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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95)화 (995/1,192)

제995화

얼마 지나지 않아 몽달은 흘하절吃夏節을 맞았다. 여름이 매우 짧다 보니, 여름의 맑고 화창한 날씨를 감사해하며 축제를 열던 게 명절로 자리 잡은 것이었다.

이날이면 사람들은 집집마다 식탁과 의자를 들고 거리로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마셨다. 특별히 먹는 음식도 정해져 있었는데, 하병夏餠이나 콩 과자, 유락乳酪(우유로 만든 식품. 특히 버터나 식용 크림을 이른다) 전병, 그리고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튀김 등이었다.

다른 것들은 누가 하든 대부분 맛이 비슷했지만 하병만큼은 요리 솜씨가 확연히 드러났다. 오죽하면 하병으로 어느 집 부인이 음식을 잘하는지 평가할 정도였다.

궁 안의 후궁들도 흘하절을 애타게 기다렸다. 황제도 이날만큼은 후궁에 찾아와 비들이 만든 간식을 먹기 때문이었다. 혹여나 황제의 입맛에 맞는 간식을 만들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무한한 영광을 얻는 것이었다.

또한 이날은 궁비들이 화려하게 치장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낼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황제의 관심을 산다면 그날 밤 자신의 이름이 적힌 패가 뒤집힐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궁비들은 흘하절이 오기 훨씬 전부터 머리 장신구부터 각종 기예, 음식 하나하나까지 정성을 쏟았다.

그녀들이 관심을 갖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화 귀인은 전정에 머무르는 시간이 긴 탓에 흘하절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할 것이다. 황제가 직접 궁비들의 음식을 평가하는 날인데 준비를 제대로 못 한다면 크게 망신을 당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그녀에 대한 황제의 흥미 또한 자연스럽게 떨어지겠지?

이 기회를 궁비들이 놓칠 리 없었다. 설령 화 귀인이 부지런히 흘하절을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그녀의 노력을 싹 지워 버리려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다들 흘하절에 열을 올리고 있는 와중에 남류청만 유일하게 여유로웠다. 그런 그녀에게 덕마는 입이 닳도록 충고했다.

“마마, 그래도 치장은 좀 하시지요. 폐하께서 오시잖습니까. 이번에 폐하의 눈에 들면 다시 총애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남류청이 웃으며 말했다.

“번거롭게 치장까지 해야 한다고? 그깟 총애가 뭐라고… 난 그런 데 관심 없어.”

덕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궁에 있는 이들에게 총애 말고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탁려는 남류청의 성격을 잘 알았기에 그녀의 말에 웃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선녀 같은 마마께선 다른 분들과 비교가 안 되시지요. 어디를 가나 빛나는 용모라 소인들이 더 도와드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간식 만드는 건 도울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겐 마마께서 직접 만드신 거라고 하십시오. 혹 폐하께 칭찬이라도 받게 되면 마마의 체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다른 분들도 마마를 다시 보실 겁니다.”

그러자 남류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리하거라.”

날이 밝자마자 궁 안은 주방으로 가는 시녀들로 떠들썩했다. 각 궁의 주인들은 신선한 채소나 과일을 얻기 위해 일찌감치 시녀들에게 돈을 쥐여 주고 주방으로 보냈다. 시녀들은 주방에서 재료 구입을 담당하는 자들에게 신선하고 맛있는 재료를 사 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궁 밖에서 엄선하여 구매한 재료들을 다시 시녀들이 가져가는 식이었다.

황후와 화비, 용비는 주방에서 직접 재료를 가져다주었지만, 나머지 비를 모시는 시녀들은 주인의 신분 순서대로 줄을 서서 받아 가야 했다. 지위를 따지게 될 경우, 싸움이 일어나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모시는 이의 신분이 얼마나 존귀하든 예외는 없었다.

