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98)화 (998/1,192)

제998화

그녀를 발견한 그 순간,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마른침을 삼킨 그는 모든 노력이 헛수고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를 멀리했던 시간이 우습다는 듯, 그의 시선은 오로지 그녀에게 향했다.

그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게 몹시 화가 났다. 그 여자를 증오하면서도 다른 여인들처럼 제게 술을 권하고 교태롭게 웃어 주길 바라다니. 그는 자가당착에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을 에워싼 후비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했다.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남류청은 그에게 오지 않았다. 그는 결국 그녀를 불러 기회를 주었지만,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더는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차리니, 분노가 그의 사지를 불태울 기세로 들끓었다. 감히 지고지상인 황제를 무시하다니……! 누가 저 여인의 체면을 세워 주고 담력을 키워 주었단 말인가? 그는 그녀가 위험한 존재라는 걸 망각한 채 결국 그녀를 찾아갔다.

그 여인은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맞이했다. 그는 인사도 받지 않고 그녀를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여인은 살짝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에게도 뜻밖의 일인 듯했다. 그 반응은 그의 화를 살짝 가라앉혀 주었다. 자신이 무서운 존재라는 걸 알았으니 그걸로 되었다.

뒤에 서 있던 시녀가 조용히 문을 닫아 주었다. 그는 여인을 침상에 눕히고 조용히 그 위에 올라앉았다.

발버둥치던 남류청은 그의 눈을 보곤 반항을 멈추었다. 어차피 오늘 그가 얌전히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받아들이는 게 덜 고생하는 길이었다.

* * *

그렇게 곤청롱과 남류청이 침대에서 얽혀 있을 때, 진전은 자그마한 숲에 도착했다.

그는 남류청에게 어째서 부인으로서 갖춰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고 그를 유혹하려 한 것인지 물으려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집스럽게 나무 아래에 꿋꿋이 서 있었다.

영롱한 달빛이 마치 갓 뽑아낸 얇은 비단 실처럼 한들거렸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비단 사이를 나풀거리며 춤추던 미인만 없었다. 그는 자신이 왜 실망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말을 묻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그녀가 오지 않아서일까?

결국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궁으로 돌아갔다. 황제의 침전에 시위 대신 보초병만 자리해 있자 그가 물었다.

“폐하께서 궁에 안 계시느냐?”

“예, 대인.”

보초병이 답했다.

“폐하께선 서양전에 가셨습니다.”

그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 같았다.

“폐하께서 어딜 가셨다고?”

“폐하께선 남 귀인의 서양전에 가셨습니다.”

그는 흠칫 놀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가슴에 별안간 구멍이 뚫린 것처럼 아파 왔다.

* * *

서양전은 이미 비구름이 걷힌 뒤였다. 남류청은 침상에 엎드린 채 고개를 틀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곤청롱은 꼿꼿이 누워 한쪽 팔을 이마에 대고 눈매를 가리고 있었다. 마치 잠이 든 것처럼 보였지만, 남류청은 그가 깨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신첩에게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곤청롱은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네가 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아니냐?”

남류청은 몸을 돌려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팍에 천천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폐하, 오늘밤 절 충동적으로 찾아오신 거예요, 아니면…….”

그녀는 입을 가리고 까르르 웃었다.

“옛정을 잊지 못하신 거예요?”

곤청롱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슬쩍 힘을 주었다. 남류청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폐하, 더 힘을 주시면 제 손이 으스러질 겁니다.”

곤청롱이 코웃음을 쳤다.

“짐이 네 손을 으스러뜨리면 안 되는 것이냐?”

남류청이 애교스럽게 웃었다.

“물론 되지요. 신첩은 폐하의 것이니, 신첩의 손도 당연히 폐하의 것이니까요.”

빈말이라는 걸 아는데도, 곤청롱은 기분이 나아져서 그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드디어 마음이 가라앉자 곤청롱은 이마에 올려두었던 팔을 내리고 남류청을 바라보았다.

“말해 보거라. 무슨 수작이냐?”

남류청이 화들짝 놀란 척하며 물었다.

“폐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얌전히 후궁에 틀어박혀 있는데, 수작이라니요!”

곤청롱은 그녀가 시인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저 그녀의 다음 계획이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을 뿐이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돌아가고 싶죠.”

그녀가 입을 가리며 하품했다.

“하지만 남원은 지금 남현속 천하라서 돌아간다 한들 죽게 될 거예요. 만약,”

그녀가 시시덕거리며 그의 팔을 껴안았다.

“폐하께서 남현속을 죽여 주신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요.”

곤청롱은 그녀를 흘겨보며 팔을 뺐다.

“짐이 말하지 않았느냐. 오래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희망이 있을 거라고.”

“알겠어요.”

남류청은 눈을 감고 축 늘어져 대꾸했다.

“그럼 오래 기다려 보죠, 뭐.”

곤청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남류청도 침묵을 지켰다. 그녀의 호흡이 가볍고 일정해졌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곤청롱은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다가 조심스레 이불을 젖히고 직접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향했다.

문이 가볍게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남류청은 그제야 눈을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그녀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황제가 그녀를 후궁에 방치하게 한 다음 기회를 틈타 도망치는 것. 다른 하나는 예전 계획이었던, 곤청롱을 발아래 두고 그녀를 돌려보내게 하는 것. 그녀는 후자가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곤청롱이 정말 그녀를 쉽게 놓아주려 할까?

