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9화
두 사람이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황후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비빈들 사이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어젯밤 대충 그럴 기미가 보이긴 했는데, 황제가 이렇게 빨리 서양전을 찾을 줄은 몰랐다. 황제가 직접 궁비의 궁전으로 가는 것과 사람을 보내 전정으로 부르는 것은 확연히 달랐다.
황제가 시침을 부를 땐 보통 하인을 통해 전했지만 황후만큼은 예외였다. 매달 초하루와 열하루가 되면 황제는 직접 황후의 중궁으로 찾아가 밤을 보냈다. 이는 황후를 정실로 대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어젯밤 서양전으로 행차했다. 이는 무심결에 남류청을 황후와 나란히 견준 것으로, 황후에게는 엄청난 모욕이었다.
그간 남류청의 행실을 제법 괜찮게 본 황후는 그녀에 대한 경계를 푸는 중이었다. 게다가 어젯밤 공공연히 황제에게 반항하는 모습에 그녀를 달리 보려던 참이었다. 한데 지금 보니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어젯밤 남류청이 시침을 들었는데도 황제는 오늘 아무 상도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기에 우선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남 귀인은 그렇다 치고, 화 귀인은 운이 좋지 않았다. 어젯밤 황제가 화 귀인을 전정에서 내친 일이 이미 후궁 곳곳마다 소문난 뒤였다. 후비들은 오랜 시간 울분이 쌓여 있던 만큼 한껏 그녀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화 귀인은 바늘방석에 앉은 듯 안색이 하얘졌다가 붉어지길 반복했다. 듣고 싶지 않아도 후비들의 야유가 귓가에 맴돌았다. 오장육부가 쑤시는 것 같았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시야가 흐려졌고 두통까지 더해져 도저히 제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두 손이 힘없이 늘어진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의자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쓰러지면 안 된다. 여기서 쓰러지면 그녀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 귀인, 안색이 좋지 않은데,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는가?”
화 귀인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을 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어둠 속으로 쓰러지기 전, 그녀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제 와서 불쌍한 척하긴. 너무 늦었네요.”
* * *
황후뿐만 아니라 후궁의 모든 여인들은 남류청을 대하는 황제의 태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껏 황제가 마음을 되돌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한번 총애를 잃었던 이가 다시 총애를 얻은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황제는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그 어떤 표현도 하지 않았지만, 다음날 밤 또다시 서양전으로 갔다. 그가 찾아오자 남류청은 불현듯 머리가 아팠다. 머리만 그런 게 아니라 온몸이 다 아팠다. 황제가 그녀를 끌어당길 땐 자기도 모르게 그를 피하기도 했다.
자신을 피하는 그녀의 행동에 곤청롱은 까닭 모를 화가 났다. 그는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 남류청은 그의 손에 이끌려 비틀거리며 따라갔다. 화가 난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상에 다다랐을 때 곤청롱은 그녀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류청은 그를 힘껏 밀쳤다.
“폐하께서 어찌 수고롭게 이런 것까지 하십니까. 신첩이 직접 벗겠습니다.”
그녀는 옷이 몇 벌 없었기에 찢어지기라도 하면 또다시 엄청난 시간을 들여 옷을 만들어야 했다.
곤청롱은 성이 잔뜩 난 얼굴로 그녀가 매듭을 푸는 걸 보았다. 이윽고 두두肚兜(상체를 가리는 속옷의 하나)가 드러나더니, 그녀는 팔을 등 뒤로 돌렸다. 하지만 등 뒤쪽 매듭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팔을 든 탓에 등 쪽 통증이 더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악물고 고집스레 끈을 잡아당겼다. 가만히 지켜보던 곤청롱이 별안간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되었다.”
그 말에 남류청이 고개를 들고 곤청롱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뭐가 되었다는 거죠?”
곤청롱은 그녀의 손을 내리더니 그녀의 몸 곳곳 보이는 멍자국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어젯밤 널 아프게 한 것이냐?”
그러자 남류청은 비웃는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폐하만 기쁘시다면 신첩은 참을 수 있어요.”
예의 없는 말투였지만 곤청롱은 또다시 화가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네가 짐을 화나게 하지만 않았다면 짐도 그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류청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신첩이 무얼 할 수 있다고… 어찌 폐하를 화나게 하겠습니까?”
단추를 채우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그녀의 옷을 도로 힘껏 잡아당기며 말했다.
“꼭 그리 말해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남류청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옷도 다 입었겠다, 황제는 곧 떠날 것 같았다. 어쨌든 황후 외에 황제가 다른 궁비들의 궁전에서 묵고 가는 일은 없었다. 그리 생각하니 그녀의 얼굴에 금세 미소가 피어올랐고 말투 또한 한결 부드러워졌다.
“폐하께서 신첩을 아껴 주시니 신첩은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앞으로 신첩이 폐하를 잘 모시겠습니다.”
그러자 곤청롱은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를 살며시 훑었다.
