 한창 입맛을 다시는데 어느새 탁려가 들어와선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맛있니?”
“맛있어. 너도 한번 먹어 봐.”
덕마가 신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탁려는 톡 쏘듯 말했다.
“고작 사탕 한입 먹겠다고 목숨까지 내버릴 순 없지.”
그 말에 덕마는 흠칫 놀랐다.
“그럴 리가. 그저 설탕 인형일 뿐인데. 마마께서도 괜찮다고 하셨고.”
“아무리 가치 없는 거라도 폐하의 손을 거치면 그건 더 이상 가치 없는 게 아니야. 예는 가벼워도 인정은 무겁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야. 고작 설탕 인형이라 할지라도 폐하께서 하사하신 보석보다 더 귀중한 거라고. 안타깝게도 지금은 네 손에 들려 있지만.”
덕마는 그녀의 말에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럼 다시 마마께 가져다 드릴까?”
“이미 핥아먹은 걸 다시 마마한테 드리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니?”
탁려가 말했다.
“만약 폐하께서 널 추궁하신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 마마께서 도와주실 테니까.”
덕마는 미간을 찌푸리곤 한참 설탕 인형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별안간 그것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녀는 아그작아그작 씹어 삼키며 말했다.
“아예 흔적을 깨끗이 없애야겠어.”
탁려는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 * *
곤청롱은 환궁하는 길에 그 설탕 인형을 발견했다. 어쩐지 남류청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설탕 인형을 하나 샀다. 그리고 아만더러 그것을 서둘러 그녀에게 가져다 주라고 분부했다. 그가 직접 가져다주는 건 어쩐지 조금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제왕 가문의 사내들은 연애를 해 본 경험이 없었다. 그에게 여인이란 그저 정치적 목적으로 혼인을 맺는 상대이자, 후대를 낳기 위한 필수품일 뿐이었다. 그 외에는 다른 용도가 없었기에 그가 여인에게 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상을 내리는 게 다였다. 그마저도 아랫사람들이 항상 알아서 처리해 주니 그가 신경 쓸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잘해 주어야겠다고 느꼈다. 그녀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마음 썼고, 무언가를 볼 때면 늘 그녀가 떠올랐다.
궁으로 돌아온 그는 아만을 불러 캐물었다.
“물건은 전해 주었느냐?”
“폐하께 아룁니다. 소인이 남 귀인께 잘 전해 드렸습니다.”
“뭐라더냐?”
“폐하의 성은에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은 더 없었느냐?”
아만은 잠시 고민했다.
“조금 놀라실 뿐… 별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말을 멈추곤 우물쭈물 망설였다. 그러자 황제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할 말이 있거든 하거라.”
서양전에는 황제의 사람이 있었기에 숨길 수 없었다. 지금 말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황제가 알게 된다면 오히려 그에게 죄를 물을 터. 그는 허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폐하, 남 귀인께서 설탕 인형을 시녀 덕마에게 줬다고 합니다. 덕마가 그 설탕 인형을 다 먹어 버렸습니다.”
“…….”
황제는 피를 토할 뻔했다. 예상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시녀에게 줘 버리다니. 그의 진심을 완전히 짓밟다 못해 진흙 구덩이에 처넣어 버린 셈이었다.
잔뜩 성이 난 그는 서양전으로 가서 그 양심 없는 여인을 호되게 혼내 주려 했다. 하지만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던 그는 불현듯 멈춰 섰다.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금빛 햇살 한가운데, 그는 주위를 서성이며 화를 천천히 가라앉혔다. 내색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군자가 보여야 할 모습이었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그는 평소처럼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느릿느릿 서양전으로 향했다.
남류청은 황제가 온다는 소식에 서둘러 밖으로 나가 그를 맞이했다. 그녀가 막 무릎 꿇으려는 순간,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커다란 손은 그녀를 놓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남류청은 고개를 들어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난 이틀간 무탈하였느냐?”
남류청이 어여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에 신첩은 아주 잘 지냈습니다.”
두 사람은 시녀가 가져온 차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황제는 한 손으로 찻잔을 든 뒤, 다른 손으로 뚜껑을 들곤 거품을 덜었다. 그는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다향을 한껏 들이마시고서 입을 열었다.
“우유차에 그리 익숙지 않다는 거 잘 안다. 해서 특별히 이곳으로 청차를 보냈다. 남원의 차와 견주었을 때 맛이 어떠하냐?”
남류청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폐하께서 보내 주신 것이니 당연히 최상이지요. 신첩은 황상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녀는 활짝 핀 꽃처럼 방긋 웃으며 연신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다른 여인들이 감사를 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쏟은 정성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고 싶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정말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방에선 이따금 황제가 차를 마시는 소리나, 찻잔과 뚜껑이 가볍게 부딪치는 맑은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남류청은 불안했다. 최근 그녀를 대하는 황제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를 유혹하려 온갖 방법을 다 썼을 때는 오히려 본전도 못 찾고 서양전에 내팽개쳐지지 않았던가. 이제 더는 그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은데, 지금은 자꾸만 그녀에게 치근덕거렸다……. 한참 뒤, 황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만이 전해 준 선물은 마음에 들더냐?”
남류청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설탕 인형을 떠올리곤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아주 맛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