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82)화 (982/1,192)

제982화

화 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날씨가 좋아 산책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마마를 뵐 수 있을 줄 몰랐습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여기까지 오면서 여러 자매님들을 봤습니다. 방금 궁에 들어온 무희까지 만났습니다.”

황후가 맞장구를 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봤는가? 정말 그렇게 천하절색이던가?”

“절색이라니요. 여우같이 생겼던걸요. 어찌 마마처럼 단아하고 현숙한 분에게 비하겠습니까, 단지…….”

황후가 물었다.

“단지 뭐란 말인가?”

“남자들이란 하나같이 여우 같은 얼굴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화 귀인이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지위도 낮고 집안도 별 볼 일 없었던 화 귀인은 이렇다 할 총애도 받지 못했다. 그러니 황후는 당연히 그녀를 너그럽게 대했다. 가끔 농담 두어 마디를 하더라도 뭐라 하지 않았고 그녀가 말을 마치고 나면 한 번 웃고 지나가곤 할 뿐이었다.

갈림길에 도착하자 화 귀인은 공손하게 황후를 배웅했다. 그 천하절색의 무희가 이제 황후 손아귀에 들어간 것 같아 화 귀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황후는 보수적인 사람이라 여우 같은 여자들이 미색으로 남자를 대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황후가 싫어한다면 그 결말은 뻔했다. 후궁은 전쟁터였다. 피를 보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곳이었다.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아 황후가 사람을 보내 남류청을 불렀다. 궁비들이 어화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있으니 그녀가 춤을 춰서 여흥을 돋우라는 것이었다. 남류청은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일찍이 예상했기에 놀라지 않았다. 화장대 앞에 앉아 시녀들에게 치장을 하게 시켰다. 하지만 덕마와 탁려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의 머리를 정리해 주면서 당부했다.

“아가씨, 황후 마마 앞에서는 예의를 지키셔야 해요. 큰일 납니다.”

두 시녀가 자신을 걱정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남류청은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푸른 가마가 그녀를 데리러 왔다. 남류청은 가마에 올라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황후가 직접 자신을 불렀으니 이번 판은 잘 해내야 했다.

* * *

몽달은 일 년 내내 물이 부족했지만 어화원은 초록이 무성했다. 각지에서 가져온 진기한 화초들이 즐비하고 다양한 나무가 있어 궁비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이었다.

가마에서 내린 남류청의 눈에 사람이 가득 모여 있는 정자가 보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모두 화려하게 치장한 것이 황후와 그녀가 데려온 궁비들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멀리서도 그곳의 짙은 향기가 느껴졌다. 짙은 향을 좋아하는 몽달 여인들, 궁비들도 경쟁하듯 향을 뿌려 대서 향기가 코를 찌르는 것 같았다. 남류청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나쁜 체취를 가리려고 이렇게 짙은 향을 쓰는 거겠지. 앞에 도착한 그녀는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렸다.

“황후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 여러 마마들께도 문안 드립니다.”

상석에 앉아 있던 황후 뒤에는 두 시녀가 천천히 아모선鵝毛扇(거위 깃털로 만든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황후의 좌우에는 화비와 용비가 앉아 있고, 다른 궁비들은 그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모두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국의 여인을 보고 있었다. 황후가 여인을 부른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다들 구경하러 온 것이었다. 황후는 그녀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바로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남류청이 고개를 들자 누군가 숨을 급하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끝까지 나지 않고 중간에 멈췄다. 황후가 소리의 주인을 찾아 차갑고 매서운 눈빛을 보냈기 때문이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오직 화 귀인만은 느긋한 얼굴로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화 귀인은 황후의 표정을 천천히 감상하며 그녀가 상상한 대로 일이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다.

황후는 남류청의 얼굴을 뜯어보며 과연 여우 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는 물론이고 그녀까지도 자꾸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일어나라.”

황후가 천천히 일어나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원래 남원의 공주였다고?”

남류청은 조금 우울해졌다. 궁에서 그녀의 신분은 비밀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지금은 아닙니다.”

황후의 목소리가 냉랭했다.

“공주가 무희가 되었는데 잘 적응하고 있구나.”

남류청은 대답하지 않았다. 황후도 잠시 말이 없었다.

“궁에서 자랐으니 궁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알고 있겠지?”

“규율입니다.”

남류청이 대답했다. 황후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너무나 차가웠다.

“그래도 총명한 편이구나. 바로 규율이다. 위치에 맞는 일만 하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말아라. 생각해도 네 것이 아니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황후가 짧게 대답했다.

“우리도 네 춤을 한번 보고 싶구나. 시작해 봐라.”

춤을 추라니… 악사도 없고 반주도 없이 어떻게 추란 말인가? 하지만 남류청은 주저하지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 내더니 하늘하늘 몸을 돌려 발끝을 세우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초여름이지만 뜨거운 한낮의 태양이 몸에 내리쬐니 아주 작은 불씨가 그녀를 굽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길은 점점 커져 얼마 지나지 않아 땀이 줄줄 흘렀다. 땀에 젖은 얇은 옷은 등에 찰싹 달라붙었고 이마 위의 검은 머리칼도 땀으로 한데 엉겨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타고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땀방울은 햇빛 아래서 투명하게 반짝였다. 다른 사람이 이런 모습이었다면 볼품없었겠지만 남류청에겐 색다른 매력이 흘렀다. 물속에서 나온 요괴처럼 부드러운 몸으로 사람을 감아서 혼을 빼앗는 것 같았다.