오전에 치장을 마친 여인들은 음식을 준비했다. 백성들이 흘하절을 지내는 것처럼, 그들 또한 길게 이어 붙인 팔선상 위에 각 궁에서 만들어 온 음식들을 올려놨다. 그리고 그를 각 궁의 시녀들이 지키고 있었다. 못된 마음을 먹은 누군가가 음식에 장난을 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황제 앞에서 흉한 꼴을 보이게 된다면 그건 끔찍한 재앙이었다.

전정에서 돌아온 화 귀인은 여기저기에서 보내는 곱지 않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 또한 그들의 속내를 훤히 꿰고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자신의 궁으로 향했다.

흘하절을 보내기 위해 화 귀인은 아침 일찍 후궁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현재 황제에게 엄청난 총애를 받고 있는 만큼, 치장하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보다는 그녀 몫의 상을 비워 두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음식으로 가득 찬 다른 자리들 틈에서 그녀의 상만 텅 비어 있다면 큰일이지 않겠는가? 황제의 총애가 허무하게 끝나는 건 원치 않았기에 그녀는 음식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평소에는 손가락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는 이들이었지만 흘하절만큼은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황제를 위한 것이니 반드시 정성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아비가 먹을 음식인데 남의 손을 빌릴 수는 없지 않은가.

화 귀인은 정성을 다해 하병과 유락 전병, 밀가루 반죽 튀김을 만들었다. 과일들로 접시를 꾸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만족스레 접시를 바라보던 그녀는 시녀들에게 요리를 상까지 조심히 옮기라고 분부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화 귀인은 심부름을 보낸 시녀 하나가 상 옆에 서서 엉엉 울고 있는 걸 보았다. 거기다 그녀의 상 위엔 아무것도 차려져 있지 않았다. 그녀가 만든 음식은 바닥에 떨어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화 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후궁 안에 그녀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일 줄은 몰랐다. 화 귀인은 시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잘하는 짓이구나!”

고작 이런 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게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시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목 놓아 울었다.

“마마, 저들이 일부러 접시에 몸을 부딪쳤습니다, 흑…….”

화 귀인도 누군가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따진단 말인가? 곧 황제가 나올 시간이었기에 다시 음식을 만들 수도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또다시 시녀의 뺨을 때렸다. 시녀는 볼을 감싸 쥔 채 감히 소리도 내지 못했다. 화 귀인의 난폭한 모습에 황후가 직접 그녀를 꾸짖었다.

“어찌 그리 소란을 피우는 것인가. 어서 바닥을 정리하게. 곧 폐하께서 오실 테니 다들 정신 차리고!”

궁비들이 무릎을 굽히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마마.”

몇몇 시종이 다가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깨끗이 정리했고, 목 놓아 울던 시녀도 안으로 들어갔다. 화 귀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궁비들 사이에 섰다. 가슴속에 분노가 쌓여 갔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시종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전해졌다.

“황제 폐하 납시오!”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고 황제를 맞이했다. 남류청은 곤청롱을 곁눈질했다. 한 달 동안 보지 못했으니 그와 보냈던 시간은 물거품처럼 사라진 뒤였다. 남류청은 큰 미련 없이, 황제 옆을 지키고 선 진 통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따가 그녀를 보게 된다면 진전은 얼마나 놀랄까? 바보처럼 이렇게 묻지는 않을까?

“넌 사람이냐, 아니면 요괴냐?”

곤청롱은 황실 종친과 가까운 신하들을 대동한 채 후궁을 찾았다. 음식이 가득 차려진 상과 무릎 꿇은 궁비들이 그들을 맞았다. 가장 앞쪽엔 황후가, 그 뒤로 화비와 용비가 있었지만, 황제의 눈에 남류청이 띄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미인이었다.

