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7화
남류청은 몇 발짝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긴 옷자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폐하, 오늘은 흘하절에 맞는 옷을 입어 춤을 추기에는 너무 거추장스럽습니다. 다음 기회에 보여 드려도 괜찮을지요?”
곤청롱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변에 어여쁘게 치장한 궁비들이 가득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남류청에게 머무르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던 그녀가 술잔을 들고 움직이기에 자신 곁으로 다가오는 것으로 생각했건만… 그녀는 다른 탁자로 향했다. 그는 기분이 퍽 불쾌했지만, 어찌 된 까닭인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목청껏 부르고 말았다.
그 뒤로 황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남류청은 살짝 민망했다. 담소를 나누던 이들도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고 이야기를 멈추었다. 장내 분위기는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황후가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폐하, 남 귀인은 남원 춤에 능하니 몽달의 긴 치마를 입고 추는 건 분명 어려울 것입니다. 다음에 보는 걸로 하시지요.”
황제의 시선은 여전히 남류청에게 머물러 있었다. 황후의 말처럼 평소 남원의 옷을 입던 남류청은 오늘 몽달의 옷을 입고 있었다. 늘 그를 유혹하려 짓던 미소는 어디 가고, 오늘은 담담한 얼굴이니 그녀와 거리감이 느껴졌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그녀를 원했다. 그녀의 장포를 찢고 그녀를 굴복시키고 싶었다. 황후가 직접 그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폐하, 술 한잔 드시지요.”
황제는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 또한 남류청이 자신을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수작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냉담한 미소를 지었다.
“남 귀인이 몽달의 장포를 입고 춤을 추는 건 본 적이 없군. 분명 그 또한 색다른 멋이 느껴질 것 같은데… 남 귀인, 짐의 체면 좀 살려 주지.”
황제의 말에 다들 화들짝 놀랐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춤을 춰야 한다는 말투였다. 황후는 아무 말 없었지만, 화비가 재촉하듯 말했다.
“남 귀인, 어서 춤을 추세요. 폐하를 기다리게 하면 어찌합니까.”
남류청은 서서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니 악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아무 곡조나 연주해 달라는 의미였다.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주변을 메우자 미인이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포는 확실히 춤을 추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남원 춤 특유의 날렵하고 우아한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남류청은 최선을 다해 춤을 췄지만 다들 불편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직 황제만이 눈빛을 반짝이며 지켜보았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진전이 서 있는 곳에서도 똑똑히 들렸다. 그러나 그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목석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오히려 옆에 서 있던 시위가 남류청을 힐끔거리며 속삭였다.
“남 귀인의 춤사위가 정말 보통이 아닙니다.”
진전이 서늘한 눈빛으로 시위를 째려보자 그는 곧장 눈을 내리깔았다.
진전은 지금까지도 어안이 벙벙했다.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던 선녀가 황제의 후궁이 되다니. 이 사실은 뜻밖에도 그를 좌절시켰다.
온종일, 그는 차마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황제가 그의 얼굴에서 무엇인가 읽을까 봐 걱정된 탓이었다. 물론 남류청도 바라보지 못했다. 저 요괴가 또다시 그에게 요술을 부려 남들 앞에서 망신 줄까 봐 걱정이었다.
그는 멀찍이 떨어져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었지만, 막상 자리를 뜨려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갈팡질팡하는 와중에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갑옷 아래가 끈적하고 서늘해지자 도통 견디기 어려웠다. 환상 속에 빠진 듯 누군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요괴를 제거할 거예요? 정말 그럴 거예요?”
은방울 같은 웃음소리까지 더해진 목소리가 끊임없이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때, 몸을 돌리던 남 귀인이 옷자락을 밟아 넘어졌다. 그에 연주 소리가 멈췄고 모든 이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력이 뛰어난 무희에게 이런 저급한 실수는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다들 아무 말 없이 남류청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멀쩡히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더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황제에게 말했다.
“이 옷을 입고 춤을 추긴 어렵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보세요. 옷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자리에 앉아 그녀의 춤을 감상하던 곤청롱은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지만,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못 봤을 줄 알고? 그녀는 일부러 넘어진 것이었다. 춤을 추기 싫어서 핑계를 찾으려고.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의 명령을 듣지 않으려 잔꾀를 부린 것이다.
화가 치솟았다. 그와 밀고 당기기를 하기 위해 저런 수를 쓰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죽어 마땅한 여인 같으니, 그녀는 반드시 처벌을 받게 되리라! 그는 애써 담담히 말했다.
“그럼 다음엔 다른 옷을 입고 추도록. 그만 물러가거라.”
지켜보던 이들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 남류청이 넘어졌는데도 황제는 가식적인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아하니 남 귀인이 다시 총애를 얻기는 그리 쉽지 않아 보였다.
이 일로 황제는 흥미가 떨어졌는지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의 주변에 있던 여인들도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 황후도 이 틈을 타 그들을 물렸다.
후비들은 아쉬운 마음에 연모가 담긴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지만, 다정하기만 하던 황제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도 자그마한 희망만은 잃지 않았다.
