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84)화 (984/1,192)

제984화

남류청의 춤에 취해 아무도 황제가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황후의 눈길도 남류청의 발에 머물러 있었는데,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느끼기엔 분명 괴로울 것이다.

이건 황후가 생각해 낸 처벌이었다. 지난번에는 황제가 나서서 그녀를 구했다. 그 일은 굉장히 불쾌했지만 그녀는 또다시 남류청을 혼쭐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처벌은 경고의 의미로 필요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렇게 오래 춤을 추면 분명히 많이 아플 텐데. 하지만 남류청은 안색 한 번 바뀌지 않았다. 황후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참을성은 제법이군.

땅바닥 위로 그림자가 천천히 드리웠다. 시선을 올린 황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얼른 일어나 예를 취했다.

“폐하.”

그제야 다른 비빈들도 황제를 보고 서둘러 무릎을 꿇고 예를 행했다. 남류청도 춤을 멈추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눈길이 숨을 헐떡이는 남류청의 흉부에 닿았다. 이내 그의 입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 일어나시오.”

그는 곧장 남류청에게 다가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깜짝 놀란 남류청은 나지막이 소리를 지르더니 겁에 질린 듯 팔을 뻗어 황제의 목을 감았다. 그녀의 시선은 황제의 목 뒤를 지나 솥 밑바닥처럼 어두워진 황후의 안색과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스쳤다.

그녀는 황후를 향해 방긋 웃으며 황제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녀는 온순한 토끼처럼 황제에게 안겨서 자리를 떠났다.

황제가 미인을 안고 떠나가니 비빈들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참 뒤에 정신이 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황후만 바라보았다.

황후는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고개를 숙였다. 두 치나 되던 새끼손가락 손톱이 부러진 채 손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황제는 남류청을 안고 자기 궁전으로 걸어갔다. 품속에 안긴 여인은 몸이 제비처럼 가벼웠다. 그녀가 내뿜는 호흡 때문에 그의 목이 간지러웠다. 뜨겁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한 그 숨결이 그의 피부를 꿰뚫고 피를 따라 그의 가슴까지 적시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킨 황제의 걸음이 빨라졌다. 시종들도 서둘러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오는 내내,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느껴지는 숨소리는 점점 더 또렷해졌다. 그 소리가 귓가에 맴돌자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남류청를 침전으로 데려온 곤청롱은 시녀에게 대신 약을 발라 주라고 명하더니 그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남류청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얼마나 참을 수 있을 것 같아?’

침대 머리맡에 앉은 그녀는 제 발에 연고를 바르는 시녀를 지켜봤다. 황제가 직접 데려왔으니 이대로 그냥 돌려보내지는 않을 텐데. 어쨌든 그의 곁으로 오면 일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짐작은 또 어긋났다. 저녁 무렵이 되자 대총관 사적이 와서 그녀를 가마에 태워 돌려보내라는 황제의 뜻을 전했다.

남류청은 가마 속에 앉아 하하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남자… 밀고 당기는 장난을 도대체 얼마나 하겠다는 거야?

* * *

남류청은 자기 처소로 돌아와서 또 며칠을 조용히 보냈다. 하지만 더 이상 황후가 귀찮게 하지 않았고 황제 역시 그녀를 찾지 않았다. 날씨가 갈수록 더워져 어느덧 한여름이 되었다. 그녀는 할 일 없이 시녀 두 명과 함께 바느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꾸미길 좋아하는 여인이었다. 남원에서 가져온 옷이 많지 않아서 직접 옷을 만들어 입어야 했다. 그녀는 아직 몽달의 의복이 익숙하지 않았다. 헐렁한 장포를 입으면 늘씬한 몸매가 다 가려져 미적 감각을 도무지 느낄 수 없었다.

다행히 그녀가 원하는 옷감들은 두 시녀가 늘 구해다 주었다. 그녀는 손재주가 좋아서 의복과 머리 장식을 만들었다. 또 악기도 만들었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라서 빈둥빈둥 놀 때도 있었다.

