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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87)화 (987/1,192)

제987화

황제의 뜻을 전해 들은 황후의 궁전은 또다시 떠들썩해졌다.

“그 남원 여자는 정말 재수가 없네요. 춤을 추다가 하필이면 폐하의 술잔을 깨뜨리다니요. 폐하께서 장형에 처하지 않으신 건 크게 선심을 쓰신 거예요.”

“듣자 하니, 춤을 출 때 발목에 방울을 달았다고 합니다. 춤을 출 때마다 방울이 울려서 대신들이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해요.”

“발목을 훤하게 남자들에게 보이다니… 정말 창피한 줄도 모르는군요.”

“그렇게 거드름을 피우려다 실수한 게죠. 이제 시녀로 강등됐대요.”

황후는 긴 새끼손가락을 쓰다듬으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화비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살피며 물었다.

“무희가 시녀로 강등된 걸 보니, 그 남원 여자가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아닌가 봅니다. 다만, 그 여우 같은 얼굴로 어전에 가면 어떤 계략을 꾸밀지 알 수 없군요.”

황후가 걱정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시녀로 강등된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근데 하필이면 어전에서 시중을 들게 하다니? 그게 정말 처벌일까? 만약 폐하께서 정말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제 곁에 두셨을까?

하지만 만약 마음에 드셨다면 어젠 왜 침전에 들이지 않으셨을까. 황후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황제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화비는 황후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황후 마마.”

황후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가?”

화비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신첩은 남원 여자를 어전에 보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생각됩니다. 아마 폐하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쉽게 말씀하신 것 같은데, 궁중에서 사람을 안배하는 건 원래 황후 마마께서 주관하시니 차라리…….”

황후가 차갑게 되물었다.

“차라리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화비는 더 이상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가 말을 꺼낸 저의가 너무 빤히 들여다보였다. 감히 황후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황후가 미련한 사람도 아니고, 어찌 그녀의 속셈을 모르겠는가? 화비가 성급하게 나서서 방자하게 구는 바람에 황후는 기분이 상했다.

“이건 폐하의 뜻이네. 본궁이 어찌 끼어들 수 있겠는가? 어전은 고사하고 폐하의 침상에 올라간다 해도 본궁은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네. 화비께서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폐하께 직접 가서 말씀하시게. 어쩌면 폐하께서 체면을 살려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화비는 황후의 거센 비난에 얼굴이 온통 새빨개졌다.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두고 봅시다. 남원 여자가 출세 가도를 달리면 그때에도 이런 말을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 * *

남류청은 어전에서 찻물을 담당하는 시녀가 되었다. 당연히 매일 황제에게 차를 바쳤고 어떨 때는 차가 아니라 술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매일 어용 찻잔과 술잔을 닦고 관리했다. 모두 상등품에 도자기 잔이나 옥으로 만든 잔 그리고 금은동 금속으로 만든 잔, 뼈를 깎아 만든 잔, 자단목으로 만든 잔 등등 다양했다. 세척부터 보관까지 모두 그녀의 책임이었고, 하나라도 모자라면 처벌을 면할 수 없었다.

남류청은 이런 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첫날은 잔을 씻다가 옥잔 하나가 부딪혀 이가 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신분이 좀 특별했기에 관리는 자신이 처벌하지 않고 바로 황제에게 데려갔다. 황제가 그 옥잔을 손에 쥐고 그녀를 흘겼다.

“이번에도 또 고의로 이런 것이냐?”

“아니에요.”

남류청은 대답했다.

“본의 아니게 실수한 겁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로 귀하게 자라서 이런 일을 한 적이 없었겠지. 네 탓을 할 수도 없구나. 그러면 짐이 너를 어떻게 처벌하면 좋겠느냐? 이미 시녀로 강등했는데… 그렇다고 곤장을 칠 수 없고.”

남류청이 대답했다.

“소인에게 이가 나간 찻잔으로 물을 마시는 벌을 내려 주세요. 마시다가 입술을 다친다면 소인이 자초한 일이 될 것입니다.”

황제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왕 그렇게 된 일, 네 말대로 하거라.”

그는 자신의 찻잔에 있던 차를 깨진 잔에 부었다.

“자, 마셔라.”

남류청은 이가 나간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물이 든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찻잔이 입술을 살짝 베였다.

“폐하, 소인 벌을 다 받았습니다.”

황제는 시선을 올렸다. 그녀의 요염한 입술 위에 자그마한 붉은 구슬이 위태롭게 달려 있었다. 연분홍 입술에 매달린 붉은 핏방울, 새하얗게 빛나는 피부, 세 가지 색상이 어우러져 눈을 뗄 수 없었다. 특히 애처롭게 매달린 핏방울이 가슴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침착하게 대답했다.

“처벌을 다 받았으면 물러가거라.”

남류청은 어안이 벙벙했다. 속에서 알 수 없는 화가 또 치밀어 올랐지만, 감히 그 작은 옥잔을 황제의 얼굴에 집어던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예를 취하고 물러났다.

황제는 고개를 숙이고 상주서를 살펴보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정말 분수를 모르는 여인 같으니.

남원의 소식이 완전히 차단되어서 그도 남원의 조정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남현속이 그에게 보낸 서신에서 조금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서신에서는 남류청이 여제가 되고 싶은 야심을 품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는 그걸 우스갯소리로만 생각했지만, 점점 그녀를 겪어 볼수록 남현속이 과장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류청은 확실히 야심이 있고 분수에 넘치는 것을 탐하는 여인이었다.