* * *

이튿날 아침 조금 늦게 일어난 남류청은 이상한 통증을 느꼈다. 허리는 시큰거리고 다리는 욱신거렸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아팠다. 그녀는 곤청롱이 야만인처럼 흉악하게 저를 대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는 짐승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이어서 그녀를 죽이려는 건 아닌가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다행히 눈을 뜨자 빛이 보였고,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에 마음을 놓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더 편안한 자세로 누웠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남류청은 아무 말 없이 그자가 장막을 걷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먼저 장막을 휙 들췄다. 장막 뒤에 있던 자는 화들짝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마, 소인을 놀라 죽게 하실 셈이십니까?”

남류청은 장막을 걷다 아픈 부위까지 힘이 들어간 바람에 다시 이불에 온몸을 파묻었다.

“그리 수상쩍게 무얼 하는 것이야?”

덕마가 장막을 걷으며 말했다.

“소인은 그저 마마께서 깨셨는지 보러 왔지요. 깨셨으면 일어나셔야 하니까요.”

남류청이 말했다.

“고개 좀 들이밀어 봐.”

덕마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남류청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그녀의 입술을 비틀었다. 덕마는 또다시 뒷걸음질쳤다. 그녀는 입을 가린 채 말했다.

“마마, 왜 그러세요?”

“불길한 말을 잘하니까. 다음에도 그런 말을 하거든 내가 또 틀어쥘 줄 알아.”

덕마는 그녀가 무얼 말하는지 그제야 깨닫고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어느 마마께서 폐하가 오시는 걸 마다하십니까? 마마께서도 참, 폐하가 오신 게 그리 싫으십니까?”

이 일이 덕마와는 상관없다는 건 남류청도 잘 알고 있었다. 일개 시녀가 황제가 갈 곳을 어찌 좌지우지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녀를 놀려주고 싶어 한 행동이었다.

“장막 내리고 다시 가. 난 좀 더 누워 있을 거야.”

덕마는 곧장 장막을 내리며 말했다.

“마마, 그거 아세요?”

“뭐?”

남류청이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막을 내린 뒤, 덕마가 장막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화 귀인 말이에요. 폐하께서 다시 후궁으로 보내셨어요.”

남류청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후궁으로 보낸 게 왜?”

“어젯밤에 화 귀인이 전정에 갔는데, 폐하께서 마구 화를 내셨대요.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왔다면서요. 그 자리에서 화 귀인이 망신당하는 걸 본 사람이 엄청 많다던 걸요.”

남류청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대체 언제? 폐하는 어젯밤 이곳에 계셨잖아?”

“소인이 자세히 물어보니까 폐하께서 이곳에 오시기 전에 있었던 일이래요.”

남류청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황제는 그녀에게 화풀이하러 온 것이었다. 어쩐지 그녀를 죽일 듯 내리누르더니……. 그녀는 눈을 감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알았어. 그만 나가 봐.”

덕마는 신이 난 목소리로 대꾸한 뒤, 발걸음을 돌렸다.

남류청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이게 후궁들이 그토록 바라는 황제의 총애란 말인가? 애초에 너무 많은 걸 바라면 결국 실망도 큰 법. 그러게 어째서 제 삶을 다른 이에게 맡긴단 말인가? 그자가 손을 잡아 주면 행복해하고, 가차 없이 무시하면 고통받아야 하는데 말이다. 정말 바보들이 따로 없었다. 그녀는 탄식을 내뱉었다.

* * *

바깥방에 도착한 덕마는 탁려가 무언가를 뒤적거리고 있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고 물었다.

“뭐 찾아?”

“지난번에 마마께서 중독되셨을 때, 태의가 준 약을 어디에 놨지?”

“네가 챙겨 둔 거 아니었어?”

탁려는 허리를 펴고 방 안을 둘러보다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분명히 상자에 넣었는데, 왜 안 보이지?”

“그 약은 갑자기 왜 찾는데? 마마는 중독된 척 연기하셨던 거라 어차피 쓸모도 없는 약이잖아.”

“별일은 아니고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찾아보는데 안 보여서.”

“이미 오래전 일인데 누가 기억하겠어.”

“약을 그대로 뒀으니까 누군가가 쓸모없는 약이라고 생각하고 버렸겠지.”

그 말에 탁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됐다. 안 찾을래. 나중에 한번 물어보지 뭐.”

“괜찮아. 그저 약일 텐데, 뭐. 보석도 아니고.”

덕마의 말에 탁려는 짧게 대꾸하고 말았다. 누가 약을 치웠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때, 그녀는 별안간 다른 일이 떠올라 호들갑을 떨었다.

“아, 큰일났다!”

“왜 그렇게 놀라?”

“오늘 마마께서 늦게 일어나셔서 황후 마마께 아침 문안을 안 드렸잖아.”

“…….”

덕마는 탁려만큼 똑똑하진 않았지만, 그게 심상치 않은 문제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매일같이 문안 인사를 가던 사람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황후는 예절을 가장 중시했기에 이 일로 트집 잡을 게 분명했다. 덩달아 초조해진 덕마가 물었다.

“어떡해?”

탁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괜찮아. 마마께서도 생각이 있으실 거야.”

남류청의 곁을 오랫동안 지킨 만큼, 탁려는 자신의 주인이 쉽게 당하기만 할 사람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탁려와 덕마의 걱정도 일리는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