그녀가 텅 비어 있던 장목 상자를 반쯤 채우고, 화장대 위에 놓인 장신구 상자를 가득 채운 것도 모자라 남원 악기도 두세 개쯤 만들어 벽에 걸었을 때, 황제가 그녀를 불렀다.

남류청은 새로 만든 치마를 골라 입고 눈썹을 정성껏 그렸다. 눈썹먹으로 눈꼬리를 세운 그녀는 연지를 바른 후, 미간에 액황을 찍었다. 그녀를 태운 가마가 황제의 궁전으로 향했다.

황제는 편전에 앉아 있었다. 자단목으로 된 낮은 탁자 위에 술과 안주를 차려 놓고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악공이 호로사를 쥐고 있는 걸 보니 그녀를 불러 춤을 추게 할 모양이었다. 남류청은 매혹적인 자태로 예를 취했고 공손히 입을 열었다.

“소인, 폐하를 뵈옵니다.”

“일어나거라.”

곤청롱은 백자 술잔을 손에 쥔 채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짐이 혼자 술을 마시려니 재미가 없구나. 그래서 널 불러 춤이나 감상하려 한다.”

“폐하께서는 어떤 춤을 보고 싶으십니까?”

“아무거나 춰 보거라.”

남류청은 입술을 곱게 구부리고 웃었다. 세상에 아무거나인 춤은 없었다. 그녀는 악공에게 이 어려운 문제를 떠넘겼다.

“악공께서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소인이 춤을 추겠습니다.”

한쪽 벽에 멀뚱히 서 있던 악공이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악공은 입을 옴찔거렸다. 항상 명령에 따를 뿐, 어찌 제가 곡을 고르겠는가? 그래도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으니 그는 꾸물거리지 않고 흥겨운 곡조를 연주했다.

남원의 춤곡은 대동소이하고 주로 흥겨운 것이 많았다. 게다가 정해진 조합이 없었다. 연주를 듣자마자, 남류청은 가느다란 팔을 들어 올리고 몸을 비틀었다.

아름다운 여인은 매혹적인 춤을 추자 옷자락이 높게 펄럭였다.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는 형용할 수 없는 빛을 품고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촛불에 영롱하게 반짝여서 보는 이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이렇게 아름다운데도 황제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어두운 눈동자는 대부분 손에 쥔 술잔에 머물렀다. 마치 이 술잔이야말로 그의 흥미를 끄는 물건이라는 듯, 무희의 공연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곁다리에 불과했다.

황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으니 남류청도 곡조가 끝날 때까지 어떤 묘책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곡조가 끝나자 그녀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며 땅에 엎드렸다. 그때 황제의 목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

“잘 췄군. 술을 한 잔 하사하지. 이리 오너라.”

고개를 들어 황제의 눈을 바라본 남류청은 무언가를 알아내려 했지만, 전부 허사였다. 그녀는 황제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받았다. 몽달의 술은 독해서 남원의 술처럼 부드럽고 달지 않았다. 술 한 모금을 삼킨 그녀는 너무 독해서 몇 번이고 기침을 했다. 황제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비웃었다.

“술도 못 마시는 것이냐?”

“마실 줄 압니다.”

기침을 할 때 나온 물기가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적셨다.

“단지 몽달의 술이 익숙하지 않을 뿐입니다.”

“북부 지방에 있는 몽달의 술이 좀 독하지.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술을 마실 수 없으면 겨울에 고생하게 될 것이다.”

남류청은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겨울이 올 때쯤이면 자신은 이곳을 이미 떠난 뒤일 것이다.

황제는 술을 하사한 뒤, 그녀에게 물러가라고 하지 않았다. 함께 앉아서 안주를 먹었지만,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남류청은 식사가 너무 따분했다. 모든 일이 그녀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미인이 곁에 있는데도 황제는 오히려 현인 유하혜柳下惠(춘추시대의 현자) 같이 굴기만 했다. 그녀는 잠시 곤청롱에게 숨겨진 병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식사까지 마쳤으나 황제는 아직도 그녀에게 볼일이 더 남은 듯했다. 그는 떠나기 전, 그녀를 한번 힐끔거리며 말했다.

