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6화
다들 이러쿵저러쿵 의견이 분분했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던 황후가 마침내 반응을 보였다.
“됐네. 다들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마시게. 폐하께서 그녀를 후궁으로 승격시키지 않은 건 분명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있기 때문일세. 여기서 멋대로 추측할 필요 없네. 이런 소란이 폐하께 전해지면 문제가 될 것이네.”
황제는 지난날 공개적으로 남류청을 안아서 데려가는 것으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는 황제가 유하혜처럼 온화한 현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남녀의 정사에 그다지 열정적이지 않지만, 정상적인 남자였다. 남자라면 여인의 아리따운 외모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무희에게 어떤 궁전을 내주어야 할지 궁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황제는 남류청에게 후궁의 지위를 내리지 않았다. 그 여인의 불행에 그녀는 다시 기쁨에 휩싸였다. 역시 부부의 정이 있기에 황제는 그녀의 체면을 세워 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녀는 남류청이 그렇게 싫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를 도와주는 말을 한두 마디 했다.
“한 나라의 공주였던 사람이 무희가 되어 타국 황제에게 보내졌네. 안쓰러운 사람이니 앞으로 괜한 일로 건드리지 마시게.”
비빈들은 알겠다고 응수하였다. 한바탕 웃고 떠드는 것으로 일단락된 것이다.
* * *
반면 남류청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그날 밤이 지나니 황제가 또 그녀를 뒷전에 내팽개치고 그녀를 잊은 듯 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어떤 남자도 그녀의 매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곤청롱이란 남자는 계속해서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마치 그녀가 정말로 하찮은 무희인 것처럼,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인내심은 한계점에 도달했다. 그녀의 마음에 불안이 가득 차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다 내줬는데 남자 하나 사로잡지 못했다. 이제 어떻게 남원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그녀의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옷이나 장신구 따위를 만드는 것도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칼을 곤청롱의 목에 겨누고 자신을 돌려보내라고 협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화려한 권법이 곤청롱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남원에 있을 때, 그의 명성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몽달의 수사자로 불렸다. 힘이 세고 무예도 뛰어나 홀로 늑대 무리를 횡단할 수 있다고 했다.
그녀의 뇌리에는 줄곧 그가 힘만 세다는 인상이 강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그녀는 약간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날 밤, 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은 다부진 근육을 느꼈다.
탱탱한 그 감촉은 곤청롱이 얼마나 건장한 몸을 가졌는지 말해 줬다. 그의 손바닥은 넓고 힘이 있었다. 거의 그녀의 허리를 부러뜨릴 것 같았다. 점점 가슴속에 뜨거운 열기가 달음질쳤고…….
그녀는 자기 안색이 서서히 붉어지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덕마가 찻잔을 그녀에게 건네주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곤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곤청롱에 대한 판단을 재정비해야 했다. 그는 신체가 건장했지만, 머리는 더 발달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날 무렵, 곤청롱은 마침내 사람을 보내 그녀를 데려오라는 명을 전했다. 한데 이번에는 궁전 안에 황제뿐만 아니라 몇 명의 신하들도 함께 있었다.
춤추기 전, 남류청은 한 쌍의 작은 은방울을 발목에 묶였다. 은방울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는 무언가 알아내고 싶은 욕망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춤을 추면서 관찰했다. 매우 애석하게도, 그녀가 가장 유혹하고 싶은 사람은 시종일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술을 마시며 신하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조당에서의 위엄을 살짝 내려놓은 황제는 마치 기생을 데리고 술을 마시는 귀공자처럼 약간 나른하고 방탕한 분위기를 드러냈다.
그녀는 순간 걱정이 되었다. 설마 이러다가 자신을 어느 신하에게 하사하는 건 아니겠지? 황제가 신하에게 여자를 내리는 건 예사로운 일이었다. 저택 뒤뜰에 황제가 하사하신 예기藝妓 한두 명 없는 신하가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자신이 우롱을 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지만, 미간이 구겨지는 건 막지 못했다. 황제의 낮은 탁자 앞에서 그녀는 채색 면사를 힘껏 휘둘렀다. 그 바람에 탁자 위에 있던 작은 술잔이 떨어지며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다들 그녀가 실수한 줄 알고 멍하니 쳐다봤다. 황제의 물건을 망가뜨리는 건 가벼운 죄가 아니었기에 모두 그녀를 안타까워했다. 오직 남류청만이 고의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곤청롱을 화나게 하고 싶었다.
황제는 여전히 무심한 기색이 역력했다. 화를 내기는커녕 웃음을 터뜨렸다. 몇몇 대신들은 더욱더 긴장했다. 그들은 황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화를 내지 않고 웃어 보이는 건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는 뜻이었다.
저 무희는 어쩌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혹시나 하고 탐심을 품었던 신하들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아름다운 용모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봤다.
황제의 손사래에 몇 명의 대신들은 사면이라도 받은 듯 얼른 물러났다. 떠나기 전 어떤 신하는 남몰래 남류청을 보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대총관 사적은 황제를 위해 문을 닫았다. 그곳에 있던 사람 중에 오직 그만이 황제의 웃음은 노여움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깨진 술잔은 이미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시녀가 건넨 술잔에 그는 술을 따른 후 그녀를 불렀다.
