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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94)화 (994/1,192)

제994화

길모퉁이를 돌자마자 그는 왼쪽 담벼락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그는 그곳에 멈춰 서서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잠시 망설였지만, 가까이 다가가진 않았다. 남자와 여자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소리를 듣자마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궁궐은 적막했다. 불쌍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서로 몸을 녹이는 일은 궁중에서 비밀도 아니었다. 때로는 황제에게 보고해도 장형을 몇 대 내리고 끝내는 일이었기에 그는 대부분 모른 채 조용히 지나갔다.

조금 더 앞으로 가면 오른쪽에 작은 문이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에는 작은 숲이 하나 있었다. 여름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안에 물건을 숨기기 쉬워서 그는 항상 이곳을 유심히 살폈다. 항상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와서 한 번씩 살펴보곤 했다.

밤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얼굴에는 열기가 감돌았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마치 안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허리춤에 꽂힌 칼자루에 손을 올린 채 가볍고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유백색의 달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오는 것이 마치 비단을 한 겹 덮은 것 같았다. 매우 얇은 비단 속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나무 가장자리에 서서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잘못해서 인계로 내려온 선인처럼, 온몸에서 조금도 때 묻지 않은 성결한 빛을 발하고 있는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진전은 숨조차 내뱉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고, 눈도 깜빡할 수 없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다 하얗게 변하고 자신의 심장 박동이 귓가에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그의 눈에는 희미한 빛만이 존재했고, 그 빛 속에는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천지의 별과 달을 무색하게 할 만큼 빼어난 용모를 지녔다.

그녀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눈빛이 별처럼 빛났다. 그녀가 입가를 끌어올린 채 방긋 웃는 그 순간, 마치 번개가 그의 가슴을 타격한 듯했다. 진전은 죽을 것 같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천천히 호흡했다.

진전은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 밖은 이미 훤히 날이 밝아 있었다. 창문으로 담담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 옅은 햇빛은 마치 어젯밤의 달빛과 비슷했다. 그가 어젯밤에 본 것이 현실이었는지 꿈결이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달빛으로 흠뻑 젖은 선인은 가까이 갈 수 없을 정도로 거룩했다.

물기가 가득한 눈빛, 촉촉한 붉은 입술이 도무지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점점 피가 끓어오르고 뜨거운 열기가 몸속에서 달음질쳤다. 그의 몸에 뭐라 말할 수 없는 변화가 생겼다. 마치 끝까지 당긴 활처럼 팽팽해져서 조금만 힘을 주어도 현이 뚝 끊어질 것 같았다.

입구에서 누군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그를 불렀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직속 부하 겸 친구인 양기楊奇였다.

“대인께서는 아직도 주무시고 계신 거야?”

보초병이 조용히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아직 깨지 않으셨습니다. 부통령.”

양기는 좀 의아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어나지 않는다니, 몸이 많이 불편한 것 아니야?”

그는 조용히 까치발을 하고 문 뒤를 바라보았다. 진전은 서둘러 몸을 옆으로 돌려 벽을 향해 누웠다. 그는 양기가 그의 침대 옆에 서서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아전阿典, 어디 아픈가?”

진전이 대답하지 않자 양기가 다시 불렀다.

“아전, 아전?”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진전은 이제야 깬 듯 몽롱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무슨 일이야?”

양기도 그냥 물러나지 않고 물었다.

“자네, 어디 아픈가?”

진전은 정신을 가다듬는 척하더니 입을 열었다.

“별일 아니야. 오늘 아침 훈련은 네가 책임져라. 난 빠져야겠어.”

양기는 약간 걱정이 되었다.

“정말 괜찮아? 태의를 찾아가 보는 건 어때.”

온몸을 달음질치던 열기는 이미 차갑게 식었다. 진전은 이불 속에서 일어나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괜찮아. 어제 잠을 못 잤어. 어서 가 봐. 훈련 일정에 늦겠다.”

양기는 그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아서 더 이상 묻지 않고 돌아섰다. 그가 입구에 이르자 보초병이 물었다.

“대인께서는 일어나셨습니까?”

“일어나셨다.”

“어디 아프신가요?”

양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괜찮으실 것 같으니 아침 식사를 준비해 드리거라.”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성큼성큼 가 버렸다. 시간이 늦었기에 어서 훈련을 가야 했다.

진전은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했다. 보초병이 가져다준 음식을 먹었지만 마음속엔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몽달은 신령을 숭배하는 나라였기에 그는 선인을 더럽힐 뻔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온종일 넋이 나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둠이 깔리고 나서야 조금 나아졌다. 그는 이렇게 어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적이 없었다. 원래 오늘 밤은 그가 당직을 서는 날이 아니었지만, 그는 양기의 일을 강제로 빼앗았다. 양기는 처음엔 걱정하며 말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야 내일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잠을 못 자니까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낫다. 그래야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양기는 할 수 없이 태의원으로 달려가서 심신을 안정시키는 안신환安神丸 몇 알 얻어 와서 건넸다.

