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6화
화 귀인은 이 일을 황제에게 고자질할지 말지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냥 조용히 묻고 넘어가자니 자신이 다른 궁비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착각할 것 같았다.
오늘 약한 모습을 보이면 온갖 방법을 써서 그녀를 괴롭히려 할 터. 그러나 황제의 총애를 얻고 있는 지금, 그가 그녀의 뒷배가 되어 준다면 저들의 기세를 단번에 꺾어 버릴 수 있을 터. 앞으로 그녀를 업신여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웠다. 남류청만 봐도 그랬다. 저리 예쁜 사람이 총애를 받는 것도 고작 한 달 정도에 불과했는데, 그녀는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녀는 끊임없이 망설였다. 그러나 자신이 흠모하는 황제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녀는 그동안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곧장 털어놓았다. 비록 일개 첩이지만, 화 귀인은 자신의 마음을 바친 황제에게 진심을 알리는 쪽을 택했다.
화 귀인의 말에 황제의 미간은 더욱 좁혀졌다.
“다른 궁비들이라니… 누가?”
화 귀인은 궁비들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많은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나열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황제가 말했다.
“그간 전정에 있었으니 준비를 하지 못했다고 해도 짐은 탓하지 않을 것이오. 그만 일어나시오.”
결국 염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화 귀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지금 황제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저들이 바라는 대로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상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를 향한 황제의 총애는 더 이상 없으리라.
화 귀인이 벌인 작은 소동은 황제의 흥취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그는 화 귀인을 지나 걸음을 옮기다 어느 상 앞에서 멈추었다. 그 뒤에 서 있던 여인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그만 일어나라는 뜻을 전했다.
황제는 하병을 한 조각 천천히 집어 먹었다. 제법 진지하게 음미하며 시식하는 모습이었다. 주변을 가득 채운 은은한 향기는 황제의 기분을 더 들뜨게 했다. 그가 웃으며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남 귀인은 몽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하병 만드는 솜씨가 매우 뛰어나군. 다들 이리 와서 맛 좀 보시게.”
안 그래도 남류청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왕손과 귀족들이 황제의 말에 하나둘 다가왔다. 이윽고 그들은 하병을 하나씩 집어 맛을 보더니 아낌없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매우 훌륭합니다. 남 귀인께선 솜씨가 대단하시군요.”
진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어딘지 익숙한 향기가 났다. 그 향에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그는 순식간에 뒤까지 밀려났다. 그렇게 홀로 뒤에 서 있는 진전을 본 황제는 그에게 가까이 오라고 말했다.
“진 대인, 이리 와서 남 귀인의 하병 좀 맛보게.”
이름이 불리자 진전은 어쩔 수 없이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는 황제의 앞에서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상에 놓인 음식만 바라볼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 혹여 괜한 의심을 살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자그마한 하병 조각을 천천히 음미하는 그의 시야에, 콩 과자를 건네는 하얀 손이 들어왔다.
“대인, 하병이 마음에 안 드시면 이것도 드셔 보시어요.”
진전은 머릿속이 쾅 하고 폭발한 것 같았다. 이 목소리는…….
진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있는 건 역시나 그토록 그리워하던 얼굴이었다.
그는 사실 진작 알고 있었다. 선녀라거나 요괴 같은 게 어디 있겠는가. 그가 콩 과자를 받지 않자 그녀는 접시를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대인?”
황제가 말했다.
“남 귀인이 저리 권하니 한번 맛보게.”
진전은 무표정하게 콩 과자를 하나 집었다. 한 입 와드득 깨무니 달콤한 향이 입안 가득 퍼졌지만, 정작 그는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다행히 황제는 남 귀인 앞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진전은 내심 안심하며 굳은 몸을 이끌고 황제의 뒤를 따랐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조용히 농을 건넸다.
“진 대인, 미인 때문에 혼비백산한 것인가?”
그는 종실의 어린 왕야로, 존귀한 신분 때문에 평소 진전은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려야 했다. 그러나 진전은 싸늘하게 그를 노려봤다.
존비도 무시한 채 날을 세우는 진전에게 어린 왕야는 버럭 화를 내려 했지만 어쩐지 조금 겁나기도 했다. 진전이 마치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성이 난 얼굴로 코를 만지다 입을 다물고 앞으로 향했다.
황제는 관례대로 탁자 끝까지 걸어갔다. 황후와 화비, 용비와는 짧게 담소도 나누었지만 나머지 비들에겐 큰 온정을 베풀지 않았다. 황제가 화 귀인 앞에서 멈춰 설 거라는 건 다들 예상하던 일이었다. 어쨌든 빈 탁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으니 황제가 못 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일 터.
