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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00)화 (1,000/1,192)

제1000화

남류청은 황제가 그녀를 대신해 아침 문안을 면해 주었다는 사실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마 그녀를 힘들게 하였으니 미안한 마음에 보상해 주려는 것일 테지. 그리하지 않았다면 황제가 이틀 밤을 연달아 서양전에 다녀간 일로 그녀는 황후의 궁전에서 온몸에 난도질을 당했을 것이다.

사실 그녀는 상관없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이니까. 황후의 궁전 문을 나서면서 깨끗이 잊으면 될 일이었다. 가시 돋친 말들을 가슴에 담아 두는 건 바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두 시녀는 그 말을 진심으로 여겼다. 하나는 안으로 들어와 조용히 침묵을 지켰고 다른 한 사람은 충혈된 눈으로 그녀에게 위로를 건넸다. 둘 다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황제를 모시는 아만이 찾아왔다. 그는 활짝 웃으며 세 발짝 정도 다가오더니 그녀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귀인, 폐하께서 말씀을 전하라 하시어 찾아왔습니다. 폐하께서 오늘 출궁을 하실 예정이라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니 기다리지 말고 일찍 쉬라고 하셨습니다.”

남류청은 그 말이 의아하기만 했다. 황제가 오든 안 오든 사람까지 보내 전할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모든 양심을 다 걸고 장담하건대, 그녀는 지금껏 그가 오기를 기다렸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자기 일을 처리해야 하니 황제가 오지 않길 바란 적은 있었지만…….

그때 그녀가 두 눈을 반짝였다. 황제가 없다면 오늘 밤 그녀는 진전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 그녀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알겠네. 폐하께 난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 주게. 궁 밖은 궁처럼 편하지 않을 테니 폐하를 잘 모시도록 하고.”

말을 마친 그녀는 덕마에게 은 부스러기를 상으로 전하라고 분부했다. 아만은 내숭을 떨며 사양하더니 결국엔 고이 받아 품 안에 쑤셔 넣고 다시 깍듯이 예를 갖춘 뒤에야 자리를 떠났다.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흐르는 것 같았다. 당장 날이 어두워지면 얼마나 좋을까. 밥을 먹을 때도 정신이 팔려 있는 그녀의 모습에 옆에서 시중을 들던 덕마는 몇 차례나 그녀를 힐끔거렸다. 정신을 차린 남류청은 고개를 들어 덕마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덕마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마마, 폐하께서 오늘 오시지 않는다고 하니 입맛이 없으십니까?”

남류청이 물었다.

“티가 났어?”

덕마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턱을 올렸다.

“그럼요. 소인이 날마다 마마 곁을 지키는데, 그런 눈치 하나 없을까 봐요?”

남류청은 실소를 터뜨렸다. 눈치? 덕마는 머리가 둔하고 심성이 단순하여 곁에 두어도 경계심을 갖거나 딱히 마음 쓸 일이 없었다. 하지만 탁려는 총명하고 내막을 꿰뚫어 볼 줄 알았다.

만약 그녀가 몽달을 떠나지 않는다면 탁려야말로 그녀의 심복이 될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을 수 없으니 탁려가 충성을 그녀에게 바치는지, 아니면 황제에게 바치는지는 더 지켜볼 일이었다.

* * *

진전은 자신이 와선 안 되는 곳에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제가 이틀 연달아 서양전에 찾아갔다는 건 남 귀인이 다시 총애를 얻었다는 의미였다. 그는 황제의 총비에게 관심을 두면 안 되었다. 아니, 총애를 받지 못하는 비라 해도 절대 생각해선 안 되었다.

다만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제대로 답을 듣기 전까지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작은 숲에는 깊은 적막만 흘렀다. 나무 그림자와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온종일 기다려도 소용없다는 건 그 또한 알고 있었다. 폐하가 곁에 있는데 그처럼 보잘것없는 금군 통령을 그녀가 기억하기나 할까?

그는 텅 비어 달빛만 흐르는 곳을 자꾸만 바라보았다. 고요하고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다신 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두 눈을 내리깔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신분을 알고서 다시 만난다 한들 무엇을 어찌할 것인가? 그저 다 부질없는 것을.

그는 이런 자신이 싫었다. 그는 금군 통령이었다. 과거에, 그는 황제를 위해 궁문 앞에서 채찍을 맞은 적이 있었다. 채찍이 내리칠 때마다 그의 피부와 살은 찢어지고 갈라졌지만 그는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모든 이들이 그를 철한鐵漢이라며, 몽달의 훌륭한 파도라며 치켜세웠다.

한데 어째서 여인 하나 때문에 이런 꼴이 되었단 말인가?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때 그는 곁눈으로 흐릿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그건 분명히 나무 그림자가 아니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그녀가 그의 앞에 있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남류청이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었다.

“진 대인,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무서우세요?”

진전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표정을 굳혔다.

“남 귀인, 이리 늦은 시간에 여길 오시다니요.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남류청은 진실하지 않은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주변을 서성이며 말했다.