“이 환약을 먹으면 잠을 자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한번 먹어 봐라. 그래도 안 되면 태의원에 가서 따로 수면제를 처방받고.”

환약을 품 안에 넣은 진전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뒤, 발걸음을 돌렸다. 양기는 진전이 오늘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또 뭐가 이상한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잠을 설쳐서 그런 것 같았다.

밤이 내려앉은 황궁은 고요했다. 이따금 순찰을 도는 금군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울렸다. 이게 이 고요한 밤에 들리는 가장 큰 인기척이었다. 그를 본 금군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경례를 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보냈다.

달은 중천에 높이 떴다. 그는 기둥 옆에 서서 밝은 달을 바라보았다. 한여름의 깊은 밤, 달은 오늘따라 더 맑아 보였다. 휘황찬란한 달빛은 얇은 비단처럼 보였고, 비단에 감싸진 듯한 미인은 선인처럼 보였다. 그의 눈빛은 점점 흐려졌지만, 갑자기 정신을 차린 그는 좁은 길로 발을 들여놓았다. 궁문을 지날 때 친한 시종이 인사를 건넸다.

“진 대인, 어딜 서둘러 가세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급하게 누구를 만나러 가는 줄 알겠습니다.”

밤에는 다들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만나서 서로 인사하고, 농담도 한두 마디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진전도 웃으며 욕설을 내뱉었을 텐데. 오늘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웃지도 못하고 시종에게 눈을 부릅뜨며 발걸음을 늦췄다.

숲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발걸음은 더 느려졌다. 기대와 두려움이 뒤엉켜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또렷하게 들렸다.

역시 그곳에는 비단 같은 달빛 속에서 선인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이상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아름다운 몸의 굴곡이 훤히 드러나는 옷이었다. 팔에 기다란 비단을 늘어뜨린 탓에 그녀가 몸을 돌릴 때마다 얇은 비단도 함께 하늘거렸다. 그녀는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몸을 움직였다. 그림자 때문에 어른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기이한 유혹과도 같았다.

진전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입을 쩍 벌린 채 나무 뒤에 숨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선인이 뒤를 돌아봤을 때, 촉촉한 눈빛과 불타는 듯한 붉은 입술, 그리고 여성스럽고 어여쁜 그녀의 자태가 그의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마치 넋을 빼앗아 가는 요괴 같았다. 진전은 혼이 빠져나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달빛과 그림자가 아른거렸고 그윽한 향기가 밀려왔다. 가느다란 비단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스치며 내려앉았다. 미인의 얼굴이 지척에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별들로 가득 차 있어서 보기만 해도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걸 느꼈다.

“넌 요괴냐? 아니면 선인이냐?”

미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숨을 내쉬자 은은한 향기가 그의 피부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내가 선인인 것 같아요? 요괴인 것 같아요?”

그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대답을 내뱉었다.

“요괴.”

분명 요괴임에 틀림없다. 요괴만이 인간의 본성을 끌어낼 수 있다. 미인은 입을 가린 채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죠?”

“나는 금군 통령 진전이다.”

“요괴를 제거하러 오셨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인은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주저했다. 가녀린 손가락은 뼈가 없는 듯 부드러워 보였다. 자신이 잘못해서 미인의 손을 부러뜨릴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미인은 가볍게 웃으며 비단을 사이에 둔 채 그의 손을 잡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과연 그가 상상한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는 꼭두각시처럼 그녀가 이끄는 곳으로 순순히 따라갔다.

꽃나무 아래로 밤바람이 스치고 작은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그의 머리와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온 천지에 퍼진 그윽한 향기가 그를 감싸 안았는데, 그는 그게 꽃향기인지 미인의 향기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미인은 손을 놓고 교태를 부리며 웃었다. 긴 비단을 허공에 던지고 부드러운 몸을 그에게 붙였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얼굴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그는 멍하니 서서 미인이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긴 비단은 때때로 그의 눈을 가렸고, 미인이 때로는 어른거렸다가 때로는 또렷해졌다. 그의 심장 안엔 마치 작은 새가 가벼운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그는 끝내 참지 못하고 미인의 허리를 힘주어 당겼다. 온화한 몸이 그의 품 안으로 넘어가자 미인은 낄낄거리며 그의 가슴을 매만졌다.

“진 통령, 왜 이러세요?”

진전의 눈빛은 이미 흐릿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시선은 불타는 듯한 붉은 입술에 고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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