“그리 감사하다면… 짐에게 어찌 보답할 것이냐?”
남류청이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신첩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폐하를 잘 모시겠다고요.”
“앞으로는 됐고, 오늘 밤 모셔 보거라.”
말을 마친 그는 침상에 누워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란 말인가?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침상에 누웠다.
“폐하, 신첩이 어찌 보답하길 바라시는지요?”
곤청롱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다 보니 가슴이 일렁였다. 그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그녀 앞에 섰다.
남류청은 그의 습관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고 새하얀 목을 드러냈다. 곤청롱은 지금껏 늘 목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이번엔 뜨거운 입술이 곧장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남류청은 흠칫 놀라서 뭐라 말을 뱉으려 했지만, 입을 벌리는 순간 황제의 혀가 비집고 들어와 입 안을 헤집었다.
원래 곤청롱은 여인과 정을 나눌 때, 입을 맞추는 걸 싫어했다. 더 젊었을 무렵 막 혼인을 마치고 황후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류청과 전정에서 정을 나눌 때도 입을 맞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밤은 어쩐지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녀의 혀는 뭐라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럽고 매끈했다. 그의 입맞춤은 부드러웠다가 거칠어졌고, 거칠다 부드러워지길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타락하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런 그를 남류청이 죽을힘을 다해 마구 때린 뒤에야 두 사람은 겨우 입술을 뗐다.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류청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매섭게 소리쳤다.
“폐하, 신첩을 질식해 죽일 생각이세요?”
곤청롱은 잠시 뒤에야 그녀를 놓아준 뒤 침상에 누워 박장대소했다. 남류청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별안간 힘껏 그를 걷어찼다. 하지만, 곤청롱은 화를 내기는커녕 그녀의 발을 덥석 붙잡고는 어루만졌다. 그의 미소는 여전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덕마와 탁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주인이 폐하를 아주 잘 모시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폐하께서 저리 크게 웃으시는 것일 테지?
* * *
그날 밤, 곤청롱은 전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양전에서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자 모든 이들이 이 일을 알게 되었다. 남류청이 오늘도 문안 인사를 오지 않자, 황후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황후는 냉담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이 세상에 어떤 이들은 자신이 다 옳다고 여기는…….”
그때 바깥에서 한 시종이 들어오더니 웃으며 무릎을 꿇었다.
“소인, 황후 마마께 문안드립니다.”
황제 곁을 지키는 시종 중 아만阿滿이라고 불리는 자였다. 황후는 황제 곁을 지키는 이들에게 늘 다정히 대해 주었기에 얼굴에 힘을 풀고 물었다.
“일어나게, 폐하께서 무슨 일로 자네를 보내셨나?”
“마마께 아룁니다.”
아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소인을 부르시어 마마께 말씀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요즘 남 귀인이 숙면을 취하지 못하여 몸이 불편한 탓에 마마께 문안을 드리러 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말에 황후의 안색은 급변했다. 황제가 미친 것인가? 시종을 시켜 전하는 말이 고작 이거라니. 후궁에서 황후에게 문안을 오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하나밖에 없었다. 황제의 아이를 회임한 경우.
혹여나 아이가 잘못될 수도 있으니 처음 삼 개월은 문안을 오지 않아도 됐다. 그마저도 태의가 진맥을 하고 몸이 허약하다고 판명되는 경우, 직접 황후에게 보고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황후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몸이 약해도 매일 인사하러 와야 했다.
한데 남류청은 어째서 문안을 오지 못한단 말인가? 고작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는 게 이유라니. 게다가 모든 일을 돌봐야 하는 황제가 일개 귀인의 숙면까지 신경 쓰다니… 대체 그녀가 뭐라고?
황후는 입술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화가 났다. 혼인 후 황제가 그녀의 체면을 이렇게까지 깎아내린 적은 없었다. 타국의 여인을 위해 그녀의 체면을 짓밟다니! 정욕에 눈이 뒤집혔단 말인가? 그녀는 몽달에서 가장 혁혁한 세도가의 적장녀이자 몽달의 황후였다. 그녀가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제에게 따져 묻기 위해서였다.
궁전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모든 이들이 황후가 몹시 분개하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감히 입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황후가 황제를 찾아가 따지기만을 바랐다. 어쨌든 큰 싸움이 벌어지면 그들은 재밌게 구경만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황후는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다시 조용히 자리에 앉아 담담히 말했다.
“본궁도 알았으니, 우선 폐하께 돌아가게.”
아만은 황후가 자신에게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기에 조마조마 하던 참이었다. 황후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말했지만, 아만은 식은땀을 뚝뚝 흘렸다.
황후는 세도가 출신이라 도도하고 자존심도 강했다. 화가 난다고 황제에게 달려가 싸움을 건다면 시정에서 욕을 퍼붓는 여편네들과 뭐가 다르겠는가? 어쨌든 시간은 많으니 좀 더 멀리 내다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