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1화
곤청롱도 그 얼굴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연주는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미인은 마치 그 작은 상자가 자신의 무대인 것처럼 그 안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원의 옷을 입고 있었다.
달라붙는 치마는 아름다운 춤선을 드러냈고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면 옷도 같이 올라가 하얗고 잘록한 허리가 드러났다. 허리를 한들거리며 경쾌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숲속의 선녀 같았다. 그녀의 가냘픈 몸이 매혹적으로 움직이자 언뜻언뜻 그 잘록한 허리가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숨을 멈추고 멍하니 구경만 했다. 하나같이 전부 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미인은 바람이 스치고 간 연약한 버드나무 잎처럼 팔을 내렸다. 사람들의 시선에 진이 빠진 듯 축 늘어져 상자에 다시 누웠다. 그와 동시에 상자의 뚜껑이 닫혔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환각이었던 것처럼 혼이 나간 듯 서 있었다.
남원의 사절이 원했던 것이 바로 이거였다. 그는 몹시 뿌듯해하면서 곤청롱을 보았다.
“폐하, 마음에 드십니까?”
곤청롱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귀국에서 제일 뛰어난 무희인가?”
“아닙니다. 저희 남원의 도령都靈 공주입니다.”
사절이 웃으며 대답했다. 곤청롱에게는 좀 의외였지만 웃으며 대답했다.
“과연 미인이로군.”
“폐하 마음에 드시니 다행입니다.”
“어째서 공주를 나무 상자로 옮겨왔단 말인가?”
남원 사절은 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옆에 있던 시종에게 건넸다.
“민왕 전하의 친필 서신입니다. 이 서신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곤청롱은 서신을 받아 보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남원 사절은 그의 생각을 가늠할 수 없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바닥에 살짝 땀이 나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난 후, 곤청롱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남겨 두게.”
남원 사절은 크게 기뻐하며 절을 올리고 물러갔다. 저 아름다운 얼굴이 국익이 되었다. 민왕 전하의 이번 작전은 분명 성공적이었다.
* * *
정신을 차린 남류청은 커다란 침상에 누워 있었다. 부드러운 요를 깔고 금실 은실이 수놓아진 화려한 이불을 덮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그걸 보자 그녀는 자신이 몽달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봤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먹은 약의 후유증이었다. 분명 힘을 내어 자신이 놓인 환경을 파악해야 하는데 아무런 힘도 나지 않았다. 결국 몽달의 포로가 된 것인가?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었더라면 그녀는 절대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옥좌에 앉아 있던 그 남자를 떠올려 봤다. 그때 그녀는 아직 약에서 깨지 않아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 남자의 크고 건장했던 체구가 떠올랐다. 앉아 있었지만 위압감이 느껴졌다. 무시할 수 없는 제왕의 기운이 느껴졌다.
남원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작고 말랐지만 민첩했다. 몽달 사람들은 크고 건장했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다들 머리는 단순한 무뢰배들이었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무뢰배의 손을 벗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남원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휘장 밖에서 누군가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손을 뻗어 휘장을 살짝 들어 보니 누군가 안쪽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예 휘장을 걷어 보니 통통한 사람이 웃고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아가씨, 소인이 옷을 갈아입혀 드릴게요.”
그녀는 남류청의 경계 가득한 눈빛에 웃음 지었다.
“소인은 아가씨의 시중을 들러 온 덕마德瑪라고 합니다.”
남류청은 지난 며칠 동안 나무 상자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약물을 썼기 때문에 대부분 정신이 나가 몽롱한 상태였다. 이제 정신을 차려야 했기에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하지만 너무 갑자기 일어나서 현기증이 났다. 다행히 덕마가 얼른 부축해서 쓰러지지 않고 침상으로 돌아가 누울 수 있었다.
덕마가 그녀에게 입혀 준 옷은 역시 남원의 옷이었다. 옷깃을 비스듬하게 여미는 웃옷과 달라붙는 통치마. 옷자락과 허리춤이 겨우 맞닿아 있어 조금이라도 팔을 들면 그녀의 뽀얀 허리선이 드러나 허튼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사실 몽달 황궁에서 여인을 이런 점잖지 못한 차림으로 두는 건 그녀를 업신여긴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명령이니 덕마도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옷을 갈아입은 남류청은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었다. 그녀는 양쪽으로 늘어진 머리를 느슨하게 틀어 올려 머리 장식을 꽂았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를 풀고 흔들자 새까만 머리칼이 비단결처럼 너울지며 찰랑였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한숨 자고 나니 피로와 여독이 사라져 거울 속의 얼굴은 발그레하게 윤기가 흐르고 커다란 두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남원 제일의 미녀였고 수많은 남원 용사들 마음속의 여신이었다.
그런데 어찌 이런 곳을 떠돌며 죽는 날만 기다릴 수 있겠나. 몽달 황제의 기분을 좀 맞춰 주다가 이곳을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가 남현속藍玄粟과 결판을 낼 것이다. 그때 그녀를 바라보던 덕마의 입에서 찬미의 말이 튀어나왔다.
“아가씨, 정말 아름다우세요.”
남류청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살짝 웃었다. 아름다운 외모는 그녀의 재산이었고, 지금 믿을 수 있는 것도 그 얼굴밖에 없었다.
