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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89)화 (989/1,192)

제989화

잠시 후, 곤청롱은 침대에서 내려가 그녀에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남류청은 그가 주는 물을 몇 모금을 받아 마시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폐하, 황후 마마의 궁에 가고 싶지 않으신 거라면 후궁에 다른 마마들도 아주 많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좋아하시는 분이 하나도 없으십니까?”

곤청롱은 다시 누워서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대답했다.

“방금 보여 준 짐의 마음이 부족한 게냐? 왜 아직도 샘을 내느냐? 짐은 너 하나만 좋아한다. 그녀들을 뭐 하러 언급하느냐? 괜한 생각으로 우울해하지 말거라.”

황제의 손이 그녀를 다시 쓰다듬었다.

“다시 한번 입증해야 하느냐?”

놀란 남류청은 침대 안으로 몸을 움츠렸다.

“아뇨!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다시 한번 하다간 그녀는 틀림없이 죽고 말 것이다. 곤청롱은 입가를 끌어올리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허약해서 어쩔 것이냐? 애당초 짐을 유혹할 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야지.”

곤청롱이 정력이 이리 대단한 줄 알았더라면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정말 후회가 막급했다.

곤청롱은 완전히 미색에 빠진 혼군의 꼴이었다. 남류청에 대한 마음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어전에서 일하는 노비들은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들의 입이 무거워도 후궁에 이 사실이 전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황후는 너무 화가 나서 옥으로 된 조각상을 부숴 버렸다. 깨진 옥 조각이 사방으로 튀어서 비가 오는 날에 일어나는 물보라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남류청이 처음 승은을 입었을 때, 황제가 후궁의 지위를 내리지 않은 것을 두고 황후는 황제가 그녀의 체면을 세워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황제는 그때부터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교묘한 술수를 쓴 것이었다. 남류청을 후궁으로 책봉하지 않은 건 후궁에 두지 않고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면 밤낮으로 그 천한 것이 황제에게 달라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랫사람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하니! 멀쩡한 사내를 그 계집이 다 망쳐 놓았다.

그녀가 가장 서운했던 건, 보름인데도 황제가 그녀의 궁을 찾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여우 같은 것 때문에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규율조차 우스갯소리가 되었다.

후궁에 있는 다른 비빈들도 전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듣고 저마다 이를 갈았다. 황제가 어떤 태도를 보였든 간에 무조건 남류청의 잘못이었다. 순식간에 남류청은 후궁 마마들의 적수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후궁에서 지내는 비빈이 아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뭇사람이 뱉은 침에 익사했을 것이다.

황후는 비빈들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남류청을 욕하는 걸 듣고도 말리지 않았다. 그들이 남류청을 심하게 욕하면 할수록 황후도 속이 후련했다. 원래 욕을 먹어야 하는 건 그녀만이 아니었지만, 모두에게 공분을 사는 것은 당연히 나쁜 여자 쪽이었다. 남류청은 욕먹어도 싸고 때려죽여도 마땅했다. 화 귀인은 황후를 바라보더니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마마, 이번 일은 너무 황당합니다. 소문이 나면 분명 폐하의 명예가 실추될 것이니 마마께서 방법을 강구하셔야 합니다.”

황후는 속으로 화를 삭이며 물었다.

“본궁에게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폐하께서 애지중지하시니 누가 감히 손을 댈 수 있겠는가.”

화 귀인이 말했다.

“남류청이 이왕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마마께서 폐하께 청하여 후궁에 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황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본궁에게 그 천한 것을 대신하여 지위를 부탁하란 말인가?”

화비가 대뜸 끼어들었다.

“꿈도 꾸지 말라고 하세요. 그 여우 같은 년이 감히 후궁에 들어오면 신첩이 절대 용서치 않을 겁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 귀인은 가만히 눈을 들어 황후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황후도 화 귀인이 말하는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화 귀인께서 매우 흥미로운 제안을 해 주셨군. 본궁이 폐하께 간청해 보겠네.”

황제가 남류청에게 어떤 지위를 주든지, 일단 후궁에 들어오기만 하면 일이 오히려 쉬워진다. 후궁은 바로 그녀의 영역이었다. 날카로운 칼은 감히 꺼내지 못하지만, 은근히 사람을 괴롭히는 무른 칼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한다고 해도, 결국 황제는 국정을 중시하기 때문에 늘 남류청 곁에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황후였다. 황제의 걱정을 나누는 건 당연했다. 그를 대신해서 그의 애비愛妃를 돌봐 줄 사람은 자신이었다.

황후는 생각을 정리하고, 궁비들을 해산시켰다. 그런 후에 시녀만 데리고 곧바로 전정으로 향했다.

황후는 거의 황제의 궁을 찾은 적이 없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후궁은 정사에 간섭할 수 없기에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

둘째, 황제는 불청객을 싫어했다. 그가 후궁을 부르는 건 대개 밤에 있었기에 낮에 우뚝 솟은 궁전을 보는 건 황후마저도 적응이 안 되었다. 그런데 황제가 낮에도 남류청과 더불어 어울렸다는 소문을 떠올리면 속에서 천불이 치솟았다.

행랑 아래 서 있던 대총관 사적이 황후를 보고 즉시 예를 갖추었다.

“마마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황후가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폐하께서는요?”