“땀을 많이 흘렸으니 목욕을 하고 가거라. 짐이 옷을 가져다주라고 하마.”

남아서 목욕하라고 하면 보통 딴생각을 하게 되기 마련이건만. 황제가 그 말을 할 때의 태도가 너무 딱딱했다. 게다가 목욕을 하고 가라고 할 뿐 그녀를 취할 뜻은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남류청은 기회만 있다면 모조리 잡을 생각이었다. 몸을 숙여 감사 인사를 한 그녀는 시녀를 따라 욕탕으로 갔다.

욕탕엔 콸콸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습기가 자욱했다. 남류청은 욕탕을 차지하고 있는 연못을 발견했다. 불규칙한 모양의 연못 바닥에는 백옥이 깔려 있어 반짝거렸다. 물이 나오는 곳은 커다란 학의 머리 모양이었다. 학의 입에서 물이 흘러나와 연못으로 떨어지면서 자욱한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는 사이로 선경이 펼쳐져 있었다.

매우 뜻밖이었다. 몽달 왕궁에 온천이 있을 줄이야! 물이 부족한 나라에서 온천을 즐기리라곤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는 시원하게 씻고 싶었기에 시녀에게 시중을 받으며 연못에 몸을 담갔다.

그녀는 온천을 만끽했다. 물속에 오랫동안 머물고 좀처럼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지 않았다. 수면 위에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물풀처럼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시녀는 수면을 바라보며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약 저 여인이 여기에 빠져 죽는다면, 자신도 함께 죽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막 소리를 내어 그녀를 부르려고 하는데, 갑자기 남류청이 머리카락을 젖히며 물속에서 솟아올랐다. 연못 반대편까지 물줄기가 휘날려 비가 내리는 듯 후두둑 물이 떨어졌다. 연못에는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남류청은 크게 숨을 내쉬며 즐거워했다. 그 개구쟁이 같은 모습에 시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또다시 물속으로 뛰어들어서 마치 인어처럼 연못에서 헤엄치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칼이 등 뒤로 넓게 퍼져서 짙은 먹물처럼 보였지만, 물 밑에 있는 몸은 하얗게 빛나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때때로 물 위에 올라와 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잠수하며 즐거움을 만끽했다. 매번 그녀가 물 밖으로 튀어나올 때마다 시녀들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인은 역시 미인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눈을 뗄 수 없었다.

뿌연 물안개 속에서 인어 한 마리가 연못을 빙빙 돌며 헤엄치는 것이 마치 한 줄기 빛이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물 밑에서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곤청롱의 가슴에 차츰 춘수春水가 스며들었다.

그는 문가에 서서 연못 속에서 헤엄치는 미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순간 그는 스스로 장포를 벗어던지고 연못 속으로 들어갔다. 비로소 눈치를 챈 시녀가 다가오자 곤청롱은 손을 내저으며 그녀를 밖으로 나가게 했다. 그는 미끄러운 연못 벽을 따라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한창 신나게 놀던 남류청은 건장한 가슴이 나타나자 깜짝 놀랐지만 곧 상황을 눈치챘다. 재빨리 놀라는 척 고개를 든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곤청롱을 쳐다보았다.

미인은 눈빛은 물안개처럼 촉촉했고 왜인지 모르게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곤청롱은 한눈에 그녀의 농간을 간파했다. 분명히 그를 유혹하려 하는데 아닌 척하는 것이리라. 그녀의 작태가 우스웠지만, 그는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붙들고 그녀를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꽤 오랫동안 놀던데 힘들지 않느냐?”

남자의 쉰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남류청은 까닭 없이 가슴이 떨려왔다. 그녀는 정신을 다잡으며 고개를 들고 웃었다.

“폐하의 욕탕이 너무 편안해서 소인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얼굴을 굳히며 천천히 입을 뗐다.

“짐도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주체가 안 되는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