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5화
남류청은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바로 곤청롱을 유혹해서 그를 정복한 후, 그를 달래서 그녀를 남원으로 돌려보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때가 오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긴장을 했다. 자신의 허리를 껴안은 남자의 손은 숯처럼 뜨거웠고, 연못 전체가 끓어오를 것 같았다.
그녀는 원래 담이 컸다. 여태껏 긴장이 뭔지 알지 못했고, 정조나 순결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거래하는 것에도 익숙했다.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떤 것이든 내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앞에 있는 남자는 손만 뜨거운 게 아니라 눈빛도 강렬했다. 눈동자 속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기 자신이 다 타버릴까 봐 겁이 났다. 작은 조각도 남기지 않고 뿌옇게 재만 남는 건 아닐까?
그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입김이 그녀의 얼굴에 닿자 그녀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연못 벽을 짚은 손가락이 조금씩 말리더니, 주먹을 꽉 말아 쥐어 뼈마디가 청백색을 띠었다. 하지만, 끝내 그는 입을 맞추지 않았다. 남자는 그녀의 목을 스치고 지나서 귓가에 속삭였다.
“왜 떨고 있느냐?”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나 안 떨었어요.”
남자는 벌을 주듯이 그녀의 귓불을 살짝 물었다.
“나?”
남류청이 숨을 들이쉬더니 다시 말했다.
“소인은 떨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피식 웃었다.
“짐은 네가 기뻐할 줄 알았는데? 이 순간을 오래도록 바라지 않았더냐? 그렇지 않으냐?”
“…….”
이건 그녀가 바랐던 순간이 맞았다. 하지만, 그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게다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다니… 그녀의 속셈을 더는 숨길 수 없었다. 난감한 상황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행히 그녀는 원래 낯짝이 두꺼웠다. 잠시 당황했지만 금방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남자는 다시 물었다.
“짐에게서 무엇을 얻고 싶으냐?”
남류청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에게 거래의 조건을 말하라는 건가? 굉장히 이성적인 그녀는 같은 값의 물건을 교환하는 걸 좋아했다. 각자 원하는 것을 취하면, 서로에게 얽매여 질질 끌려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곤청롱에 대해서 좀 자신이 없었다. 지금 자신의 진짜 목적을 그에게 드러내기에는 적절한 시기가 아닌 듯했다.
“말해 보거라.”
움푹 들어간 연못 벽에 나른하게 기댄 남자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녀를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허리를 더듬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제왕인 그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다. 말하지 않는 게 오히려 거짓으로 보일 것이다. 그녀는 긴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고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
“나는 폐하께서 남현속을 죽여 주길 바라요.”
그녀를 잠시 바라본 곤청롱이 껄껄 웃기 시작하더니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꼬집었다.
“야심이 적지 않은 계집이구나.”
그녀의 눈가에 물안개가 차올랐다. 어여쁜 미소를 보인 그녀는 결국 그의 품에 쓰러졌다.
하지만 곤청롱은 그녀에게 또 한 번의 의아함을 선사했다. 그는 연못에서 그대로 그녀를 취하지 않았다. 입맞춤조차 하지 않은 채 그녀를 장포로 감싸서 안아 들고 침전으로 돌아갔다.
남류청은 자신이 자제력이 굉장히 강한 남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를 정복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시간도 예상보다 더 오래 걸릴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계획이 실패할까 봐 걱정했다.
그래도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났다. 밤이 깊어지자 궁전 안에도 어둠이 내렸다. 양각 촛대 위에 굵은 백촉 하나만 꽂혀 있었다. 촛불이 흔들리며 바닥에 희미한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졌다.
황제의 침상에는 장막이 겹겹이 늘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었는지 장막이 가볍게 떨리는 것이 마치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침대 머리맡에도 유리등이 있었다. 반투명한 유리 속에 잠겨 있는 불빛은 서로 뒤엉켜있는 남자와 여자를 비추고 있었다.
한참 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고 몸의 근육이 전부 풀어진 것처럼 무너졌다. 잠시 후, 모든 것이 안정을 되찾았다.
두 사람 모두 숨을 돌렸다. 곤청롱은 곁눈질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은 무심코 묻은 먹 자국처럼 보였다. 덕분에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욱더 새하얗게 돋보였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미인이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그녀와 가장 친밀한 행위를 할 때조차 그녀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다. 설마 일을 다 마친 후에 또 이런 것에 흥미가 있을 줄이야. 남류청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지만, 그의 입술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었다.
“넌 진짜 공주 같지 않구나.”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류청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반문했다.
“이런 공주는 처음 보나요?”
남자가 웃으며 물었다.
“이런 걸 어찌 그리 잘 알지?”
“교습을 하는 마마가 가르쳐줬습니다.”
남자는 흥미로워했다.
“왜 그런 걸 가르쳤지? 출가할 때가 되어야 가르치지 않느냐?”
남류청은 잠시 침묵했다.
“난 정혼했었어요. 곧 출가할 예정이었죠.”
그 말에 곤청롱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가 다시 펴졌다.
“부마는 누구였지?”
“호국대장군 남원암藍遠岩.”
곤청롱은 짧게 소리를 내다 물었다.
“성씨가 남이군. 본가 사람인가?”
“먼 친척이에요.”
“그는 왜 너를 구하지 않았지?”
“그는 모르고 있을 거예요.”