남류청은 자신의 외모에 엄청난 자신감이 있었다. 그녀를 한 번 본 남자라면 누구든 그녀를 그리워했다. 그녀는 자신을 곧장 몽달 황제에게 데려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몽달 황제는 그 후로도 며칠 동안이나 그녀를 불러들이지 않았다.
남류청은 몽달 황제의 안목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정말 그녀가 그립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지금 뜸을 들이는 건가.
그녀는 자유롭게 지내고 있었기에 직접 몽달 황제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얼굴을 보고도 황제가 무관심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초여름은 날씨도 좋고 경관도 그림처럼 아름다워 몽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남류청은 호수를 따라 난 오솔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호수를 반쯤 지나 왼쪽으로 돌아서면 황제가 머무는 곳이다. 몽달 황궁은 다른 곳과 달랐다. 지고 무상의 군주가 머무는 곳이었다.
곤청롱은 궁전 한 채를 차지한 게 아니라 작은 마을과 같은 규모의 궁전에서 머물고 있었다. 크고 작은 궁전들은 회랑을 통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여기서 정무를 보고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그의 총애를 받는 비는 황제를 편히 모실 수 있도록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남류청은 덕마와 탁려를 통해 몽달의 황궁 구조를 알게 되었다. 그녀들은 궁에서 보낸 그녀의 시녀였다. 사실 그녀의 지위는 상당히 애매한 상황이었다. 분명 남원의 귀한 공주이지만 아랫사람들은 그녀를 아가씨로 불렀다.
곤청롱은 공주라는 그녀의 신분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도 상관없었다. 남현속, 그 늙은이가 저를 잡아 선물로 보냈으니 자신을 공주라고 부르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녀는 자그마한 처소에 머물고 있었다. 곤청롱이 있는 곳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녀의 시중을 드는 덕마와 탁려를 제외하면 막일하는 하인 두셋이 전부였다. 가만 보면 그녀는 첩만도 못한 것 같았다. 덕마와 탁려가 늘 그녀의 춤을 칭찬하는 것을 보면 그녀를 대충 무희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남원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두 춤을 잘 췄다. 남원의 공주이니 그녀의 춤 실력은 당연히 출중할 터였다. 그녀가 춤을 출 때마다 사람들은 그 춤에 취해 한참이 지나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곤청롱 앞에서 춤을 췄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남자는 왜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덕마와 탁려는 얼른 남류청을 데리고 한쪽으로 비켜서더니 고개를 숙였다.
“누구야?”
남류청이 물었다.
“화 귀인입니다.”
덕마가 소리 죽여 대답했다. 남류청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엄한 남원 공주가 고작 귀인 앞에서 예를 올려야 한다니! 조상님들이 보고 있다면 화가 나서 땅속에서 튀어나오셨으리라.
화 귀인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류청을 훑어보았다. 차림새가 다른 여자는 쉽게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법이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오만하게 말했다.
“네가 바로 남원에서 왔다는 무희로구나? 고개를 들어 봐라.”
남류청은 고까웠지만 고개를 들어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화 귀인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 깜짝 놀랐다.
아랫사람들이 남원에서 보내온 무희가 세상 비할 바 없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했지만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었다. 후궁에 들어오는 여자 중 예쁜 사람들은 넘쳐났다. 설마하니 고작 남쪽 여인에게 질까? 그런데 남류청의 얼굴을 보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여자가 보아도 놀라고 질투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화 귀인은 속이 쓰렸다. 하지만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이런 미모를 가진 여인이라면 누군가 손을 쓸 것이다. 그녀는 남류청이 무례하게 굴어도 크게 개의치 않고 웃음을 지었다.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정말 예쁘구나.”
진심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서 화 귀인은 떠났다. 덕마가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화 귀인의 미움을 사셨어요.”
남류청은 멀어져 가는 화 귀인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서 있다가 돌아섰다.
“돌아가자.”
“학 보러 안 가세요?”
탁려가 물었다. 조금만 더 가면 학이 있었다. 방금 전까진 학을 보러 간다고 했는데… 왜 또 안 간다는 거지? 남류청이 대답했다.
“안 보련다.”
남류청은 화 귀인이 그녀에게 해코지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그녀에게 손을 뻗을 사람이 있다는 거겠지. 그 사람의 신분이 화 귀인보다 높을 거라는 건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소란이 벌어진 후엔 곤청롱이 그녀를 얼마나 더 내버려 둘 수 있을까?
목적을 이루었으니 곤청롱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이제 그가 찾아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면 된다.
* * *
화 귀인은 갈림길에 도착하자 잠시 머뭇거리더니 불탑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녀를 따르던 시녀들 역시 조용히 불탑으로 향했다. 화 귀인은 불탑 안까지 들어가진 않고 불탑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한 바퀴를 돌아 정문에 도착할 무렵, 화 귀인은 안에서 나오는 황후와 마주쳤다. 황후가 매일 이 시간 불탑에서 불공을 드린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화 귀인은 우연히 마주친 척하며 인사를 올렸다.
“신첩, 황후 마마께 문안드리옵니다.”
황후는 인사를 받고 물었다.
“어떻게 여길 다 왔는가?”