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93)화 (993/1,192)

제993화

그날 밤, 화 귀인이 황제를 모셨다는 소문이 후궁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 소식을 들은 황후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황제가 남류청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지는 것이었다.

황제가 남류청만 잊어버린다면 누구를 총애하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실 후궁 여인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황제가 누구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고 골고루 은총을 내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남류청만 떠올리면 황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후궁에 들어온 덕에 그녀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구실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남류청은 아직 중독된 상태였다.

이런 때에 누가 그녀를 건드린다면 독약을 썼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황후는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겼기에 남들이 뒤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 요 며칠은 남류청을 건드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남들보다 더 신경을 써야 했다.

하지만 뒤이어 벌어진 일 때문에 황후는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황제가 최근에 한 사람에게 총애를 몰아주는 것에 재미가 붙었는지 화 귀인을 전정으로 불러들여 놓고 다시 후궁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하사품은 끊임없이 화 귀인의 전각으로 보냈다.

화 귀인은 직위가 높지 않아서 궁전을 단독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녀는 화비가 지내는 궁전의 편전에서 지내고 있었다. 비록 그녀는 자리에 없었지만, 그녀가 받은 금은보화는 후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모두 최상의 물건이라 자꾸 보다 보면 욕심이 생겨 질투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화 귀인은 팔방미인으로 인맥도 좋아서 황후도 심복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의 심복이 오히려 금기를 범하고 있었다. 남류청보다 더 총애를 받으면서 정도를 넘어섰다. 듣자 하니, 황제가 국정을 논할 때도 그녀를 곁에 두고 대등하게 옆에 앉히며 뭇 신하들의 눈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후인 자신도 이런 대우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황량한 내용이 후궁에 전해지자 황후뿐만 아니라 다른 궁비들도 모두 분노를 쏟아 냈다. 화 귀인에 대한 악감정은 남류청보다 더 심했다.

화 귀인이 갑자기 뾰족하게 튀며 모두를 뒤로 따돌리는 격이었다. 비슷한 위치에 있는 후궁들은 물론, 화 귀인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후궁들도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류청은 그 예쁜 얼굴로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화 귀인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리 총애를 받는단 말인가? 그녀가 자신들보다 더 예쁘길 한가, 아니면 가문이 더 나은가? 그녀들은 생각하면 할수록 불편하고 끝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낮은 지위의 천한 것이 감히 그들의 머리 위로 올라가서 행세하려고 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참지 못해도 참아야 했다. 그녀가 받은 하사품을 바라보면서 그녀들은 몇 마디 빈말을 하는 게 다였다.

“화 아우님을 폐하께서 저토록 총애하시니 정말 기뻐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수양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마음속으로는 미워서 죽겠지만, 얼굴에는 전혀 내색하지 않는. 수양이 깊지 않은 사람의 말에는 가시가 삐죽거리기 마련이었다.

“화 아우님이 영리한 줄은 이미 알고 있었죠. 어찌 우리와 비교할 수 있겠어요. 우리는 폐하 앞에만 가면 말뚝처럼 서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맞아요.”

다른 여인이 끼어들었다.

“사실 불이 꺼지면 얼굴이 뭐 보이나요. 그냥 얼렁뚱땅하는 거죠…….”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황후는 무덤덤하게 그녀들을 노려보았다.

남류청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황제는 이슬이 골고루 내리듯 모든 후궁을 똑같이 대했고 후궁도 평화로웠다. 기껏해야 각자의 하사품을 비교하는 등 작은 갈등이 생겼지만, 적개심을 품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항상 한 마음으로 뭉칠 수 있었다. 앞서 남 귀인을 편애하더니 이번엔 화 귀인이다. 조금만 세심한 여인이라면 금방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어머나, 왜 총애를 독차지하는 사람이 다 귀인이죠? 폐하께서 귀인만 편애하시나요?”

그 농담 한마디가 누군가의 머릿속에 쐐기를 박았다. 지위가 낮은 무명의 후궁들도 이제 희망이 생겼다. 황궁에서의 모든 것은 서열에 따라 분배되었다. 먹고 입는 것은 전부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황제가 하사품을 내리면 지위가 높은 궁비가 먼저 골라 갔다. 그들이 고르고 남은 것만 지위가 낮은 여인들의 손에 돌아갔다.

하지만 이젠 희망이 생긴 것이다. 지위가 낮은 후궁들은 다들 속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너도나도 뒤질세라 황제에게 얼굴을 내미는 기회를 기다렸다. 정말 운이 따를지도 모를 일 아니던가?

* * *

화 귀인이 방패가 되어 주니 남류청의 나날은 평화로웠다. 황후가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볼 여력이 없자 자연스럽게 남류청의 몸도 차츰 좋아지기 시작했고, 이따금 밖을 나가기도 했다. 원래 그녀에게 적개심이 가득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만나면 싫어하긴 했지만 대놓고 그녀를 비난하는 것은 차츰 줄어들었다.

그녀들은 정신을 온통 화 귀인에게 쏟고 있었다. 매일 전정에서는 여러 가지 소식이 전해졌다. 황제가 화 귀인을 데리고 호수에 배를 띄웠다거나 화 귀인이 대추나무 숲에서 황제에게 춤을 선보였다는 낭만적인 일화가 매일 쏟아졌다.