곤청롱의 얼굴에 의혹이 떠오르자 남류청이 해명했다.
“부족에 전쟁이 벌어져서 출정했거든요. 도성에서 벌어진 일을 아직 모르고 있을 거예요.”
잠시 침묵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현속 그 구렁이가 부족 족장과 짜고 그를 도성에서 떠나게 만든 것 같아요.”
곤청롱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더니 웃으며 말했다.
“민왕이 야속했다고 탓하지 말거라. 너의 야심이 너무 컸던 탓이다. 여인이 무슨 조당에 관심을 두느냐? 그런 건 사내들의 일이니 생각하지 말거라. 그건 네가 생각할 일이 아니다.”
남류청은 그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소용없어요. 전 폐하의 무희가 되었으니 이미 돌아갈 수 없어요.”
곤청롱이 눈빛을 번뜩이며 물었다.
“돌아가고 싶으냐?”
남류청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돌아가면 죽음뿐인걸요.”
양각 촛대 위에서 백촉은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촛농이 흘러내려 가며 기괴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땀을 잔뜩 흘려 온몸이 끈적끈적했던 남류청은 몸을 꼿꼿이 세웠다.
“좀 씻고 싶어요.”
곤청롱이 그녀를 힐끔 보더니, 소리를 높여 사람을 불렀다. 곧 시녀가 다가와 남류청에게 얇은 욕의를 입혀 주었다. 그녀는 조용히 궁전 뒤채로 들어갔다.
곤청롱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요 위에 얼룩덜룩한 자국이 보였다. 희미한 불빛을 빌려 살펴보니 그건 홍매화가 곱게 핀 것도 같고, 또 작은 화염이 타오른 자국 같기도 했다. 붉은 핏자국 하나하나가 그의 눈 속에 각인되었다.
남류청이 전에 무슨 짓을 했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그를 놀라게 하진 않았다. 그가 비록 남원에 가본 적은 없지만, 남원은 풍습이 매우 개방적인 곳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의 의복에서도 알 수 있듯 말이다. 남녀가 함께 노래를 부르다 마음이 통하면 숲속에서 밀회를 즐긴다고 했다.
방금 침대에서 남류청의 노련함이 이를 더욱더 뒷받침했다. 약혼자가 있었다고 하기에 처녀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수가…….
그는 침대 머리맡에 있던 등잔불을 들고 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그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사람을 불러와 침대를 정리했다.
* * *
총애를 받은 후궁의 모든 여인들은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이튿날, 남류청이 있는 작은 뜰에는 금은보석과 능라 단자 등 여러 가지 하사품이 줄지어 들어왔다. 그런데 하사품이 많다는 것 말고는 특별하다고 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녀에게 마땅히 내려야 할 후궁 책봉 조서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제의 승은을 입었다는 것은 황제의 여인으로 낙인이 찍힌 것과 같았다. 아무리 낮은 지위라 하더라도 보통 노비들과는 달랐다. 그런데 남류청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그대로 무희 신분이라니, 그녀 입장에선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덕마와 탁려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원래 그녀들은 용모가 절색인 남류청이 황제의 사랑을 받으면 비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더라도 귀인이나 첩여婕妤(비빈의 칭호)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니 이런 결과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이건 귀공자가 기생을 장난삼아 데리고 놀고 적당한 돈을 지불하는 것과 진배없지 않은가? 이건 사람을 모욕하는 짓이었다.
두 시녀는 분개했지만, 남류청은 오히려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이런 허울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곤청롱이 품은 마음이었다.
* * *
이른 아침, 모든 후궁이 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다. 다들 방긋방긋 웃으며 평소처럼 시끌벅적 떠들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두세 명씩 모여서 고개를 맞대고 속닥거렸고, 이따금 황후에게 시선을 던졌다. 황제가 남류청에게 승은을 내리고도 후궁의 지위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황후가 어떤 생각인지 궁금해했다.
이번 일은 후궁에 있는 모든 여자에게 기쁨 반, 걱정 반이었다. 걱정거리는 황제에게 새로운 여자가 하나 더 생겼으니 그들에게 나눠 줄 정력과 시간이 적어졌다는 것이다. 기쁜 일은 그 여인이 절색 미인인데도 승급시키지 않았다. 대체 왜 황제가 그녀를 기뻐하지 않는지 모두가 궁금해했다.
그녀들은 호기심과 동시에 약간의 우쭐거림이 생겼다. 그들의 황제는 얼굴만 보는 우둔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가죽 주머니 안에 든 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물론 자신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결국 어떤 후궁 한 명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어제 남원에서 온 여인 처소로 행차하셨는데, 지위를 내리지 않으셨답니다. 혹시 폐하께서 깜빡 잊으신 건 아닐까요?”
화 귀인이 황후를 힐끔 보았다.
“겨우 남원에서 보내 준 무희 한 명일 뿐입니다. 폐하께서 그저 즐기신 것뿐인데 누가 진지하게 생각할까요?”
“맞아요.”
화비가 입술을 가리며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
“남원에서 온 무희 하나가 몽달의 후비가 된다니… 그거야말로 우스운 일이죠. 우리 폐하께서는 그녀에게 이미 충분히 하사품을 내렸어요.”
“그저 장난감일 뿐인데 그런 여인을 어찌 내세울 수 있겠어요. 그 여우 같은 얼굴 좀 보세요. 그런 여인은 데리고 놀기만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