그가 남류청을 후궁으로 보낸 것은 적으로 가득한 이곳, 후궁에서 그녀가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방법을 강구하여 황후에게 아부하거나 자기 파벌을 만들 거라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남류청은 여전히 냉철하고 거만한 남원의 공주였다. 그녀는 향을 만들어 궁비들에게 팔았고, 그녀가 만든 향은 기다렸다 사야 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과거에 받았던 총애는 그녀에겐 이미 흩어진 연기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비록 황제에게 푸대접을 받고 있었지만, 그에 연연하지 않고 조용히 정세를 살폈다. 오히려 활기찬 나날을 보낸다고 할 수 있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여인이었다.

황제가 다가오자 황후는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첩, 폐하를 뵙습니다.”

황후가 말을 마치자 뒤에 있던 모든 궁비들이 일제히 인사를 올렸다. 제각기 화려하게 치장한 궁비들의 머리 장신구와 휘황한 비단옷이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은은한 향기도 맴돌며 그의 코끝을 자극했다. 곤청롱은 직접 황후를 일으키며 시원스레 말했다.

“다들 일어나시오. 오늘은 명절이니 편히 행동하시오. 다들 그리 예를 차릴 것 없소.”

그 말에 궁비들은 새가 지저귀듯 어여쁜 소리로 웃었다.

규율이 엄격한 몽달 황궁에서는 신하들이 감히 황제의 여인을 쳐다볼 수 없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흘하절에는 후궁 출입을 윤허하였는데, 이때 몇몇 담이 큰 신하들은 슬쩍 궁비들을 엿보았다. 후궁이 삼천 명이나 된다고 할 정도니 각양각색의 미녀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진전은 왕손 공자들과 달리 충심이 깊었다. 황제가 예를 차릴 것 없다고 했지만, 그는 줄곧 눈을 내리깔고 삼 촌 안에서만 시선을 움직였다.

그때, 그는 누군가 나지막이 쑥덕대는 걸 들었다.

“남원 공주 봤는가? 정말 미인이더군. 역시 명불허전이야.”

“봤네, 아주 깜짝 놀랐지. 한데 그런 미인이 어찌 폐하의 총애를 받지 못한단 말인가?”

“폐하의 마음을 우리가 함부로 가늠해선 안 되지. 게다가 지금 그렇다고 해서 훗날까지 총애를 받지 못한다고 정해진 건 아니지 않나.”

“저기 보게. 남원 공주가 우리 쪽을 힐끔거리고 있네. 설마 우리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 건가?”

“하하, 작게 얘기하게. 폐하께서 들으시면 곤장을 맞을 걸세.”

“미인의 관심을 받는다면야 곤장이 뭐 대수인가? 왜, 그런 말도 있지 않나, 모란꽃 밑에서 죽으면 귀신이 되어도 풍류를 즐긴다고 말일세.”

“하하…….”

난잡한 대화를 듣던 진전은 헛기침했다. 그러자 그들은 그의 눈치를 보더니 곧장 입을 다물었다.

이런 날이면 늘 황제는 황후의 체면을 신경 썼다. 그는 황후가 만든 음식을 맛보며 평가를 내렸다.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고, 혹여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색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신하들도 자연스레 황제를 따라 칭찬을 늘어놓으며 황후의 체면을 살려 주었다.

황후는 더없이 기뻤지만 줄곧 조신하고 단아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눈꼬리에 담긴 기쁜 기색만은 숨기지 못했다.

황후부터 용비, 화비까지. 황제와 신하들은 길게 이어진 상을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지위가 낮은 궁비의 음식은 힐끔 쳐다보는 게 다였다. 유독 눈에 띄는 음식이 놓여 있을 때만 그의 발걸음을 붙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주 잠깐 머물다 가는 게 다였다.

황제는 마침내 화 귀인의 자리 앞에 다다랐다. 하지만, 상엔 아무 것도 차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찌 된 일이오?”

화 귀인은 곧장 무릎을 꿇고 울먹거리며 말했다.

“폐하, 신첩이 하병을 만들었으나 다른 궁비들이 바닥에 내던졌습니다. 부디 폐하께서 이 일을 해결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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