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8화
끈기가 대단한 남류청은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생기면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공주로서의 자존심을 땅바닥에 팽개쳤다. 한 번, 또 한 번 곤청롱을 떠봤고 그가 자신을 꿰뚫어 보는 시선을 보내더라도 난감해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찻잔을 건네며 그녀의 손을 만지게 하는 것은 매일 하는 필수 과제였다. 매번 그녀의 손을 만질 때마다 곤청롱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래도 그냥 웃기만 할 뿐 전혀 걸려들지 않았다.
가끔 남류청은 자신이 곤청롱의 애완견 같다고 느꼈다. 그녀가 꼬리를 흔들면 그는 그녀가 무엇을 할지 이미 알았지만, 그녀의 수법을 피하지 않고 같이 놀아 주었다. 하지만 절대 그녀의 뜻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낙담하고 좌절했다. 매일 머리를 싸매고 그를 유혹할 방법을 짜냈다. 결국 어느 늦은 밤, 그녀는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뜰에 있는 우물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물 한 통을 길어서 머리 위에 쏟아부었다.
한여름이지만 한밤중은 날씨가 선선했다. 차가운 물을 끼얹자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추웠다. 물통을 내려놓은 그녀는 흠뻑 젖은 옷을 입은 채 나무 밑에 앉아 다리를 감싸 앉았다. 허공에 뜬 달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오랫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 청풍이 아무리 불어도 고향의 달이 더 밝았다.
남원은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남원암은 지금쯤이면 타곤성으로 돌아왔을까? 자신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을까? 수많은 산과 바다를 건너서 이곳 낯선 나라를 찾아올 수 있을까?
아니다. 남현속은 그에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인 남길아를 그에게 시집보낼 것이다. 공주 한 명이 없어지면 다른 공주로 바꿔 두면 그만이니까. 남원암은 결국 남원의 부마가 될 것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 그녀가 빠졌을 뿐.
밤바람이 불어오자 그녀는 으스스 떨리는 몸을 힘껏 껴안았다. 이 세상에서 그녀가 의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를 구할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그녀는 반드시 돌아가서 남현속에게 복수를 하고 자신의 것을 되찾아야 한다.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자 그녀는 다시 한번 물을 제 몸에 끼얹었다. 한기가 뼈를 찌르는 듯했지만, 너무 추워서 오히려 정신은 더욱더 맑아졌다.
몸이 거의 마를 때마다 그녀는 다시 가서 차가운 우물물을 맞았다. 한밤부터 새벽까지 젖은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 어둠이 점점 흩어지고 약속이나 한 듯이 밝은 태양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은 틈을 타 그녀는 방 안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누워서 정오까지 잠을 청했다.
깨어났을 때, 그녀는 머리가 심하게 아프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어젯밤에 한 고생이 드디어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는 억지로 버티고 서서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했다. 얼굴에 분을 칠할 때, 일부러 붉게 달아오른 홍조를 덮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곤청롱의 눈에 벽 쪽에 서 있는 남류청이 보였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팔을 뻗어 시녀의 시중을 받으면서 힘주어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남류청이 정신을 차리고 찻잔을 준비하러 갔다.
곤청롱은 옷을 갈아입고 나서도 방 한가운데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차를 들고 천천히 다가오는 남류청을 살펴봤다. 평소와 달리 눈빛이 번쩍이지 않았다. 하지만 찻잔은 쟁반 위에 반듯하게 올려져 있었다. 옷차림도 단정한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정상적인 것 같았지만, 곤청롱의 눈엔 뭔가 이상하게 보였다.
그녀가 눈을 아래로 떨구고 눈빛을 숨긴 것을 보고, 그는 그녀가 또 요상한 짓을 하리라는 것을 깨닫고 경계심을 한껏 높였다.
과연, 그가 막 찻잔을 들어 올리자 남류청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곧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곤청롱은 기민하게 비켜섰고, 그녀가 바닥에 털썩 쓰러지는 걸 보고 있었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인데.
이 광경을 보고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곤청롱도 깜짝 놀랐다. 남류청이 그를 껴안았다면 별로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아무리 수작을 부린 걸 알아도 내동댕이치는 건 심하지 않나? 그가 들어도 너무 아플 정도로 바닥에 세게 부딪쳤다.
남류청도 생각지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곤청롱이 저렇게 빨리 피할 줄이야. 아무리 여자를 귀하게 여길 줄 모른다지만 여자가 넘어지는 걸 보면 모든 남자가 본능적으로 여인을 잡아 주는데, 그의 행동은 정말이지…….
그녀는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이 통 말을 듣지 않았다. 방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분위기가 좀 기이했다. 곤청롱이 먼저 침묵을 깨며 그녀에게 비아냥거렸다.
“땅바닥이 그리 편한 것이냐? 일어나지도 않게?”
남류청은 눈을 꼭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곤청롱은 손사래를 쳐서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을 다 내보냈다. 말투에 비웃는 기색이 더 짙어졌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또 무슨 수작이냐?”
남류청은 여전히 잠잠했다. 그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웅크리고 앉아서 그녀를 툭 쳤다.
“땅바닥에 누워 있는 게 어디 보기 좋은 짓이더냐?”
