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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90)화 (990/1,192)

제990화

황후는 황제의 가마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기뻤다. 그녀는 얼른 마중을 나가 예를 갖췄다.

“폐하께서 오늘은 어쩐 일로 이렇게 오셨습니까??”

황제가 얼른 황후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짐이 요즘 너무 바빠서 경황이 없었소. 오늘은 잠깐 시간이 나서 황후를 보러 온 것이오.”

황후가 속으로 냉소를 삼켰다. 시녀와 뒤엉키느라 바빴던 것은 사실이었다. 황제가 앉기를 기다린 후 황후는 친히 차를 올렸다.

“폐하께서는 날마다 온갖 정사에 시달리니 몸을 잘 살피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강녕하신 것이 천하와 백성의 복입니다.”

황제는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황후는 항상 의도하는 바가 있지만,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기에 그가 화를 내기가 마땅치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대꾸하곤 차를 마셨다.

조정의 일은 황후가 자세히 물을 수 없었으니, 이것저것 한담을 몇 마디 나눌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대부분 거의 듣기만 했다. 오직 태자를 언급했을 때만 몇 마디 대화가 이어졌다. 몽달은 장자를 중히 여겼고, 황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황제는 적자를 태자에 봉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듯이 애지중지했다. 그가 물었다.

“유아는 어디 있소?”

황후는 웃으며 대답했다.

“유아를 보시려면 더 일찍 오셔야 합니다. 이렇게 늦었으니 당연히 자고 있지요.”

황제는 짧게 대꾸한 뒤로는 줄곧 입을 닫았다. 황후는 그가 찻잔을 든 채 넋을 놓고 있는 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는 또 그 여우 같은 여인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몸은 여기에 있으나, 마음은 벌써 저쪽으로 날아갔겠지. 그녀는 속으로 화를 삭이며 단정하게 웃었다.

“폐하, 어제 문서를 관리하는 당방檔房에서 기록을 보내 왔습니다. 그동안 남 아우님의 노고가 많았는데 폐하께서는 그녀의 지위를 올려 주지 않으셨죠. 그래서 오늘은 신첩이 남 아우님을 위해 바른말을 좀 하려고 합니다.

남 아우님은 어쨌든 귀한 공주 출신이 아닙니까? 계속 어전에서 시녀 노릇을 하는 건 너무 과한 처사인 것 같습니다. 신첩의 좁은 소견으로는 그녀에게 좀 더 높은 지위를 주고 궁전도 내어 주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황제는 찻잔을 쓰다듬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서 황후가 또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명군이시니, 신첩이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겠지만… 지금처럼 계속 지내시면 조만간 문무백관과 천하의 백성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황실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후궁과 전정은 그리 먼 거리도 아닙니다. 폐하께서 언제든지 오고 가실 수 있는 거리입니다. 격식대로 처리해야 나중에 구설에 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후, 황후는 덧붙였다.

“폐하, 아름다운 꽃일수록 잘 가꿔 주어야 합니다. 듣자 하니, 얼마 전에 한바탕 병을 앓아 많이 아팠다지요? 만약 돌봐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장차 대를 이을지도 모를 몸인데 말입니다.”

황제는 마침내 그녀를 올려다봤다. 황제의 눈빛은 차분했지만, 황후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황제가 이미 그녀의 작은 속셈을 꿰뚫어 본 건 아닐까? 황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무 표정 없이 물었다.

“황후의 말도 일리가 있소. 짐이 잘못 생각한 것 같소. 하면 황후는 짐이 그녀에게 어떤 지위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크게 기뻐한 황후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남 아우님은 원래 공주였으니 너무 낮은 신분은 맞지 않습니다. 귀인으로 봉하는 게 어떠신지요?”

작은 나라에서 온 장난감일 뿐인데, 사실 보림寶林이나 숙인淑人도 그녀에게는 과분한 지위였다. 귀인으로 봉하는 건 체면을 세워 주는 편이었다. 황제는 별 이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가 말한 대로 합시다.”

* * *

이틀도 지나지 않아서 황제는 남류청을 귀인으로 봉하고 서양전을 하사한다는 성지를 내렸다. 이 성지에 몇몇은 즐거워하고 또 몇몇은 근심에 잠겼다. 기뻐하는 사람은 궁비들이었다.

그녀들은 후궁에서 종일 빈둥빈둥 놀기만 하고, 별것 아닌 일로 각을 세우며 은총을 겨루었다. 폐하의 은총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 후궁으로 온다고 하니 마음껏 괴롭힐 수 있다는 생각에 다들 흥을 감추지 못했다.

근심에 잠긴 사람은 남류청이었다. 그녀는 궁정에서 자랐기에 후궁의 음흉함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분명 황제가 그녀에게 반한 건 사실인데 왜 후궁에 던져 넣냐는 거였다. 설마 모른단 말인가? 그녀가 후궁에 들어가는 건 양이 늑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사랑할 때는 그녀를 애지중지하던 그가 이제 와 곤경에 빠뜨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는 그를 찾아가서 따지려고 했지만, 가는 도중에 노여움을 반쯤 가라앉고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곤청롱에게 도착했을 때, 그녀는 평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녀는 책상에 찻잔을 내려놓고 한쪽에 말없이 서 있었다. 황제가 고개를 들고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감사 인사를 하러 온 것이냐?”

남류청은 말없이 무릎을 꿇었다.