황후는 보면 볼수록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무슨 옷을 입은 건지 너무 짧아서 팔을 들기만 해도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그리고 치마는 또 너무 달라붙어서 남류청이 엉덩이를 흔들 때마다 치마가 찢어지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찢어지지 않더라도 둥근 엉덩이가 도드라져 보였으니 그게 보기 좋겠는가?

주변을 설핏 돌아보니 사람들은 모두 혼이라도 빼앗긴 것 같았다. 시종 하나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살짝 입을 벌리고 있어 금방이라도 침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거세한 남자도 이럴진대 혈기왕성한 정상적인 남자는 오죽할까……. 황후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화 귀인은 눈을 감은 황후를 보고 이제 됐다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류청이 왜 이토록 유혹적인 춤을 춘 건지 의아했다. 다른 무희들은 하나같이 황후 앞에서 몸을 조신히 하는데 말이다.

후궁에도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만 믿고 근본 없이 굴었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혼절한 척하며 황제의 품으로 쓰러졌고 결국 황제의 침상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며칠 후 황후가 구실을 찾아 한바탕 매질을 했고, 미인은 매질을 버텨 내지 못하고 침상에서 보름이나 와병하다가 감기까지 걸려 두세 달을 앓다 죽었다.

여인의 몸이 약해 복도 없이 죽었다고 했지만 실상 그녀의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황후에게 찍히면 좋게 끝날 리가 없었다. 낯빛이 어두워진 황후가 결국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라!”

땀을 뻘뻘 흘리며 춤을 추던 남류청이 춤을 멈췄다. 그녀가 숨을 헐떡거리자 불룩한 가슴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황후는 더욱 화가 나서 싸늘하게 말했다.

“남원의 춤은 원래 이러냐?”

남류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본궁이 남원에 가본 적이 없다고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말거라. 남원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공작무인데 네가 방금 춘 것은 무엇이냐?”

남류청이 웃었다.

“남원의 춤은 너무나 많습니다. 공작춤은 그중 하나이지요. 남원의 춤으로 이야기하자면 일 년을 춰도 겹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황후가 냉소했다.

“공주라는 것이 기루의 기녀 같은 춤을 추다니… 부끄러움도 모르느냐?”

남류청은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저는 무희일 뿐입니다.”

“무엄하다!”

황후의 시녀 은월이 즉각 호통쳤다.

“마마께 무슨 말버릇이냐?”

그녀는 무희이니 마땅히 자신을 ‘소인’이라고 불러야 할 텐데 ‘저’라고 하다니! 보이지 않게 황후의 신분을 끌어내린 것이니 시녀가 호통을 친 것이다. 곁에 있던 화비가 차갑게 웃었다.

“저 아이에게 규율을 가르쳐라.”

황후는 말이 없었다. 그건 무언의 승낙이었다. 시녀 은월이 손을 치켜들어 남류청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황후의 최측근인 그녀에겐 궁비들도 은월 아가씨라 부를 정도였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아랫사람을 가르치는 데 그녀가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자신의 손을 다치지 않고 아프게 때릴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뺨을 맞은 남류청의 얼굴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거기다 입안에는 비릿한 맛이 차올랐다. 어린 계집의 손이 이렇게 매울 줄이야. 그 따귀에 남류청은 진짜로 화가 났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은월의 뺨을 때렸다.

무방비 상태였던 은월의 하얀 얼굴에 손자국이 났다. 은월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서 얼굴을 움켜잡았다. 감히 황후의 사람을 때리다니, 이 무희가 미쳤나? 황후도 남류청이 제 사람을 때리자 노여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봐라, 윗사람에게 거역하는 저것을 끌어내 죽을 때까지 쳐라!”

무희 하나 죽인다고 황제가 자신에게 따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호리호리한 시종 두 명이 바로 뛰어와 남류청을 끌어냈다. 남류청은 반항하지 않았다. 뒤돌아 황후를 보는 그녀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서재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동으로 만든 커다란 솥에서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불수감佛手柑 나무를 훈향하는 것인데, 햇볕에 잘 말린 감피柑皮를 가루로 만들어 솥에 붓고, 그 밑에는 약한 불로 쐬면 감미로운 불수감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차올랐다.

황제가 정무를 처리할 때, 감히 시끄럽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문 앞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 때면 사적查赤이 힐끔 보곤 조용히 나갔다. 그 사람은 사적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사적은 다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와서 황제의 곁을 지켰다. 황제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별일 아닙니다.”

사적이 대답했다.

“어떤 이가 황후 마마를 화나게 해서 매를 맞고 있습니다.”

황제는 감탄을 내뱉을 뿐 역시 시선을 옮기진 않았다.

“어떤 바보가 황후의 심기를 건드렸나?”

사적은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답했다.

“남원에서 보내온 여인입니다.”

글을 쓰던 황제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는 결국 시선을 들어올리곤 물었다.

“그녀가 어쩌다 황후의 심기를 건드렸지?”

황제의 미간은 약간 찌푸려졌다.

“듣기로 황후 마마께 무례를 범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황후 마마를 모시는 은월에게 손찌검을 했다고 합니다. 마마께서 진노하셔서 몽둥이로 때려죽이라 명하셨습니다.”

황제는 붓을 잡은 채 눈길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입을 열었다.

“춤을 그렇게 잘 추는데 이렇게 죽다니 아깝구나. 짐의 뜻을 전하거라. 목숨은 살려 놓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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