이런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궁비들은 기세등등하게 한바탕 성토를 벌였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입만 열면 화 귀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남류청은 구석에 앉아서 그녀들이 내뱉는 의분이 가득한 성토를 듣고 있으면, 그저 우습고 지루할 뿐이었다. 다들 배부르고 한가하기 짝이 없었다. 이럴 시간이 있으면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언제나 자기의 힘을 길러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삶을 원했다. 이곳의 여자들은 하루 종일 옷감 쪼가리, 머리 장식 몇 개, 심지어 황제가 하사한 간식 두 그릇을 가지고서 얼굴을 붉혔다. 서로 빼앗기보다는 차라리 좋은 것을 모두 가진 사람이 되면 좋지 않겠는가? 강력한 권세가 손안에 있다면, 가지지 못할 것이 무엇일까!

한가한 틈을 이용해 그녀는 연지분과 향을 만들기 시작했다. 남원의 향료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굉장히 유명했다. 하지만 남원은 폐쇄적인 나라였고 길도 험해서 남원을 오가는 상대가 많지 않았기에 남원의 향료를 파는 곳이 없었다. 공급이 부족하니 시중에 있어도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남원의 사자가 남류청을 보내 올 때, 꽤 많은 양의 향료를 가지고 와서 몽달 황제에게 바쳤다. 곤청롱은 그 물건들을 모두 황후에게 주고 궁비들과 나눠 쓰게 했다. 물건은 많았지만 그만큼 여인들도 많았다. 사람마다 손에 쥐어지는 게 얼마 되지 않으니 모두 다 써 버렸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중요한 자리에서 쓰려고 아껴 쓸지도 몰랐다.

남류청이 향을 잘 만든다는 소문이 시녀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다시 황후에게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갔을 때, 다들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어쩐지 깍듯해 보이기도 했고 몇 명은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비록 그 웃음이 다소 어색해 보였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어떤 사람이 먼저 그녀에게 다가와서 친근하게 말을 걸기 시작했는데, 세 마디 만에 향을 언급했다. 남류청은 그녀의 마음을 뻔히 읽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상대방이 다소 어색해하는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미소를 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형님, 제가 만든 향을 좋아해 주시는 건 너무 감사해요. 저의 체면을 세워 주셨으니 형님께 조금 드리는 건 상관없어요. 다만, 어제 용비容妃 마마께서 저의 향을 거의 사가셔서 양이 많지 않습니다. 차라리 제가 새로 만들면 새것으로 가져가시는 게 어떠세요?”

말은 에둘러 했지만, 용비 마마께서도 돈을 내고 사셨는데 공짜로 가져가는 게 부끄럽지 않냐는 의미였다.

이렇게 남류청의 작은 장사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모든 사람을 동일시하고, 높은 지위에 있다고 우대하지 않았다. 가격도 공정하게 받았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인상이 좋아지게 되었다. 다들 그녀의 용모는 질투했지만, 그녀가 만든 향은 좋아했다.

심지어 황후도 그녀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황후는 비록 그녀의 향을 사지 않았지만, 다른 궁에는 모두 있는 얼음 대야가 그녀의 궁에도 놓였다. 몽달의 여름은 짧지만, 더워지기 시작하면 남원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여기는 가뭄이 심해서 바람까지 건조했고, 이런 건조한 바람은 피부의 수분도 다 빼앗아간다.

그녀는 이런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매우 힘들어했다. 그런데 지금은 처소에 얼음 대야가 생겼고, 얼음이 녹으면서 공기 중에 적당한 습기가 유지되기 때문에 실내가 훨씬 쾌적해졌다. 남류청도 야박한 사람은 아니었다. 향을 절대 공짜로 내놓지 않았던 그녀는 이례적으로 황후에게 향을 선물하며 감사를 표했다.

이렇게 남류청은 수중에 은전을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그녀가 총애를 받을 때, 황제가 그녀에게 좋은 물건을 많이 주었지만, 그 물건들은 놓고 보기만 할 뿐 사용할 수는 없었다.

누구도 황제가 하사한 물건을 몰래 가지고 나가서 팔 수 없었다. 그건 목이 잘릴 대죄이기에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은전이 손에 들어왔다. 무얼 하든 그녀에게는 돈이 꼭 필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금궁의 안전을 책임지는 통령이 진전秦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금군 통령이자 궁궐 내 모든 시위의 수령이었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곤청롱이 곁에 두고 믿는 사람이었다.

남류청은 등불 아래 앉아서 등잔불 심지를 태우고 있는 불꽃을 바라봤다. 그녀는 조용히 심지를 싹둑 잘라 내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 현재는 황제에게 충성스러운 통령이 앞으로도 그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황제를 정복하진 못했지만, 설마 칼을 든 시위 하나 사로잡지 못할까?

* * *

진전은 야간 순시를 할 때마다 정해진 노선 없이 움직였다. 그래야 문제를 더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엄격한 수령이었지만, 게으름을 피우는 문지기들은 항상 있었다. 졸거나, 제멋대로 자리를 이탈해 놀음판에 가거나, 심지어 시녀와 짝을 지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몰래 즐기기까지 했다. 잡히지 않는다면 운이 좋은 것이지만, 일단 발각되면 살갗이 찢어지기에 시종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즐거움을 찾는 사람은 늘 있었고, 가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진전은 시종들의 어려움을 알고 있기에 때로는 눈 감아 주기도 했다. 볼 때마다 전부 다 잡아들이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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