“소인, 황은에 감사드립니다.”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감사 인사를 하는데 왜 웃음기가 하나도 없느냐? 짐이 준 지위가 낮아서 마음에 안 드는 것이냐?”

“아닙니다.”

남류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인은 폐하를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게 어찌 짐을 떠나는 것이냐?”

황제가 말했다.

“짐의 궁비가 되면 짐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 맞단다. 너는 짐의 여자다. 지위도 없이 전정에 두었다가는 뭇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다. 짐이 너에게 하사한 서양전은 전정에서 매우 가깝단다. 짐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이리 오거라.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짐이 명분을 찾아 너의 자리를 더욱더 높여 주마.”

너무 부드럽고 자상한 말투에 남류청은 그의 얼굴에서 약간의 결점이라도 찾으려 했지만 그의 표정은 온유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녀를 끌어당겨 품속에 앉혔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목에 낙인을 찍었고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다. 역시 곤청롱은 그녀에게 푹 빠진 것이다. 남류청은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정색을 했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 사람을 보내 신첩을 데려오라 명하셨으니 신첩은 이만 물러갑니다.”

품속을 다 비우면 마음도 따라서 비워진다. 곤청롱은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태연하게 대꾸했다.

“가거라. 짐이 시간이 나면 곧 너를 보러 갈 것이다.”

남류청은 인사를 하더니 몸을 돌려 물러났다.

황후는 황제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에 만족했지만, 황제가 서양전을 하사한 것은 불만이었다. 서양전은 비록 작지만, 전정과 아주 가까워 몇 걸음만 걸으면 황제에게 도착했다. 황후가 있는 봉양궁과는 거리가 꽤 떨어져 있어 두 사람이 은밀히 오간다면 그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궁리를 하던 중 시녀가 들어와 고했다.

“마마, 남 귀인이 오셨습니다.”

황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기다리라고 하거라.”

시녀는 응수하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남류청은 마침 복도 아래에 서서 장미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모습은 가위로 자른 것처럼 아름다워서 시녀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 시녀는 가만히 생각했다.

‘황후 마마의 말씀이 맞는구나. 역시 여우 같은 여인이야. 다른 마마들은 모두 이곳에 서면 단정하고 진지한데 유독 그녀는 여유로움이 느껴져.’

시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쌀쌀한 말투로 말했다.

“황후 마마께서는 지금 쉬고 계시니 우선 좀 기다리십시오.”

남류청은 꼼짝 않고 서서 고개만 끄덕였다. 마치 그녀와는 말을 많이 섞을 필요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시녀는 이렇게 제멋대로인 소주小主는 처음이었다. 설사 비에 봉해진 궁비도 황후를 모시는 아랫사람들에게는 예를 갖췄다. 겨우 귀인에 봉해진 후궁이 이렇게 거드름을 피우다니. 그녀는 남류청의 뒷모습을 째려보더니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남류청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이렇게 저속한 농간을 부리다니, 황후도 별다를 게 없구나. 그녀는 그곳에 발이 저릴 때까지 서 있었다. 수많은 개미들이 다리를 갉아먹는 것처럼 아프고 가려웠다.

그녀가 통치마를 들고 몇 번이나 발을 세게 구르면 당연히 더 고통스러웠지만, 긴 통증이 짧은 통증보다 더 괴롭다는 이치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궁전 안에서는 시녀가 황후에게 아뢰고 있었다.

“마마, 남 귀인이 너무 오래 서 있어서 발이 몹시 저린가 봅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은월이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고작 다리가 저린 것도 못 견딘단 말이냐? 우리 마마께서는 아직 아무것도 안 하셨는데?”

황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하늘에 가득하니 머지않아 황혼이 질 것이다. 황후는 꽃을 조각한 큰 의자에 천천히 앉아서 손가락에 씌운 호갑투를 쓰다듬었다.

“가서 들어오라 하거라.”

남류청이 들어와 무릎을 꿇고 예를 행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신첩, 황후 마마께 문안 인사를 드리옵니다.”

황후는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남 귀인, 폐하께서 남 귀인을 후궁에 들이신 이상, 궁중 규율을 잘 지켜야 하네. 서양전에 머물며 자매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폐하의 부름을 기다리는 게 후궁의 본분이지. 폐하는 귀한 천자이시니, 자손이 제일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겠지?

폐하께서 좋아하신다고 총애를 독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마시게. 남자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 설령 폐하께서 남 귀인에게 마음을 다 기울이시더라도, 비가 고루 스며들 수 있게 권하셔야 한다네. 남 귀인, 본궁의 말을 이해하겠나?”

남류청은 고개를 숙였다.

“황후 마마의 가르침, 신첩이 마음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깊이 새기겠다니 그럼 되었네. 그만 물러가시게.”

여우 같은 얼굴을 황후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알려 줄 건 다 당부했으니 앞으로 그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볼 일만 남았다. 남류청은 일어나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마마, 전에 신첩의 시중을 들었던 두 시녀를 신첩의 처소로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황후는 싸늘하게 말했다.

“서양전에는 시중들 아랫사람들이 모두 안배되었으니 바꿀 필요 없네. 일단 그대로 지내다 정말 안 되겠거든 그때 다시 얘기하게.”

그녀의 말을 들은 남류청은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돌아섰다.

서양전에 도착한 그녀는 입구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황제에게로 향했다. 전정 입구를 지키던 시종이 그녀를 봤지만 감히 막지 못했다. 그녀는 거침없이 황제의 서재로 들어가서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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