“자, 이리와 한 잔 마셔라.”
남류청은 그의 속셈을 알 수 없었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화를 삭이려 술을 단번에 목구멍으로 들이부었다. 한데 몽달의 술이 얼마나 센지 깜빡하고 있었다. 그녀는 목구멍에 불이 붙는 듯하여 연거푸 기침을 쏟아 냈다. 황제는 그녀의 등을 살살 다독여 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지난번에 기침을 그렇게 해 놓고 벌써 잊었느냐? 당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 당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는 우유차 한 잔을 들고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남류청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얼른 받아 마셨다. 향긋한 우유차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리자 목구멍이 후련해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몇 모금 더 마시다가 황제가 묻는 말을 들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냐?”
남류청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과연 그녀가 무얼 하든 그를 속일 순 없었다.
“짐을 화나게 만들 생각이었나?”
황제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이냐?”
그의 얼굴과 말투 모두 온화했지만 남류청은 오히려 심장이 쿵쾅거리고 두려움을 느꼈다. 어떤 사람은 웃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을 두렵게 만든다던데. 아마 곤청롱을 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는 약해 보이기 싫었다. 안색을 찌푸린 그녀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덕분에 궁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데… 제 목숨이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이십니까?”
황제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웃음거리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모르는 척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녀는 스무고개를 할 생각도 없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후궁의 지위를 내리지 않으셨으니 이게 어찌 웃음거리가 아니겠어요?”
황제는 그녀의 말에서 원망을 읽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귀인이나 미인 따위에 연연한단 말이냐?”
그녀가 반문했다.
“폐하께서 나를 비에 올려 주실 순 없을까요?”
황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황제의 물건을 깨뜨린 무희 따위를 내쫓지 않고 비의 자리에 올리는 게 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럼 폐하께서는 나에게 어떤 자리를 주실 거예요?”
황제는 흥 하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너는 노비로서의 마음가짐이 하나도 없구나.”
남류청은 그제야 자기가 계속 ‘나’라는 호칭을 사용한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랫사람이 된 것이 이번이 처음이니 노비의 마음가짐이 없는 게 당연했다. 황제가 덧붙였다.
“그래, 알겠다. 네가 무희로 남아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짐이 네가 있을 곳을 바꿔 주마. 일단 돌아가서 소식을 기다리거라.”
남류청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렇게 그냥 돌아가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황제가 느릿느릿 웃으며 반문했다.
“설마, 여덟 명이 드는 짐의 가마에 태워서 처소로 보내 주랴?”
남류청는 속에서 천불이 타올랐다. 그녀처럼 대단한 미인을 앞에 두고 있으면 남자들은 모두 마음이 동하기 마련인데, 곤청롱은 눈이 멀었나? 아니면 성인군자라도 되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그날 밤을 떠올리면 그는 성인군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를 지그시 깨물고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더 있다간 황제가 참지 못하고 자신을 건드릴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 * *
다음 날 아침, 황제의 조서가 내려왔다. 대략적인 뜻은 남류청이 어전에서 덕을 잃고 황제의 물건을 깨뜨렸기에 무희에서 시녀로 강등하고, 그날부터 어전에서 시중을 들어 공적을 쌓아 죄를 씻으라는 뜻이었다.
예상과 전혀 다른 조서 내용에 남류청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하마터면 은니를 깨물어 으깰 뻔했다. 무희는 비록 장난감이지만, 어쨌든 작은 뜰이라도 있는 처소의 주인이고 시중을 받는 위치였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무희가 된 것도 난생처음 겪는 치욕인데, 더 치욕스러운 신분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황명을 전달한 시종은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를 일깨워 주었다.
“아가씨, 얼른 성은에 감사를 표하십시오. 얼른 이곳을 정리하고 저와 함께 어전에 가야 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남류청은 본래 삐죽 나왔던 입술을 다시 집어넣었다. 어전에 갈 수 있다면 시녀가 되는 것이 뭐 어떻겠는가? 그의 곁에 가면 분명 다른 기회가 또 있을 것이다. 그녀는 즉시 머리를 조아려 감사를 표하고 서둘러 소지품을 정리했다.
덕마와 탁려는 마음이 안 좋았다. 함께 지낸 지 벌써 여려 날이 지났고, 진심으로 그녀가 잘되기를 바랐다.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고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바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들과 같은 신분으로 강등당하다니.
한 나라의 공주가, 그것도 이렇게 예쁜 여인이… 정말 너무 안타까웠다. 두 시녀가 눈시울을 붉히자 남류청은 황제가 하사한 장신구 몇 개를 그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너희들을 실망시켰다면 미안해. 내 곁을 지키면서 좋은 꼴도 못 보고. 일단 이걸 받아. 나중에 내가 높은 지위에 오르면 그때 다시 너희들을 찾을게.”
그녀의 말에 두 시녀의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하긴, 이렇게 예쁜 얼굴로 황제 곁을 따를 텐데, 장차 희망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정말 상황이 반전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