“폐하께서는 지금 서방에서 대인들과 정사를 논하고 계십니다. 방해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으니 마마께서는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소인이 먼저 가서 아뢰겠습니다.”

황후는 콧방귀에서 뀌었다. 때를 잘 맞춰 온 셈이었다. 그녀가 이곳을 찾은 횟수가 적을 뿐, 아예 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사적은 감히 그녀를 가로막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로써 황제가 무얼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과연 사적이 나와서 죄송하다는 듯 공손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대인들과 긴요한 이야기를 하시는 중이셔서 잠시 짬을 내기 어려울 듯합니다. 먼저 처소에 돌아가 계시면 폐하께서 논의를 마치는 대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높이 든 황후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네.”

황후가 퇴짜를 맞고 돌아갈 때, 곤청롱은 남류청을 붙들고 애원하고 있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무엇이든 말하거라. 짐이 이루어 주마.”

남류청은 그의 다리에 앉아서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은 채 웃음을 보였다.

“정말요? 제가 뭘 원하든 폐하께서 다 주실 수 있겠어요?”

“물론이지. 너는 짐이 애지중지하는 보배니라. 뭐든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마.”

곤청롱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재촉하듯 바라봤다.

“말해 보거라. 뭘 원하느냐?”

남류청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지난번에 이미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나는 남현속의 죽음을 원해요.”

곤청롱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정말 그의 죽음을 원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지. 단지 몽달과 남원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갈 길이 너무 멀고, 남원의 민왕인 남현속은 권력이 만만치 않아서 죽이기가 쉽지 않구나. 길게 잡고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적게는 삼사 년, 길게 잡으면 팔 년에서 십 년 뒤에… 짐이 반드시 그의 머리를 네 앞에 대령하마.”

그는 남류청의 표정을 세심하게 살폈다. 예상대로, 그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눈썹을 축 늘어뜨리더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시무룩한 표정을 보였다. 이놈의 계집, 감히 그 앞에서 잔꾀를 부리다니. 그가 다시 물었다.

“기다릴 수 있겠느냐?”

“…….”

“그럼, 다른 걸 생각해 보거라.”

남류청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건 원하는 게 없어요.”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곤청롱이 그녀와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완전히 빠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단지 방식을 바꿔서 그녀를 놀리고 있을 뿐이었다. 남류청이 물러가자 곤청롱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사적이 천천히 다가왔다.

“폐하.”

“무슨 일이냐?”

“황후 마마께서 방금 다녀가셨는데 안색이 좋지 않았사옵니다. 폐하께서 보름에도 안 가셨고, 초하루에도 안 가셨으니… 마마께서 마음이 많이 상하셨을 겁니다.”

곤청롱은 황후에게 그리 큰 감정이 없지만, 황후의 친정은 몽달의 이름난 세도가라서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또한 태자를 낳은 생모이기에 평소에도 그녀의 체면은 세워 주려고 노력했다. 그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그렇게 오래되었느냐?”

“그렇습니다.”

곤청롱은 잠시 침음했다.

“짐이 저녁 늦게 황후를 보러 가겠다고 전하거라.”

요즈음 그가 미색에 홀린 혼군 역할에 너무 심취해 있었다. 남류청이 어전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한 달여가 넘었다니? 실은 그런 척 가장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사실 정말로 남류청에게 홀딱 반했다.

남류청이 나무 상자에서 처음 일어서는 순간, 그는 그 선녀같이 온화한 얼굴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이건 정상적인 남자가 절색의 미인을 봤을 때 보이는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전혀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

그의 관념에서는 예쁜 여자는 당연히 연약해야 했고, 앙증맞고 귀여워서 남자들의 보호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남류청은 좀 특별했다. 야심을 품고 있는 그녀는 자기 분수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현속이 이렇게 멀리 있는 그에게 그녀를 보내지 않았겠지.

야심을 가진 그녀는 금사작金絲雀(카나리아)처럼 가만히 그의 곁에만 머무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화려한 공작새였다. 반드시 남쪽으로 날아가서 그녀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그녀가 이곳에서 어떻게 몸을 뺄 것인가가 궁금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그녀를 냉대했다. 그날 밤에 그녀를 취했음에도 계속 그녀를 멀리했다. 역시 그녀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황후를 도발했고, 찻잔을 부쉈다. 게다가 분명 난생처음 하는 교접도 혼신의 힘을 다했다. 모두 그를 정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공주였지만, 야생 고양이처럼 발톱이 날카롭고 성격이 사나우며 겁이 없었다. 그는 점점 더 그녀에게 흥미가 생겼다. 아예 그녀를 곁에 두고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그녀는 꽤 인내심이 있었다. 매번 그를 유혹했고 또 매번 실패를 맛봤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을 거듭할수록 용맹스러워졌다. 그녀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바라볼 때마다 그는 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그녀가 한밤중에 우물물을 끼얹어 감기에 걸리자 그는 전략을 바꿨다.

그녀의 바람대로 그는 미색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혼군이 된 것이다. 성공적으로 그녀에게 정복되면, 그는 그녀가 제 진짜 속내를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렇지 않았다. 하긴, 그렇게 일찍 숨겨 둔 속내를 내보이면 재미없지 않겠는가. 이 야생 고양이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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