모든 이들이 재미난 구경거리를 할 생각에 들떠 있었고, 역시나 황제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가 보인 태도에 모든 이들은 화 귀인이 두 번 다시 황제의 총애를 얻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는 일이 벌어졌다. 이번엔 황제가 남류청의 상 앞에 서서 제법 오랜 시간 머문 것이다. 남 귀인은 화 귀인과 달리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기에 다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황제가 걸음을 멈춘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궁비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직까지 많은 기회가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어느새 저녁 무렵이 되었고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명절 분위기는 한층 더 짙어졌다. 시종들은 일찍이 양의 뿔로 만든 유리 등잔을 세워 놓고 나무줄기에 적색, 청색, 황색, 녹색 등 각종 띠를 둘렀다. 길게 이어져 있던 상도 원형 탁자로 바뀌어 있었다.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화비, 용비는 한 탁자에 함께 앉았다. 다른 이들은 그 옆에 착석했다. 탁자는 그렇게 중앙이 뚫린 원형 대열을 만들었다.
지금이야말로 궁비들이 아름다움을 다툴 좋은 기회였다. 옷차림부터 머리 장식, 화장까지 전부 새롭게 갖춘 궁비들은 평소 차마 입지 못했던 의상까지 꺼내 마음껏 자신을 뽐냈다.
어떤 이는 목깃이 깊게 파인 옷을 입어 새하얀 피부를 드러냈고, 또 어떤 이는 평소보다 허리둘레가 두 치나 줄어든 옷을 입고 허리선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또 다른 이는 좁은 소매통을 넓게 바꾸어 손을 들면 소매가 팔 안쪽으로 흘러내려 섬섬옥수가 훤히 드러나게 했다.
화장은 더욱더 각양각색이었다. 평소 후비들은 황후처럼 단아하고 우아해 보이게 화장했다. 괜스레 황제를 유혹한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다들 자신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을까 봐 경쟁하듯 짙게 화장했다.
누군가는 눈썹을 비스듬히 꺾어 그렸고, 또 누군가는 입술을 선명하게 칠했다. 여기에 목까지 연지를 바른 이부터 피부 곳곳 금가루를 뿌린 이까지……. 그저 예쁘면 그만이었다.
궁비들의 화려한 화장에 황제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황제의 활짝 웃는 낯을 보고 궁비들은 저마다 자신을 보고 웃는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 바람에 황후가 곁눈질로 힐끔거리는 것도 무시한 채 술잔을 들고 황제 곁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누군가 먼저 황제에게 다가가자 다른 이들도 뒤쳐질세라 곧장 따라붙었다.
궁비들에게 둘러싸인 황제는 한껏 흥취가 올랐는지 활짝 웃고 있었다. 술을 권하는 궁비가 있으면 거절하지 않고 모두 마셨다.
옆에 앉아 있던 황후는 후궁들을 모두 물리고 싶었으나 황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봐 조심스러울 뿐이었다. 평소 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던 여인들은 새색시처럼 단아하고 조용하기만 했는데, 황제 앞에만 오면 어찌 이리 대담해지는 것이란 말인가?
남류청은 천천히 우유차를 마셨다. 이미 탁자엔 빈자리가 넘쳐났다. 자신이 앉은 탁자에는 고작 두 사람만 앉아 있었는데, 자신과 화 귀인이었다.
황제에게 나방처럼 달려드는 궁비들을 보며 그녀는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어떻게든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기만 할뿐, 그 사람이 내 비위를 맞추게 할 생각은 어찌 못 한단 말인가? 그 꼴을 보고 남류청이 조소를 짓고 있는데 화 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 귀인은 어째서 가지 않는 겁니까?”
남류청이 말했다.
“이미 총애를 잃은 몸입니다. 성가시게 움직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번엔 남류청이 화 귀인에게 물었다.
“화 귀인은 왜 안 가십니까?”
화 귀인은 황제 주변으로 몰려든 여인들을 보며 도도한 태도를 보였다.
“전 필요 없습니다.”
남류청이 조금 놀란 척 말했다.
“아, 화 귀인께서 아직 폐하의 총애를 받는 분이라는 걸 깜빡했네요.”
화 귀인은 남류청의 말투에서 조롱을 느꼈지만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오늘 밤, 궁비들은 저마다 장기 자랑을 준비했다. 춤을 추는 이도 있었고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황제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은 시를 써서 읊는 이도 있었다. 황제와 궁비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가무를 즐기며 떠들썩한 시간을 보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남류청은 시시한 모양인지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아무리 담이 크다 한들 황제의 눈앞에서 신하와 시시덕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루하고 딱히 할 것도 없었기에 그저 잠시 저 바보를 골리고 싶었다.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던 사이, 진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술잔을 들고 인사하러 가는 척 다른 탁자로 향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피자 그제야 진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꼿꼿이 서 있었다.
시위는 원래 황제 가까이 있어야 하지만 오늘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호위하고 있었다. 물론 진전은 신분이 높으니 그가 직접 황제의 호위를 설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남류청은 그가 무슨 까닭으로 황제 옆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 진전의 표정까지 또렷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지금 진 대인은 아마 불안하거나 걱정이 가득할 터.
그녀는 진전이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인기척을 내려 했다. 하지만 마침 앞쪽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남 귀인.”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남류청은 황급히 눈꺼풀을 드리웠다. 그러다 다시 시선을 들어 올릴 땐, 곤청롱이 자신을 불러준 게 놀랍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황제가 말했다.
“남 귀인이야말로 무도에 능하지 않는가? 어째서 모두에게 춤 솜씨를 보여 주지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