“난 대인을 만나러 왔어요. 그래도 도리에 어긋나나요?”

진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어두워졌다. 남류청이 혀를 차며 말했다.

“도리에 어긋난다면 난 이만 가 볼게요.”

그녀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그러자 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어찌나 힘이 센지 순간 휘청거릴 정도였다. 남류청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전에게 기댔다.

진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서둘러 손을 떼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나 남류청은 그를 믿고 뒤로 더 누웠다. 진전은 차마 더는 물러나지 못하고 넘어지려는 그녀를 감쌌다. 그는 무기력하게 말했다.

“대체 무얼 하려는 것입니까?”

남류청은 고개를 들고 어여쁘게 미소 지었다.

“내가 넘어지는 게 싫었던 거죠?”

“귀인은 주인이고, 전 노비입니다. 노비가 어찌 주인을 넘어뜨립니까.”

그녀는 그에게 기댄 채 대꾸했다.

“그럼 노비가 주인을 감싸 안은 것은요?”

진전은 서둘러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나서야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는 걸 눈치챘다. 그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정말 요괴가 따로 없었다.

남류청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속으로 내가 요괴라고 욕하는 거 다 알아요.”

진전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다니… 정말 요괴란 말인가?

“걱정하지 말아요. 난 요괴 아니니까.”

남류청은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짓궂게 눈을 깜빡였다.

“당신을 잡아먹진 않는다고요.”

진전이 언제 여인의 희롱을 받아 보았겠는가. 그는 곧장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남 귀인, 자중하시지요.”

남류청이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진 대인, 그리 엄숙할 거 없어요. 지난번엔 당신이 먼저 절 끌어안았잖아요. 그때 당신은 왜 자중하지 않았을까요?”

진전은 순간 말문이 막혀 한참 뒤에야 가까스로 대꾸할 수 있었다.

“저와 남 귀인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폐하께 사실대로 고하고, 모든 처분을 폐하께 맡길 것입니다.”

그 말에 남류청은 차마 더는 그를 놀릴 수 없었다. 정말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이 바보 같은 놈이 모든 일을 그르칠지도 몰랐다. 그가 죽는 건 상관없었지만, 그녀까지 연루되는 건 안될 일이었다.

그녀는 웃음기를 거두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어여쁜 눈매에 천천히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하더니 그 물안개는 빠르게 모여 반짝이는 눈물방울이 되어 또르르 흘러내렸다.

진전은 별안간 심장이 쥐어뜯기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순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횡설수설했다.

“제가 귀인을, 아니, 어찌 우십니까. 말씀을, 대체 왜, 아…….”

그녀는 조용히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러다 그녀의 입에서 몇 마디 말이 가볍게 터져 나왔다.

“고향이… 그리워요.”

진전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향이 그리워서 우는 거라고?

“아버지,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여동생도요…….”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가리곤 조용히 흐느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선녀도, 요괴도 아닌 그저 집을 그리워하는 가여운 소녀일 뿐이었다.

진전은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자란 공주가 이역만리로 보내졌으니 모든 게 낯설 터. 의지할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어찌 고향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

빽빽한 숲속, 남류청은 달빛 아래에서 무릎을 감싼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은 뒤,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래도 슬픈 옛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듯했다.

진전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은 연민으로 가득했다. 손바닥 안에 두고 한없이 아껴 주어도 부족한데, 그 무거운 짐을 이 가녀린 어깨로 짊어져야 한다니. 그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새삼 그녀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며 시비를 분명하게 가리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그가 마음에 담아 둔 여인이 그리 큰 고통을 겪었다니!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녀를 어떻게든 돕고 싶었지만, 그가 무얼 도와줄 수 있겠는가? 그는 그저 금군 통령인 것을. 그가 이끄는 금군과 시위들을 다 합쳐도 고작 이만 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 이만 명은 황제의 것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폐하께 청하는 건 어떠신지요. 폐하께서 분명…….”

그가 꺼내기엔 조금 민망한 말이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남류청의 눈빛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나 때문에 출병시킬 거라고 생각하세요? 군대를 이끌고 동월을 돌아가야 하는데요?”

진전은 그녀의 가시 같은 눈빛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남류청은 그를 믿었기에 모든 근심을 털어놓았건만 고작 내놓은 답이 다른 사내를 찾아가라는 거라니.

그는 한참 뒤에 물었다.

“하면 제가 무얼 하길 바라십니까?”

“내가 나갈 수 있게 해줘요.”

진전은 또다시 한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준다고 해도… 귀인 같은 여인이 산 넘고 강을 건너 남원으로 돌아가실 수 있겠습니까? 가는 길에…….”

“갈 수 있어요.”

남류청은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이 도와주면 전 돌아갈 수 있어요. 당신이 나와 함께 남원에 가 준다면 더 좋고요. 하지만, 당신은 집이 이곳에 있잖아요. 가족들과 떨어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난 잘 알아요. 그러니 강요하진 않을게요. 그저 내가 이곳을 나갈 수 있게 도와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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