‘폐하께서 나한테 가장 많이 웃어 주셨어.’
‘폐하께서 내가 따라드린 술을 드셨어.’
‘폐하께서 내 향이 좋다고 칭찬하셨지.’
‘폐하께서 내 손을 쓰다듬어 주시다니.’
‘폐하께서 날 바라보시던 눈빛이 유난히 그윽했는데.’
‘폐하께서…….’
매년 이날 밤이면 후비들은 모두 같은 꿈을 품곤 했지만, 이튿날 아침엔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하지만 매년 반복되는 상황이라 이미 익숙했기에 그리 절망적이진 않았다.
황제가 떠나자 떠들썩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후비들 틈에서 함께 인사를 올린 남류청은 고개를 들자마자 황제 뒤를 따르는 그 사람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황후도 더는 자리를 지키지 않고 시종과 시녀들을 데리고 자신의 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후비들은 또다시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황후는 떠나기 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남류청을 바라보며 말했다.
“본궁은 자네의 담이 그리 큰 줄 몰랐네.”
모든 이들 앞에서 황제와 맞서다니… 정말 뜻밖이었다. 담담한 그녀의 말은 칭찬인지 풍자인지 알 수 없었다. 남류청이 웃으며 대꾸했다.
“칭찬 감사드립니다, 마마.”
서양전에 돌아온 뒤, 탁려가 근심 가득 말했다.
“마마, 폐하께서 저리 불쾌한 기색으로 떠나셨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덕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폐하께서 기분이 나쁘셨다면 그 자리에서 화를 내셨겠지요. 화를 내지 않으신 건 별로 개의치 않아 한다는 의미입니다.”
남류청의 신경은 곤청롱이 아닌 진전에게 향해 있었다. 이제 진전이 그녀의 신분을 알았는데 그가 어떻게 나올까? 우둔할 만큼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가 꾀를 내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진전은 곤청롱보다 심사가 깊지 못해 다루기 더 쉬웠다. 유일한 걱정이라면 황제를 향한 그의 충심이었다. 그 바보가 설마 혼자 고민하다 황제에게 죄를 고하는 건 아니겠지?
화장대 앞에 앉은 그녀는 덕마의 시중을 받아 머리에 꽂은 장신구를 빼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밤 어떻게든 진전을 만나서 더는 술수를 부리지 말고 그에게 속시원히 털어 놓아야 했다. 그때, 덕마가 그녀에게 말했다.
“마마, 폐하께서 춤을 추라고 하신 걸 보면 분명 마마를 아직 잊지 못하시는 겁니다. 아마 오늘 밤 마마를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남류청은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말이 씨가 되는 법이야. 정신 사납게 하지 마.”
덕마가 말했다.
“소인이 어찌 마마의 정신을 사납게 하겠습니까. 후궁의 마마들 중 폐하의 승은을 원치 않는 분이 어디 있다고요!”
그때, 탁려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 어서 폐하를 맞으셔야 합니다. 이미 전각 입구까지 오셨습니다.”
남류청은 덕마에게 삿대질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결국 그녀는 서둘러 황제를 맞이하러 달려갔다.
침전으로 돌아온 곤청롱은 여전히 기분이 불쾌했다. 그는 다시 만난 남류청이 이런 태도로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을 때, 남류청이 자신에게 밀고 당기는 수작을 부리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다시 냉정을 되찾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자신이 냉대를 받았다는 생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오늘 밤 남류청은 그에게 조금도 마음 쓰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이제 남류청은 그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는 동시에 몽달을 빠져나갈 다른 방법을 고민 중이란 뜻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자 그에게 엄청난 분노가 밀려왔다.
그가 남류청을 후궁으로 보낸 진짜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그저 그가 그녀에게 싫증난 것이라고 여겼을 테다. 그 또한 스스로에게 남류청이 후궁에서 어떻게 살아나가는지 지켜볼 거라는 핑계를 댔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자신을 제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었다.
제왕이 자제력을 잃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중독시키는 여인들을 독버섯 자르듯 베어 냈다. 그는 반드시 그녀를 망가뜨려야 했다. 후궁은 피를 보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곳이라 근간도 없는 타국의 여인을 망가뜨리기엔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였다.
그녀는 후궁에서 배척당하고 푸대접을 받아야 했다. 굳건한 마음과 인내력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곳이었기에 그는 그녀가 말라비틀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중독 증세를 보였다. 그녀 스스로 한 짓이란 걸 알면서도 그는 화 귀인을 전정으로 불러서 그녀를 향해 번쩍이는 칼날을 막아 주었다. 그때, 그는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걸 인지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시간이 그녀의 흔적을 지워줄 거라고 믿었다. 한 달이 넘도록 그녀를 보지 않았고 그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온정신을 국사에 쏟다 보니 천천히 정상적인 생활을 되찾았다. 그는 이제 평정심을 가지고 그 여인을 마주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고, 그걸 검증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를 만난 뒤 깨달았다. 모든 건 그저 그의 상상뿐이었다는 걸.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어도, 그녀가 남원이 아닌 몽달의 장포를 입고 있어도 그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