야심을 가진 여자를 곁에 두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지만, 그는 과연 그녀가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했다. 야심이 있는 여자는 어디에서도 안주하지 않는다. 현재로서 그녀의 야심은 그를 유혹해서 정복하려는 것이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여자를 정복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여자가 남자를 정복하는 건 절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쉽지 않은 일을 남류청은 계속 해냈다. 황후를 화나게 해서 얻어맞음으로써 그의 연민을 얻었다.

그리고 처녀의 몸을 그에게 바쳤다. 또한, 춤을 추다가 그의 잔을 깨뜨렸다. 그리고 방금… 입술에 상처를 내는 것. 그건 너무 티 나는 유혹이었다. 그런데 하마터면 마음이 동할 뻔했다.

* * *

남류청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그 옥잔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곤청롱 이 나쁜 놈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을까?

근본이 공주인 그녀가 남자를 유혹하겠다고 발가벗고 달려들 순 없지 않은가. 이 정도까지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른 남자는 눈빛 하나만 보내도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어린 시종이 문 앞에서 그녀를 불렀다.

“류청 아가씨, 폐하께서 차를 달라고 하십니다. 사 총관이 어서 오라고 하십니다.”

남류청은 옷을 단정히 여미고 따라서 갔다. 차를 담당하는 시녀는 두 무리로 나뉘는데, 그녀는 오늘 밤 근무라서 황제가 잠자리에 들어야 일을 끝내고 쉴 수 있었다.

일이 끝나기 전까지 멀지 않은 곳에서 항상 대기하며 언제든지 황제가 찾으면 차를 올려야 했다. 노비는 항상 마음에 황제를 품고 있어야 하는데, 그녀는 방금 너무 화가 나 무작정 뛰어온 것이었다.

황제는 우유차를 마시지만, 때때로 진한 차를 원했다. 바로 동월에서 가져온 찻잎이었다. 고소하고 쌉쌀한 맛이 나며 입안에 감미로운 단맛이 느껴졌다. 남류청은 후자를 더 좋아했다. 남원에서도 찻잎으로 차를 우리기 때문이다.

그녀는 뼈를 조각한 찻잔을 골랐다. 이런 찻잔은 쉽게 깨지지 않고 손에 쥐는 무게도 적당했다. 그녀가 남원에 있을 때도 뼈로 만든 찻잔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남원의 용사들이 큰 짐승들을 사냥해 그 뼈를 발라내고 다듬어서 그녀에게 바친 것들이었다.

그녀는 남원 제일 미인이었고, 용사들의 마음속 여신이었다. 그 용사들이 지금 그녀의 처지를 알게 된다면 다들 눈이 뒤집힐 것이다. 그녀는 그와 맞서려고 일부러 우유차를 한 잔을 들고 들어갔다. 황제는 서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가 살금살금 다가가서 차를 올렸다.

“폐하, 차를 올립니다.”

황제는 짧게 대꾸하고 서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손끝에 만져진 건 찻잔이 아니라 여자의 부드러운 손가락이었다.

그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남류청이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쑥스러운 듯 손가락을 얼른 움츠렸다.

황제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잔재주엔 끝이 없었다. 방금 전에는 대담하게 입술에 상처를 내서 그를 유혹하더니, 이제는 손가락만 닿아도 얼굴을 붉히는 순정을 보여 준다?

이 여인은 얌전히 분수를 지킬 줄도 모르고 야심까지 대단했지만, 결국 십대의 계집일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물샐 틈 없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가 보기에는 그녀의 수작이 훤히 보여 재미있을 뿐이었다. 찻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신 그는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이 시간에 짐에게 우유차를 마시라고 준 것이냐?”

이것 또한 남류청이 일부러 벌인 짓이었다. 곤청롱이 그녀를 불편하게 했으니 자신도 그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아, 소인이 깜빡했습니다. 차를 다시 올리겠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녀가 말했다.

“폐하, 이 차는 소인에게 상으로 주십시오.”

“…….”

아주 낯짝이 두껍구나. 잘못을 했는데도 감히 그의 차를 얻어먹겠다니. 그가 안색을 굳히며 아무 말이 없자 남류청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황제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그래, 너에게 하사하마.”

남류청은 얼른 감사 인사를 하고 찻잔을 들고 물러났다. 곤청롱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천천히 찡그렸다. 분명히 그녀를 혼내려고 했는데, 왜 차를 하사했지?

남류청은 찻잔을 들고 나가서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땅에 쏟아 버렸다. 그녀는 천한 사람이 아니니, 그가 마시던 우유차를 마시진 않을 것이다. 황제가 뭐 대단하다고. 그녀도 장차 황제가 될 것이다!

그녀는 다시 차를 한 잔 우려서 들고 들어갔다. 황제는 아까보다 더 어두운 안색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가 폐하를 불러도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찻잔을 받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온전히 서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재미가 없어진 그녀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 가만히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슬그머니 물러나 문 쪽으로 가는데 황제가 물었다.

“그 차는 마셨느냐?”

남류청은 찔리는 마음에 얼른 대답했다.

“아, 네, 마셨습니다.”

황제는 또 말없이 서책에 집중했다. 남류청은 왠지 황제가 좀 이상해졌다고 생각했지만 크게 마음에 두지 않고 발을 들어 문턱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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