손으로 툭 칠 때 느껴지는 느낌이 뭔가 이상했다. 그녀의 몸이 뜨거운 게 느껴졌다. 얼른 그녀의 이마를 만져보니, 역시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그녀를 안아 든 그는 사람을 불렀다.
“얼른 태의를 불러오거라.”
태의가 자세한 문진을 하고 황제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류청 아가씨께서는 감기에 걸려서 열이 나는 겁니다. 그리고 몸이 좀 허약하니, 소신이 약을 몇 첩 지어 드리겠습니다. 며칠 정양하면 무탈할 것입니다.”
황제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어떻게 감기에 걸렸다는 것인가?”
태의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아마도 밤에 이불을 안 덮고 자서 감기에 걸렸나 봅니다.”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침대 옆에 앉아서 깊게 잠든 남류청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남류청은 비록 귀한 공주로 태어났지만, 연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약간의 추위는 그녀를 병들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단지 곤청롱의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요 며칠 동안 병상에 누워 기대를 품었지만 그녀는 매일 실망을 거듭했다. 그리곤 그녀는 끝내 제 패배를 인정하게 됐다.
곤청롱은 남원의 공주인 그녀에게 마음이 흔들린 적 없다. 그는 눈깔이 삔 장님이고, 미녀를 아끼는 마음이 조금도 없는 형편없는 남자였다.
며칠 동안 누워 있었더니 몸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녀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찻물을 담당하는 시녀 임무를 이어 나갔다.
그러던 남류청은 황제에게 차를 올리러 들어갔다. 찻잔을 건넬 때, 그녀는 순간 평소 버릇처럼 곤청롱의 손이 그녀의 손등을 건드릴 수 있게 했다. 한데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등을 덮쳤고 한참 동안 그녀의 손등 위에 머물렀다.
남류청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황제는 잔잔한 미소만 지으며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남류청은 어리둥절했다.
“네?”
그는 다정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아직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냐?”
남류청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뭘 모르는 척했다는 거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다음 순간, 곤청롱은 그녀를 탁자 위로 안아 올려놓곤 넓은 소매를 휘둘러 책상 위의 모든 물건들을 바닥으로 쓸어 버렸다. 방금 탄 뜨거운 차를 비롯해 김이 나는 찻물이 바닥에 뿌려졌다. 백자 찻잔도 당연히 산산조각이 났다.
커다란 소리에 입구를 지키던 사적이 즉시 고개를 내밀고 상황을 살폈다. 황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확인한 그는 깜짝 놀라 서둘러 바깥에 있던 아랫사람들을 모두 쫓아냈다. 세상사를 많이 겪은 자신도 낯짝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아직 훤한 대낮인데 황제에게 이런 흥취가 있을 거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포기하려던 찰나에 곤청롱이 서재에서 승은을 내릴 줄은 남류청 또한 몰랐다.
그녀는 곤청롱이 지난번처럼 하룻밤 즐기고 나면 또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 몰라라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번에는 황제가 제대로 맛을 보더니 그녀에게 푹 빠진 듯 매시간 그녀를 찾았다. 그다음 날부터 그는 틈만 나면 그녀를 치근거렸다.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때론 아랫사람이 있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녀도 자신이 드디어 이 남자를 정복했다고 생각하며 득의양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을 호소하며 줄곧 앓는 소리를 했다. 황제는 자제력을 날려 버린 것처럼 밤일에 매진했다. 매번 그녀는 살아서 침대를 내려갈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할 정도였다. 그녀는 일부러 그를 일깨웠다.
“폐하, 오늘은 보름인데… 황후 마마께 안 가십니까?”
그는 웃으며 그녀의 턱을 건드렸다.
“왜? 질투하느냐?”
남류청은 곧 부러질 것 같은 허리를 누르면서 진지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소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황궁의 규율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천하의 모범이시니 더욱더 지켜야 합니다.”
곤청롱은 그녀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하더니 잠시 후 소리 내어 웃으며 그녀의 코를 건드렸다.
“짐이 너를 믿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
남류청이 한 말은 모두가 진실인데… 왜 그는 한마디도 믿지 않는 걸까?
“안심하거라.”
곤청롱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짐이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잘 지켜 줄 것이다.”
“소인은 황후 마마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인은 다만…….”
곤청롱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으며 쉿 하고 소리를 냈다.
“둘이 있을 때는 황제도 시녀도 아니다. 오직 너와 나만 있단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빛은 빠질 듯 촉촉했다. 자기도 모르게 푹 빠질 것만 같았다.
남류청은 심장에 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멍하니 그의 얼굴이 점점 다가오는 걸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스치고 지나가 그녀의 목덜미에 불꽃처럼 뜨겁게 입맞춤을 했고, 그녀는 전율에 휩싸였다.
그녀는 그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흥취가 일어서 불타오르고 있는 남자의 눈에는 좋으면서 싫은 척 내숭을 떠는 것처럼 보여서 오히려 더욱더 흥취를 북돋아 주었다.
남류청은 너무 힘들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침대에 엎드려 있는 그녀는 천근같이 무거운 돌방아에 눌린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허리가 뻐근하고 아팠다.
하지만 그 무거운 돌방아는 오히려 개운해 보였다. 한바탕 풍성한 만찬을 즐긴 듯 말할 수 없는 만족감과 흡족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